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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지금도 ‘확인 중’

한베평화재단 ‘미안해요 베트남’ 20주년 아카이브 기록전 ‘확인 중…’ 11월4일 개최

베트남전 희생자 기억 담은 기록과 물품 전시
등록 2019-10-24 01:06 수정 2020-05-02 19:29
8개의 베트남 신분증 사진. 김진수 기자

8개의 베트남 신분증 사진. 김진수 기자

1999년 한국에서는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 민간인 학살 문제가 쟁점으로 떠올랐습니다. 제256호 기사 ‘아 몸서리쳐지는 한국군!’ 첫 보도 이후 46주 동안 ‘베트남전 양민학살, 그 악몽 청산을 위한 성금 모금 캠페인’ 후속 보도가 이어졌습니다. 2000년 제주인권학술회의에서 구수정 한베(한국·베트남)평화재단 상임이사는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이 80여 차례, 희생자는 9천여 명에 이른다고 밝혔습니다. 39개월 만에 에 모금된 성금 1억5천여만원을 종잣돈 삼아 2003년 베트남 푸옌성 뚜이호아에 한베평화공원이 만들어졌습니다.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뒤늦게 알게 된 한국인들은 베트남에 직접 갔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위령비를 보며 책에는 나오지 않던 전쟁범죄와 학살의 역사를 배웠습니다. 2015년 살아남은 베트남의 민간인 학살 희생자들이 한국에 직접 와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Tôi muốn sự thật.”(나는 진실을 원합니다.)
한국과 베트남 과거사 해결을 위한 시민단체가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을 시작한 지 20년이 됐습니다. 한베평화재단의 ‘미안해요 베트남’ 20주년 기념 아카이브 기록전 ‘확인 중…’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예고편을 공개합니다. 아카이브 기록전을 기획한 서해성 감독이 평화우체국에 부치는 편지 형식으로 전시물 2점을 미리 소개합니다. 편지를 받은 독자가 혼자 읽고, 또 함께 읽어달라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일곱 번째 편지는 8개의 신분증, 여덟 번째 편지는 참전 군인이 한국에 있는 아내에게 부친 편지 356통, 마지막 편지는 아카이브 기록전 초대장입니다.
베트남전쟁을 겪은 이들이 남긴 소소한 기록과 물건은 11월4일부터 21일까지 서울 성동구 성동문화회관 1층 소월아트홀에서 볼 수 있습니다. 폐회 전날인 11월20일 오후 3시에는 한국·베트남·미국 참전 군인 세 명이 한자리에서 만납니다.
조윤영 기자 jyy@hani.co.kr
7. 신분증 여덟 개, 8가지 이야기

여덟 개의 베트남 신분증이 있다. 이 신분증들을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 판히에우, 응우옌중, 쩐티느, 응우옌티제, 박티럽, 응우옌티껀, 쩐꾸에, 쩐티비에우의 신분증이다. 한국 주민등록증의 원조 격인 베트남 신분증이다.

판히에우, 응우옌중, 쩐티느는 지엔니엔이라는 한마을 사람이다. 나머지 다섯은 다 사는 곳이 다르다. 차례대로 띤토, 하떠이, 퐁니, 동한, 껌안 사람들이다. 지엔니엔·띤토·하떠이는 꽝응아이성 지역, 퐁니·동한·껌안은 꽝남성 지역이다. 거의 처음 들어보고 발음하기도 쉽지 않겠지만 이 지명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이곳에 한국군이 주둔했거나 어느 날 진주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한국과 두 번째 관련성이다.

여덟 개 신분증은 저마다 사연이 다르지만 신분증 주인들이 총에 맞거나 칼에 찔려서 생을 다했다는 점에서는 같다.

껌안마을 쩐티비에우는 여섯 살 아들과 함께 총에 맞았다. 전쟁 뒤 무덤을 옮기는 과정에서 신분증은 세상 밖으로 나왔다.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묻은 무덤을 열었을 때 신원을 확인하는 건 불가능했다. 쩐티비에우는 저승 가는 길에 넣어두었던 신분증이 여전히 주머니에 남아 있었다. 축축한 나라인 베트남 꽝남성 껌안에서 신분증은 거의 썩지 않은 상태였다. 다만 사진만 말짱 증발하고 없었다. 혼령이 혹 다른 데로 가기라도 한 것일까.

동한마을 노인 쩐꾸에는 학교 뒤에서 동맹국 군인이 쏜 총에 맞아 죽었다. 신분증은 이웃 주민이 길에서 주웠다. 노인은 저승 가는 걸 알려주기 위해 신분증을 떨어뜨렸던 게 분명했다. 이 신분증은 가난한 쩐꾸에가 남긴 유일한 유품이다.

