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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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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베이어벨트와 함께 멈춘 엄마의 시간

아들 죽음 뒤 1년간 부르는 어디든 달려간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
등록 2019-11-30 05:54 수정 2020-05-02 19:29
변지민 기자

변지민 기자

2018년 12월10일, 24살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가 숨졌다. 그는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석탄 이송용 컨베이어벨트의 상태를 점검하다 벨트와 롤러 사이에 끼여 사망했다.

그날 김씨의 어머니 김미숙(49)씨 삶이 바뀌었다. 전태일의 사망이 이소선의 삶을 바꾼 것처럼, 황유미의 사망이 황상기의 삶을 바꾼 것처럼.

마음 추스를 새 없이 언론 앞에 선 엄마

11월25일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을 만났다. 그는 김용균씨 사망 1주기를 앞두고 서울 광화문광장에 마련된 김용균 분향소에 있었다(사진). 사고 뒤 경북 구미에서 서울로 이사 온 김 이사장은 일정이 없을 때마다 분향소와 김용균재단 사무실(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에 머무른다.

김 이사장의 지난 1년은 산을 넘고 또 넘는 시간이었다. 아들의 사망 직후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는 언론 앞에 섰다. 김 이사장의 용기로 김용균씨 사고는 개인의 죽음을 넘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위험의 외주화’를 상징하는 비정규직의 산업재해로 다시 정의됐다. 노동조합과 시민단체 등 90여 개 단체가 연합해 고 김용균 시민대책위원회를 꾸렸다. 그 힘으로 산업안전보건법 전부개정안, 일명 ‘김용균법’이 국회를 통과할 수 있었다.

김용균법 덕분에 산재보험 적용 범위가 확대돼 특수고용노동자 등 사각지대에 있던 수많은 비정규직이 법의 테두리 안에 들어왔다. 김용균법은 유해물질을 다루거나 위험성 높은 작업은 원칙적으로 도급(하청)을 금지했고 원청의 산재 예방 책임을 강화했다. 다만 하위 법령(시행령)에서 도급 제한 업종 범위를 너무 좁게 정해 정작 김용균씨가 일했던 업종이 빠지는 등 아직 갈 길이 멀다.

김미숙 이사장은 정부와 집권여당의 행동도 이끌어냈다. 당정은 김용균 사고 재발을 막기 위한 대책을 발표했고, 그 결과 특별노동안전조사위원회(이하 특조위)가 꾸려졌다. 특조위는 김용균 사고의 진상을 철저히 조사했고, 원청(한국서부발전)이 비용 절감을 위해 하청(한국발전기술)에 위험 업무를 맡기고 책임지지 않은 구조가 하청 직원인 김용균씨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특조위는 ‘위험의 외주화’를 근절하기 위한 22개 권고안을 발표했지만, 정부와 기업은 아직 권고안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 이 또한 여전히 갈 길이 멀다.

그사이 김 이사장은 산재 피해자, 사회적 참사 유가족과 연대했다. 지금도 산재 위험 속에 일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거리에서 마이크를 잡고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도입”을 외쳤다. 수많은 언론매체와 인터뷰했고 각종 단체에서 상을 받았다. 산재 피해자와 유가족 지원, 위험의 외주화 근절, 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단체인 ‘사단법인 김용균재단’도 만들었다.

“어머님의 지난 1년을 정리해 기사로 쓰고 싶습니다.” 기자가 말했다. 김미숙 이사장은 별다른 말 없이 분향소 옆 텐트로 기자를 들였다. 광화문광장의 분향소와 텐트는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발전비정규직연대회의가 11월11일 서울시 관계자들의 제지를 뚫고 세웠다. 현재 고 김용균씨 발전소 동료 등 발전비정규직연대회의 활동가들이 텐트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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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참한 죽음이 순간순간 생각나”

김미숙 이사장에게 물었다. 지난 1년간 있었던 수많은 일 중, 기억에 남는 순간을 몇 가지만 이야기해달라고. 김용균법 국회 통과, 대통령과의 만남, 특조위 구성, 진상조사 결과 발표, 김용균재단 출범 등 몇 가지 극적인 순간을 언급했다. 김 이사장 본인이 어디에 의미를 부여하는지 궁금했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들의) 처참한 죽음이 순간순간 생각날 때.” 그 어떤 사회적 변화도 아들의 죽음이라는 큰 사건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김 이사장의 시계는 2018년 12월10일에 멈춰 있었다. 그에게 사회적 활동은 아들의 한을 풀고 자신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기 위한 방편이었다.

“애는 그렇게 처참하게 유린당했는데, 내가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건가, 목숨 붙이고 밥 먹고 잠자고 살아도 되는 건가, 정말 혼란이 많이 와요. 그게 제일 힘든 것 같아요. 유가족들은 사고 당시에 머물러서 빠져나오지를 못해요. 거기에 멈춰 있어요. 이 아픔이 쉽게 완화되거나 하지 않아요.”

