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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처장 바뀌니 변심?

박삼득 보훈처장 부임 뒤 보훈단체 개혁 기조 ‘미적’
등록 2019-11-27 00:46 수정 2020-05-02 19:29
8월19일 임명장을 받고 문재인 대통령과 기념사진을 찍는 박삼득 국가보훈처장. 청와대사진기자단

8월19일 임명장을 받고 문재인 대통령과 기념사진을 찍는 박삼득 국가보훈처장. 청와대사진기자단

박삼득 국가보훈처장이 지난 8월 부임한 지 석 달이 지났다. 평가가 엇갈린다.

보훈처의 한 간부는 “취임 뒤 지은희 보훈정책자문위원장을 만나 ‘전임 피우진 처장의 개혁 기조를 중단 없이 이어간다’는 뜻을 전달했다”고 말했다. 전임 피 처장 체제와 크게 달라진 것도 달라질 것도 없다는 말이다. 박 처장 스스로도 “문재인 정부의 국가보훈처장”임을 거듭 강조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박 처장이 개혁보다는 현상 유지를 선택했다”는 소리도 나온다. 보훈단체 개혁에 나섰던 한 인사는 “박 처장의 성품이 차분하고 합리적”이라고 호평하면서도 “문재인 정부에서 임명한 사람인데, 피아 구분을 못한다”고 비판했다. “보훈단체 개혁을 하려면 전쟁이 불가피한데, 좋은 게 좋은 쪽으로 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피우진 전 처장, 보훈단체 개혁 밑돌 놨지만…

예비역 3성 장군 출신인 박 처장 체제 등장은 그 자체로 ‘과거 회귀’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여성이면서 예비역 중령 출신인 전임 피 처장 발탁의 상징성을 문재인 정부가 스스로 포기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이 때문에 광복회 등 독립운동가단체들이 박 처장 임명을 앞두고 내정 철회를 강력히 요구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들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달한 요청서에서 “또다시 군사정권 시대처럼 군 출신 인사를 국가보훈처장에 임명한다면, 박승춘 전 처장 때와 같은 군 중심의 보훈정책 시대로 돌아갈 것”이라고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박 처장 체제의 의지를 가늠할 수 있는 가장 민감한 리트머스시험지는 ‘보훈단체 개혁’ 여부다. 전임 피 처장이 보훈단체 개혁에 나서면서 상이군경회 등과 파열음을 빚었고, 그렇게 지난한 개혁이 이뤄지던 와중에 최전방 장수가 바뀌어버린 격이기 때문이다.

피 전 처장이 밑돌을 놓은 보훈단체 개혁의 방향은 분명했다. 존경받는 보훈단체로 환골탈태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불법적인 명의 대여 방식으로 벌이는 상이군경회 등의 막대한 수익사업에 칼을 들이댔다. 수익사업의 과실을 회장 1인과 일부 운영진, 사업자들이 누리는 폐단을 청산하자고 밀어붙였다. 피 전 처장은 지난 4월 김덕남 상이군경회 회장 등이 참석한 정기총회에서 “보훈단체의 불법적 수익사업에 단호히 대처하겠다”는 메시지를 결연한 육성으로 전달했다. 실제 올 상반기에는 상이군경회 인천폐기물사업소의 사업 등에 승인 취소 처분을 내렸다. 보훈단체 표준정관안을 만들어 수익사업 이익금의 50% 이상을 회원 복지에 쓰도록 하는 등 실질적인 제도 정비 작업도 준비했다.

“피 전 처장은 취임 1년이 지난 2018년 5월에 국민 중심 보훈혁신위를 꾸리고 그해 말 혁신위 권고안이 나온 뒤인 올해 초부터 본격적인 개혁에 들어갔다. 무엇보다 상이군경회와 재향군인회 등의 보훈단체들을 개혁하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 연 1천억원대의 수익사업을 벌이는 상이군경회와 심각한 갈등이 벌어졌다.”(보훈처 간부)

대한민국상이군경회 등이 입주한 서울 여의도의 중앙보훈회관. 류우종 기자

대한민국상이군경회 등이 입주한 서울 여의도의 중앙보훈회관. 류우종 기자

박 처장, ‘불법 수익 의혹’ 보훈단체와 환담

박 처장이나 주변에서 보훈단체 개혁의 방향을 바꾸거나 후퇴한다는 신호가 나온 것은 아니다.