띤토마을 여인 응우옌티제의 아들 쩐민은 총소리가 들리자 들에서 소를 몰고 있다가 산으로 몸을 피했고 남편도 산으로 달아났다. 응우옌티제(46), 시아버지 쩐엇(76), 시어머니 보티씩(74), 어린 딸 쩐티투이(4)는 버짜이 논으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그들은 익은 벼 사이로 쓰러졌다. 산에서 내려온 부자는 불에 타버린 집에 갔다가 침상 자리에서 응우옌티제의 신분증 조각을 발견했다. 다른 살림살이는 다 불에 타버렸는데 신분증에서 사진 부분은 온전히 남아 있었다.

지엔니엔마을 판히에우는 그날 아들 깐, 며느리 응우옌티에우, 손녀 티하인, 세 딸 쑤언·투언·푸, 쑤언이 낳은 아이까지 일곱을 잃었다. 키 작은 여든한 살 노인 판히에우는 손자 반득을 홀로 키우다 세상을 떠났고 신분증은 그가 남긴 유일한 공적 증거물이다.

지엔니엔마을 응우옌중은 누이키(원숭이 산)에서 살해됐다. 아내는 이듬해 유복자를 낳았고 세상을 떠나면서 남편과 이름이 같으나 성조가 다른 아들 응우옌중에게 집 안 제단 앞에 있는 신분증 관리를 부탁했다. 그 신분증은 영정이자 유산이자 학살을 기억하는 증거물이었다.

지엔니엔마을 여인 쩐티느는 마을 사당 뒤편에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사살됐다. 늘 몸에 지니고 다니던 귀걸이는 찾을 수 없었으나 신분증은 주머니 속에 들어 있었다. 열다섯 살 외동딸 응우옌티즈엉은 피란길에도 어머니 신분증을 가지고 다녔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늘 제단에 올려놓고 자식들이 보게 했다.

퐁니마을 여인 응우옌티껀은 켜켜이 쌓인 주검 더미에서 발견됐다. 대검으로 배를 찔리고 총에 맞은 상태였다. 아내의 신분증은 남편 주머니에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글씨는 흐려지고 사진만 남았다.

하떠이마을 노파 박티럽은 전략촌으로 피란을 갔다가 다리가 아파서 집에 머물러 있는 아들을 돌보려 다시 돌아왔다. 아들은 강가에서 미군 총에 맞아 다리를 절어서 멀리 갈 수 없었다. 모자는 그날 살해됐다. 두 사람은 관이 없어서 동네 사람들이 거적에 말아 산에 묻었고 신분증이 남았다.

신분증을 품고 죽었다고 해서 이들의 죽음을 기억하는 이는 베트남에도, 한국에도 거의 없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식구들을 빼면.

베트남 신분증 내용을 뜯어보면 또 다른 점에서 한국과 연관을 추론할 수 있다. 이 신분증들에는 여느 나라에서 그렇듯 사진이 붙어 있고, 뒷면에는 양쪽 집게손가락 지문이 찍혀 있다. 베트남이 언제부터 시각적 유전자 정보인 얼굴 사진과 함께 또 다른 고유 유전자 정보인 지문을 신분증에 등록하게 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한국보다 먼저 시작한 것만은 분명하다.

한국은 1968년 북한군 특수부대 청와대 습격 사건 뒤 국민 모두(18살 이상)에게 번호를 부여하고 신분증을 발급했다. 주민등록증 1호는 대통령 박정희였고 주민등록번호는 110101-100001이었다. 부인 육영수는 110101-200002였다. 번호 앞자리가 발급 지역, 뒷자리는 남녀 구분과 일련번호였다.

열세 자리 숫자로 내용이 강화된 건 1975년이었다. 앞자리는 생년월일, 뒷자리는 성별과 출생 지역을 조합했다. 앞면에는 사진, 병역 여부, 뒷면에는 오른쪽 엄지 지문이 들어갔다. 개인정보를 신분증 한 장으로 상당 부분 확인할 수 있도록 한 셈이다. 경찰관이 요구하면 제시 의무까지 져야 하는 강제규정을 덧붙였다. 국민 개개인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한 실질적 장치였다. 한국 주민등록증은 개인정보를 국가가 관리하고 사용하는 측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강력한 신분증이다.