김 이사장은 지난 1년간 가장 많이 쓴 말이 “억울한”이라는 표현이라고 했다. 그만큼 억울한 감정이 가슴 가득 쌓여 있어서다. 김용균씨가 사고를 당했을 때 회사는 그 원인을 김용균씨의 부주의 탓으로 돌렸다. 한국서부발전의 안전품질실 간부직원은 “벨트가 있는 기계 안쪽으로 고개를 넣고 점검하지 않아도 된다. 매뉴얼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며 김용균씨가 무리하게 행동한 탓에 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특조위 진상조사 결과 김용균씨가 점검 전 컨베이어벨트를 정지시킬 권한도 없었고, 어두운 조명 때문에 기계 안쪽으로 고개를 넣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특조위 보고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구조적으로 가장 취약한 지위에 있는 협력사 노동자에게 ‘운전 중 작업의 위험’을 고스란히 감당하도록 만들어놓고 사고가 발생하면 그 책임을 작업자의 부주의로 돌리는 작업자 과실론은 안전사고의 책임과 비용을 노동자에게 전가하기 위한 가장 쉬운 장치일 수는 있으나 안전사고의 재발 방지를 가로막는 결정적인 원인임을 인식해야 한다.”

김 이사장의 억울함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2018년 12월27일 산업안전보건법 전부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을 때 세상은 떠들썩했지만, 곧 ‘김용균 없는 김용균법’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 2월18일 청와대에서 김 이사장을 만났을 때 한 약속(“공공기관 평가 때도 생명과 안전이 제1의 평가 기준이 되도록 하겠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도 속도를 내겠다”)도 지지부진하다. 이낙연 국무총리가 8월20일 특조위의 권고안에 따른 정책을 마련하라고 정부 부처에 내린 지시도 여태껏 실현되지 않았다. 정치인들의 약속은 실망으로 돌아왔다.

특조위 권고안도 ‘조국 사태’에 묻혀

“처음부터 절대로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김 이사장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집회에서 마이크를 잡을 때든 인터뷰할 때든 목소리를 높이고 흥분하는 법이 별로 없다. 말을 해야 울분이 풀리는데, 울고 화를 내면 머리가 하얘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슬픈 눈으로 차분히 할 말을 고른다. “반올림의 황상기님, 김시녀님이 처음부터 삼성을 이길 거라고 생각하고 싸웠어요? 되든 안 되든 끝까지 가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싸워서 그만큼 일궈낸 거 아니에요. 저도 같은 입장이에요.”

김 이사장의 바람은 특조위 22개 권고안에 모두 들어 있다. 연료·환경설비 운전과 경상정비 노동자 직접고용 정규직화, 안전보건 관련 집단적 노사관계 개선,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 마련, 노동자 안전보건 활동을 위한 참여권 보장 등이다.

김 이사장은 지난 1월 인터뷰에서 “(아들을 잃은) 고통을 제 선에서 끝내고 싶습니다”라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가진 걸 다 잃었잖아요. 애 하나가 전부였는데, 그걸 잃었으니 두려울 것 없습니다. 앞으로 무엇을 한들 기쁘지도 않을 겁니다. 저를 위해 산다는 것보다 이 사람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야 되겠기에 나섰습니다.”

그런 그에게 최근 ‘조국 사태’는 힘든 시기였다. 특조위 권고안이 발표된 8월19일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후보자로 지명되고 각종 의혹이 쏟아지던 시기다. 그 무렵부터 두 달간 사람들의 눈과 귀는 온통 조국을 향해 있었다. “(조국 사태가) 너무 모든 걸 집어삼켜서…, (특조위 권고안을 알리고 정부에 이행을 촉구하는 일이) 망했어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다 묻히고. 같이 노력했던 분들이 언론에 기고도 했지만 안 되더라고요.”

하지만 슬럼프에 빠질 겨를은 없었다. 10월26일 김용균재단 출범을 앞두고 북콘서트(‘김용균이라는 빛’), 낭독노래극(‘기다림’), 각종 간담회를 돌며 김용균재단 후원자를 700여 명 모았다. “사람을 기리기 위한 재단이었으면 이렇게 안 모였을 거예요. 이 재단은 싸우기 위해 만든 조직이에요. (아들의 사고 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잖아요. 매년 2400명씩 산재로 죽고 있고요.”

여전히 매년 2400명씩 산재로 죽는데

기자와 만난 날 김 이사장은 한국도로공사 톨게이트(요금소) 수납원들이 청와대 앞에서 직접고용을 요구하는 자리에 함께했다. 다음날 아침엔 라이더유니온이 배달기사의 산재 피해를 알리는 자리에 함께하며 연대 발언했다. 잠시 같이 있는 동안 그에겐 끊임없이 ‘함께해달라’는 연락이 왔다. 그는 일정이 없으면 최대한 가려고 했다. 김용균재단과 김미숙 이사장이 연대하는 대상은 비정규직 노조, 산재 피해자, 사회적 참사 유가족, 이주노동자 유가족 등 가장 어렵고 힘든 곳으로 향해 있다.

김용균재단이 주축인 ‘고 김용균 1주기 추모위원회’는 12월2일부터 10일까지 매일 저녁 광화문광장 분향소에서 추모 문화제를 열 계획이다. 12월7일 서울 종각역 사거리에서 추도대회와 촛불행진을 진행한다.

변지민 기자 d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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