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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제’는 성적에 영향을 줄까

‘정경유착 끊기 위해 기업이 할 일’ 숙제 낸 재판부, 아버지는 신경영, 아들은 어떤 비전 제시할까
등록 2019-12-14 06:01 수정 2020-05-02 19:29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2월6일 국정 농단 파기환송심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왼쪽). 2008년 4월22일 이건희 당시 삼성그룹 회장이 퇴진 성명을 발표하기에 앞서 인사하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선임기자, 김진수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2월6일 국정 농단 파기환송심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왼쪽). 2008년 4월22일 이건희 당시 삼성그룹 회장이 퇴진 성명을 발표하기에 앞서 인사하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선임기자, 김진수 기자

“정치권력자로부터 뇌물을 요구받을 때 기업이 응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음 기일까지 답변을 달라.” 12월6일 서울고법에서 열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파기환송심 공판에서 재판장 정준영 부장판사가 피고인 이 부회장에게 한 말이다. 재판장이 피고인에게 일종의 ‘숙제’를 낸 것이다. 정 부장판사는 앞서 10월25일 첫 공판 때도 비슷한 질문을 던졌다.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당시 만 51살의 이건희 삼성그룹 총수는 낡고 썩은 관행을 버리고, 사업의 질을 높이자는 이른바 ‘삼성 신경영 선언’을 하고 위기를 과감한 혁신으로 극복했다. 2019년, 똑같이 만 51살이 된 이재용 삼성그룹 총수의 선언은 무엇이고, 또 무엇이어야 하는가?” 아버지(이건희 회장)는 당신 나이 때 미래 비전을 제시했는데, 아들(이재용 부회장)인 당신은 어떤 비전을 갖고 있느냐는 미묘한 질문이었다.

‘회복적 사법’ 소신에서 나왔다?

정 부장판사의 질문은 다른 재판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가 낸 ‘숙제’의 의도를 놓고 다양한 해석이 나왔다. 경제지와 보수 언론들은 대부분 이 부회장 쪽에 유리한 해석을 내놨다. 재판부가 그의 집행유예를 암시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투였다. 그 근거로 ‘회복적 사법’이라는 개념을 들었다. 마침 정 부장판사는 7년 전인 2012년 에 회복적 사법을 주제로 글을 기고한 적이 있었다. 언론들은 “회복적 사법에 대한 소신이 확고한 재판장의 질문에 삼성은 성의껏 답해야 한다”며 이 부회장을 교묘하게 편들었다.

하지만 정 부장판사는 이 글에서 회복적 사법의 일반론을 말했을 뿐이다. 그는 2011년 개봉한 영화 을 예로 들며 범죄에 대한 법률가의 대처 방식을 고민해보자고 제안했다. 영화는 주인공이 아무런 조건 없이 약혼자의 뺑소니 사고 가해자를 용서했는데, 그 가해자가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른다는 내용이다. 정 부장판사는 ‘가해자의 직접적인 사과나 대화 없는 피해자의 일방적 용서로는 회복적 가치가 실현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회복적 사법(‘회복적 정의’라고도 한다)은 처벌보다는 피해 회복과 재범 방지를 중요시하는 개념이다. 범죄의 본질을 개인 간 갈등으로 보고 개인 간의 잘못을 바로잡는 게 형사처벌의 목적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처벌이 아닌 피해 회복과 용서, 사과, 화해에 무게를 두는 개념이다.

이에 반해 기존 형사사법은 처벌을 앞세운다. 범죄는 법을 위반함으로써 국가 질서를 훼손하는 행위다. 따라서 개인의 용서와 화해보다는 범죄에 대한 엄한 처벌이 중요하다. 엄정한 법 집행은 제2, 제3의 범죄를 막는 예방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범죄를 줄이면 결과적으로 국가 전체에 이익이 된다.

하지만 회복적 사법 관점에서 보면 엄한 처벌은 가해자에게 새로운 해악을 부과해서 결과적으로 사회적인 해악의 양을 늘린다. 이뿐만 아니라 가해자가 피해자의 피해 회복에 나설 기회를 차단한다. 피해자가 형사사법 절차에서 소외되는 결과도 낳는다. 피해자의 원상회복 없이 가해자에게 고통만 주는 사법제도는 사회 전체적으로 큰 손실을 낳는다.

