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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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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제된 다수 위해 “세상과 직접교섭”

노동단체 ‘권리찾기유니온 권유하다’ 세운 한상균 전 민주노총 위원장 인터뷰
등록 2019-12-02 02:07 수정 2020-05-07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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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투쟁하는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저임금 미조직 노동자가 소수가 아닌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야 할 다수임을 자각하는 새해가 되길 소망해본다. 그 길에 남은 인생을 바치리라고 하얀 벽을 증인 세우고 다짐하며 새해 첫날을 맞는다.”

2018년 1월1일. 경기도 화성교도소 독방에서 한상균(사진)은 골판지로 만든 작은 책상 위에서 이렇게 편지를 써내려갔다. 그는 민주노총 첫 직선제 위원장으로서, 2015년 박근혜 정권에 대항하는 민중 총궐기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수감됐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로 2009년 옥쇄파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구속된 이후 두 번째 옥살이였다.

광장을 메운 촛불로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됐지만, 그 장면을 직접 보진 못했다. 그는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광장의 감동은 느끼지 못했어도 담장 밖 세상은 경이롭게 느껴진 시간이었다. 이 순간부터 노동자를 가둔 감옥은 더 이상 감옥이 아닌 거라 생각했다.”

소외된 다수에게 손 내밀다

민주노총 위원장 3년 임기 가운데 뒤 2년을 감옥에서 보낸 한상균은 지난해 5월21일 가석방으로 교도소를 나왔다. 구속된 지 2년 반이었다. 출소 뒤 1년6개월이 지난 지금, 그는 ‘하얀 벽을 증인 세워’ 했던 다짐을 실행에 옮기고 있다. 근로기준법 일부 조항 적용이 배제되는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를 비롯해, 임시직프리랜서·플랫폼노동자·특수고용노동자 등 ‘일하는 사람 누구나’의 ‘권리 찾기’를 내세운 노동단체 ‘권리찾기유니온 권유하다’를 10월9일 노동·사회단체, 법률가 등과 함께 만들어 대표를 맡고 있다. 민주노총 위원장이라는 조직된 노동운동의 최정점에 있던 그가 민주노총 밖에서 미조직 노동자 권리 찾기 운동에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세상과 직접교섭”을 내세운 ‘권유하다’가 노동자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까. 11월26일 서울 당산동 권유하다 사무실에서 한 대표를 만나 들어봤다.

2018년 새해를 맞아 ‘하얀 벽을 증인 세워’ 비정규직·저임금 미조직 노동자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다짐을 적은 편지가 세상에 알려져 많은 주목을 받았다. 수감 시절에 어떻게 살았는지 말해달라.

수감 생활 내내 독방에만 있어서 누구랑 어울려 살 수가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 종교 행사 때 사람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젊은 친구들과 얘기하다보면, 자기는 경쟁에 뒤처져서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는 걸 당연하게 느끼는 듯했다. 저들에게 희망을 못 만드는 운동이 과연 희망이 있을까 생각했다. 구속되기 전 1년 동안 민주노총 위원장을 하면서 절대다수의 노동자가 저임금·비정규직 노동자로 불안정한 노동에 내몰리는 것을 실감 나게 봤다. 나의 투쟁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노동자 전체를 보면 저들과 한편이 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감옥이 단절된 곳이긴 하지만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장소기도 하다. 감옥에서 생각을 굳혔다. 비정규직 노동자, 저임금 미조직 노동자 운동에 헌신하기로.

수감 생활 영치금을 ‘권유하다’ 창립 비용으로 쓴 거로 전해졌다.
감옥 생활 하면서, 아내가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아이들을 키우는 것에 미안함이 있었다. 출소해서 보니, 아내가 “당신은 노동운동을 가슴으로 한 것이냐”고 물어보며, “희망을 만드는 데 써야지 영치금을 잘 먹고 잘 살려고 쓸 수 있겠느냐”고 말하더라. 아내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노동자 동지로 바뀌어 있었다. 아내에게 고마웠다.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민주노총 밖에서 운동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민주노총이 미조직 노동자들을 위해 열심히 한다고 생각하고, 그 덕분에 제1노총에 당당히 설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런데 기본 인권인 노동권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어림잡아 1천만 명은 될 것이다. 임시직, 5인 미만 영세사업장, 특수고용노동자, 플랫폼노동자, 프리랜서 등 이들의 문제를 좀더 당사자 중심으로 모아낼 수 있는 구조와 경로, 새로운 시도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조직된 노동조합이 근로기준법 전면 적용을 1순위로 걸고 정치파업에 나설 수 있을까? 나는 어렵다고 본다. 지금도 준비하면 3~5년이 걸리든 할 수는 있겠지만, 이들의 삶을 방치하는 것이 나는 용납이 안 되더라. 완벽한 방법은 아니지만 첫발이라도 떼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권유하다는 일종의 노동 플랫폼이다. ‘유니온크래프트’라는 홈페이지(www.unioncraft.kr)를 만들어, 노동관계법 콘텐츠를 제공하고, 직종별 노동 상담은 물론 이들이 모여 소통할 수 있는 ‘대화방’과 행동할 수 있는 ‘운동장’도 만들 계획이다. 홈페이지는 내년 정식 개통을 목표로 한다. 이 플랫폼을 통해 “주장과 가치에 동의하는” 노동자를 모으고, 이들의 힘으로 “세상과 직접교섭”을 주장할 계획이다. 조직에 가입하는 운동이 아니라, 주장에 가입하는 운동을 만들어나가겠다는 취지다. 이 밖에도 5인 미만 사업장 실태조사와 가짜 5인 미만 사업장 고발, 근로계약서 서면 교부 운동 등을 ‘특별사업’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세상과 직접교섭’이라는 말이 눈에 들어온다.
중요한 것은 당사자들의 직접행동이다. 당사자가 직접 나서지 않으면 비정규직, 죽음의 외주화, 저임금 불안정노동 구조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직접행동의 장은 광장이 될 수도 있고,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이 될 수도 있다. 프랑스의 노란 조끼 운동을 비롯해 홍콩·아르헨티나·칠레까지 급진적이고 직접적인 행동이 벌어지고 있다. 또한 각국에서는 조직된 노동자 운동이 한계를 보이기도 한다. 문턱이 낮고 접근이 쉬운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모아 행동으로 나아갈 것이다.