다만 상이군경회와의 대치 전선이 풀리는 등 곳곳에서 변화의 징후가 감지되고 있다. 박 처장은 부임하자마자 상이군경회를 찾아 김덕남 회장과 환담을 나눴다. 전쟁을 불사하던 전임 처장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였다. 상이군경회 주변에서는 “광복회 등의 박 처장 임명 반대에 맞서 상이군경회가 임명 지지 성명을 냈고, 박 처장이 그 감사의 뜻으로 상이군경회를 배려한 것”이라는 자화자찬식 해석이 흘러나왔다. 지방보훈병원 장례식장 사업의 보훈복지공단 직영화 방침을 철회하고 상이군경회가 계속 사업권을 갖기로 했다는 소문도 이어졌다.

국가보훈처장의 발언 또한 보훈단체에 우호적인 톤으로 확 바뀌었다. 박 처장은 최근 한 언론사에 ‘어떤 보훈단체장의 침묵’이란 제목으로 글을 쓰는가 하면, 다른 언론사 인터뷰에서는 “‘호국 홀대’란 말이 나오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보훈단체 개혁을 기대한다는 한 전문가는 “정확히 말하면 이전 보훈처가 갈등을 빚었던 대상은 보훈단체가 아니라 불법성 사업으로 검은돈을 축재한 보훈단체 수뇌부였던 것”이라며 “보훈단체 혁신 기조를 이어가겠다면 잘못된 시그널을 보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과거 박승춘 처장 때 보훈정책이 호국 중심이었다면, 피 처장 때는 독립-호국-민주 3자가 균형을 맞추도록 정책을 추진했다”며 “‘호국 홀대’란 말은 자칫 그 이전 과거로 돌아가자는 뜻으로 잘못 읽힐 수 있다”고 말했다.

보훈정책자문위원회에 박 처장이 충분한 힘을 실어주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보훈정책자문위는 피 처장 체제에서 보훈단체 개혁의 틀을 잡고 개혁 이행을 점검해온 강력한 자문기구였다. 후임인 박 처장이 힘을 실어주면 앞으로도 개혁의 키를 단단히 쥘 수 있고, 그러지 않으면 존재 이유가 사라지는 그야말로 처장의, 처장을 위한 자문기구다.

한 위원은 “부임 넉 달이 되도록 박 처장이 위원회에 참석한 적이 없을뿐더러 처장의 의지가 어떤지도 알지 못하는 애매한 상황”이라며 “박 처장 스스로 전임자의 개혁정책 연장선상에 있다고 한다니 우리 위원들은 아직 믿음을 갖고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다른 위원은 “상이군경회 등과 그전처럼 각을 세우지는 않더라도 개혁 기조는 이어가야 할 텐데, 서로 잡음 없이 잘 지내려고만 하는 것 같아 개혁을 하기는 하는 건지 안타까운 마음이 있다”고 걱정했다.

적폐 청산 맡은 인사, 보직 없이 발령도

최근엔 검찰 조사 중이라는 이유로 국회 출석을 거부한 보훈처 간부 직원을 보직 없이 본부로 발령 내는 일도 있었다. 이 간부는 피 처장 당시 적폐 청산 인사를 집행하는 보직을 맡았고, 이로 인해 자유한국당과 보수언론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이에 대해 보훈처 쪽에서는 “그 간부의 국회 출석 거부가 부적절한 행동인지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으며, 따라서 징계성 인사를 낸 것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김대원 보훈처 대변인은 “전임 처장이 구축한 보훈단체 개혁 프로세스를 지금도 변함없이 진행하고 있으며, 처장과 위원회의 전체 식사 자리도 연내에 마련할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김현대 선임기자 koala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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