치명적 약점… 형사사법 보완하는 개념

그러나 회복적 사법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피해자의 원상회복 정도에 따라 처벌 강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동일한 불법행위에 동일한 양의 책임을 부과하는 형벌의 공정성을 침해한다. 똑같은 범죄인데도 가해자의 경제력에 따라 형량이 달라진다면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폐해가 더욱 심각해진다. 결국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법의 기본 원칙을 훼손한다. 따라서 회복적 사법은 기존 형사사법 제도의 약점(피해자의 피해 회복을 고려하지 않는 점)을 보완하는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정 부장판사도 에 기고한 글에서 회복적 사법을 ‘전통적 형사사법의 보완적 방법’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정 부장판사가 이 부회장에게 ‘재발 방지 대책’을 주문한 것을 그의 형량을 예측할 수 있는 단서로 보는 것도 성급하다. 정 부장판사는 첫 공판에서 “삼성그룹 내부에서 기업 총수도 무서워할 정도의 준법감시제도가 작동하고 있었다면 피고인들뿐 아니라 박 전 대통령과 최서원(최순실)씨도 이런 범죄를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이와 관련해 미국 연방양형기준 8장과 그에 따라 미국 대기업들이 시행하는 실효적인 감시제도를 참고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부회장의 범죄를 준법감시제도 부재 등과 연결하는 것은 매우 궁색해 보인다. 앞서 2008년 삼성 비자금 사건이 터졌을 때 삼성은 이건희 회장의 퇴진을 포함한 ‘고강도’ 쇄신책을 발표했지만, 결국 10년 뒤 이 부회장의 기소를 막지 못했다. 삼성은 2008년 4월 조준웅 특별검사팀의 수사 결과 발표 직후 이 회장의 경영 일선 퇴진, 전략기획실 해체, 4조원대의 차명재산 사회 기부 등을 약속했다. 이 회장은 “국민 여러분께 많은 걱정을 끼쳐드렸다. 이에 따른 법적·도의적 책임을 다하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이 회장은 2009년 5월 대법원에서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 혐의가 무죄로 확정되고 당시 이명박 대통령의 특별사면까지 받자 슬그머니 회장으로 복귀했다. 또 차명재산 사회 기부 약속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삼성은 해체된 전략기획실을 대신해 미래전략실을 만들었는데, 미래전략실은 2017년 박영수 특검팀에 의해 삼성의 ‘뇌물 제공’을 수행한 조직으로 지목됐다. 미래전략실은 그해 2월28일 해체됐다.

이런 전력은 삼성이 이 부회장 파기환송심에서 재판장의 숙제에 내놓을 답을 과연 신뢰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갖게 한다. 재판장의 주문대로 “실효적이고 실질적인” 준법감시제도를 만든다 한들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삼성이 이런 의문을 해소하지 못한다면 파기환송심에서 이 부회장의 형량(집행유예)을 유지하는 결과를 얻어내기는 힘들어 보인다. 검찰 관계자는 “재판부가 삼성이 내놓은 답을 반영해 판결문을 쓴다면 법리적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2018년 12월13일 검찰이 삼성바이오로직스 본사를 압수수색하는 동안 직원들이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2018년 12월13일 검찰이 삼성바이오로직스 본사를 압수수색하는 동안 직원들이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삼바 사건, 증거가 될 것인가

검찰이 수사 중인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 사건(삼바 사건)은 이 부회장 파기환송심의 또 다른 변수다. 박영수 특검팀은 11월25일 2차 공판 때 삼바 사건과 이 사건과 관련된 증거인멸 사건의 수사기록을 증거로 신청했다. 최근 증거인멸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삼성전자 임원 등은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회계 부정 혐의에 대한 검찰 수사는 아직 진행 중이다.

박영수 특검팀은 삼바 사건 수사기록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을 입증하는 중요한 증거로 본다. 특검 관계자는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위해 무리한 합병을 기획했고,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 삼바의 회계 부정까지 저지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삼성의 현안에 포함되는 것으로 이 부회장의 양형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라고 말했다. 이 부회장 쪽이 집행유예를 유지하기 위해 파기환송심에서 양형만 다투겠다고 한 터라 삼바 사건 관련 기록은 반드시 증거로 채택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 부회장 쪽은 12월6일 공판에서 삼바 사건 관련 기록을 증거로 채택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 부회장 쪽은 “삼바 관련 사건은 파기환송심 재판과 전혀 별개의 사건”이라는 이유를 댔다. 파기환송심은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삼성의 경영 현안과 관련해 청탁하고 그 대가로 뇌물을 제공했다는 게 주요 공소사실이다. 삼성물산 합병 과정에서 국민연금 등 주주들에게 손해를 끼쳤는지, 합병 비율은 공정했는지 등이 쟁점이다. 반면 삼바 사건은 합병 비율을 사후 정당화하려는 목적으로 자회사인 바이오에피스의 회계 처리를 부정하게 했는지가 쟁점이다. 이처럼 두 사건의 내용과 쟁점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증거로 채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부회장 쪽은 삼바 사건 관련 수사기록이 증거로 채택된다면 이 사건에 대한 법원의 최종 판단이 나올 때까지 이 부회장의 파기환송심을 중단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삼바 사건의 유무죄 여부가 이 부회장의 형량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법조계에서는 이 부회장의 파기환송심이 장기화될 것으로 전망한다. 이 부회장 쪽이 삼바 사건 수사기록의 증거 채택에 부동의할 경우, 이 사건의 관련자들을 증인으로 채택해 증인신문을 해야 할 수도 있다. 고위 법관 출신의 한 변호사는 “삼바 사건까지 재판에 넘겨지면 이 부회장의 법정 출입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예외 없이 장기화되는 재판

그동안 재벌 총수가 피고인이 된 재판의 파기환송심과 재상고심은 거의 예외 없이 장기화됐다.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의 경우 대법원 파기환송심부터 재상고심 최종 판결까지 무려 1300일이나 걸렸다. 이호진 전 태광산업 회장은 808일,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은 744일이었다. 이재용 부회장은 얼마나 걸릴까.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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