조직 아닌 주장에 가입하는 운동

5인 미만 사업장의 노동조건 개선을 첫 사업으로 삼았는데.
내가 위장취업을 하려고 열 군데를 다녔는데 금방 신분이 노출돼서 쫓겨났다. 모자를 푹 눌러써도 알아보더라. (웃음) 5인 미만 사업장은 근속연수가 짧고, 대체로 사장이랑 협상해서 자신이 불이익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아니면 그냥 불이익을 감수하는 경우도 숱하다. 기본적인 근로기준법의 권리 보장이 안 되기 때문에 열악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는 8명을 사용하면서, 4+4로 사업장을 쪼개 근로기준법 적용을 회피하려는 시도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짜장면집 사장님이랑 싸우자는 것은 아니다. 5인 미만 사업장 문제는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 임대료, 재벌의 착취 구조 등이 모두 연동돼 있다. 각각 따로 다른 그림으로 보면 문제를 해결하기 쉽지 않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사용자들에게 자기 사업장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근본 문제라는 것에 동의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

민주노총 같은 조직의 노동운동은 무엇을 해야 하나.
조직 노동자들이 미조직 노동자를 위해 연대해야 하고, 지금까지 해왔던 것보다 더 적극적으로 자기 주머니를 털어 연대기금을 마련해야 한다. 유능한 청년 활동가들이 미조직 무권리 노동자를 위해서 활동해야 하는데, 그럴 돈이 없다. 권유하다도 공식 후원 노조 제도를 운영해서 노조로부터 정기후원을 받고 있다. 또한 노동자들이 (기업별·산별 노조가 아닌) 민주노총에 개별·직접 가입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는 민주노총 지도부의 결단이 필요하다. 노동자들이 모여야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는 직접가입을 통해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그리고 권리를 빼앗긴 1천만 노동자가 한국 사회에서 2등 국민으로 살아가야 한다면 민주공화국이 맞는가? 이들을 노동조합으로 단결시키는 일은 한국 사회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숙제다. ‘권유하다’는 요구를 넘어 행동에 나서고 있다.

‘87년 세대’의 반성문

조직에 헌신하는 탁월한 조직가라는 평가를 받아온 한 대표지만, 그는 권유하다 활동이 그동안의 노동운동에 대한 ‘반성문’이라는 말을 여러 번 했다. 노조운동이 주목하지 못했던 ‘배제된 무권리 노동자’를 위한 활동으로 그동안의 운동을 반성하겠다는 취지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계’가 대기업·정규직 위주라는 세상의 비판과도 맞닿아 있다.

“87년 세대로서 책임감을 많이 느끼고 있고, 우리 실력을 돌아보고 배양해야 한다. 내가 쓰고 있는 반성문이 누군가에게 체념을 깰 수 있는 따뜻한 손이 됐으면 좋겠다. 일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최소한의 존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세상을 꿈꾸고 있다. 그런 꿈을 먹고 살고 있기 때문에 행복하다. 이 나라 그 어떤 노동자보다 행복하다.”


5인 미만 사업장 실태


근로기준법 전면 적용 안 되는 ‘2등 노동자’?


2019년 8월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를 보면, 전체 임금노동자 2055만9천 명 가운데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는 378만4천 명으로 18.4%에 해당한다.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는 해고의 제한, 노동시간 한도 제한, 연장·휴일근로수당 지급, 연차휴가 등 근로기준법상 권리를 보장받을 수 없다. 현재 적용 제외 규정은 1998년 입법된 것으로 20년째 지속됐고, 위헌 논란이 있었으나 헌법재판소는 “영세사업장의 지불 능력 부족” 등을 이유로 합헌이라고 판단했다.
이 때문에 근로기준법의 일부 조항이 적용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노동관계법도 제대로 준수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참여연대가 10월7일 정보공개청구 자료를 분석해 낸 ‘임금체불 보고서’를 보면 2018년 임금체불 피해자의 41.6%가 5인 미만 사업장에서 나왔다. 2018년 기준 산업재해율도 전체(0.54%)의 두 배 남짓인 1.07%로 나타났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권유하다 후원 문의: 070-4634-1917
후원계좌: 우리은행 1005-803-730411(예금주: 권리찾기유니온 권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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