북한에서 특수부대를 서울로 침투시킨 1968년은 베트남에서는 ‘뗏 공세’라고 하는 구정(음력설) 공세가 전개된 해다. 이는 세계를 격동시킨 68혁명의 도화선이었다. 그해 늦가을 한국은 베트남 것과 흡사한 국민 통제형 신분증 제도를 도입했고, 베트남 공화국이 패망한 직후에 그 제도로 국민을 더욱 옥죄었다. 한국 주민등록증은 베트남 신분증에서 영향받았고 그 나라의 정세와 밀접한 관련 속에 움직였던 것이다.

여덟 개 신분증 주인들은 죽어서야 비로소 신분증이 지닌 감시와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신분증 덕분에 다시 공적 영역으로 소환될 수 있었다. 모든 학살 피해자는 얼굴도 이름도 없지만, 이들은 신분증이 있어서 신원을 명확히 할 수 있었다. 그 신분증을 자기 영정처럼 품고 죽은 이들이 오늘 산 자들 앞에 신분증을 제시하고 있다. 나는 학살되었노라고.

베트남전쟁 때 한국에 있던 아내에게 편지 356통을 부친 참전 군인 정영환(맨 오른쪽). 한베평화재단 제공

베트남전쟁 때 한국에 있던 아내에게 편지 356통을 부친 참전 군인 정영환(맨 오른쪽). 한베평화재단 제공

8. 357번째 편지

사내는 여인에게 편지 356통을 부쳤다. 여인은 한국에 살고 있었고 사내는 월남에 있었다. 1968년이었고, 또 1969년이었다.

사내가 월남 나트랑(냐짱)에 상륙한 건 1968년 3월26일이었다. 그가 귀국선에 올라 월남을 떠난 건 1969년 8월 말이었다. 그는 500일 넘는 시간 동안 356통 편지를 쓰고 부쳤다.

사내는 편지를 보낼 때마다 귀퉁이에 번호를 써넣었다. 때로 편지는 한꺼번에 5통이 가기도 했다. 군사우편이었다. 사내는 월남에 있는 군인이었다. 때로 그는 바나나 이파리에 편지를 썼다. 한국에 사는 여인 또한 사내와 비슷한 수만큼 편지를 보냈다.

사내는 홍천 사람이었다. 그도 월남에 가는 여느 청년들처럼 강원도 산골 화천군 오음리에서 파병 훈련을 받고 그해 봄날 3월 미군 수송선을 탔다. 한 해 전 그는 혼인했다. 편지 수신인은 새색시인 아내였다.

사내 이름은 정영환이고 아내 이름은 유재순이다. 남편은 정글에서 전쟁 중이었고 아내는 기다림으로 전쟁 중이었다. 전쟁과 전쟁을 잇는 건 군사우편 편지지에 볼펜으로 눌러쓴 편지들이었다.

356통 편지는 살아 있다는 신호이자 기다리고 있다는 전갈이었고, 죽지 않고 만나자는 약속이었다. 긴 이별을 강요하는 전쟁은 편지가 있어 비로소 짐짓 인간 모습을 할 수 있었다.

356통, 이 편지들은 지금 어디 있을까. 전쟁터에서 인간 목소리를 내는 이 편지들을 한군데 모아놓고 두고두고 보관해 읽을 길은 없는 것일까. 월남전은 숱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만 우리에게 남은 숙제는 357번째 쓰는 편지로 줄여 말할 수 있다.

357번째 편지 주인공을 찾는다. 이 편지들, 또 월남전과 관련한 여러 자료를 모으고자 한다. ‘베트남전쟁 아카이브’다.

*정영환씨가 아내 유재순에게 쓴 편지 356통은 경기도 성남시 국가기록원 나라기록관에 기증돼 비공개 보관 중이다. 한베(한국·베트남)평화재단은 편지 356통의 사본을 보관하고 있으며, 이번 전시에서 공개한다.
9. 확인중…

이 전시는 거대한 전쟁 틈바구니에서 이름 없이 스러진 존재들과 그들이 남긴 소소한 기록이다.

이들 중 아무도 정치가가 없다.

이들 중 아무도 장군이 없다.

이들 중 아무도 가수가 없다.

여기 있는 전시물 중 보물 비슷한 게 하나도 없듯,

이들 중 아무도 영웅이 없다.

아내와 아이 셋을 잃은 한낱 농부는 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가.

여섯이 죽은 자리에 남은 다섯 발 총알은 다 녹지 않은 채 어쩌다 거기 남아 있었는가.

한 여인은 어째서 쩌우까우를 씹다 못해 몸 구석구석에 칠해야 했는가.

책에는 나오질 않는다.

두꺼운 세계 전쟁사 어디에도 이들의 이름은 나오질 않는다.

이들 중 누구도 자본가가 아니다.

이들 중 누구도 지주가 아니다.

이들 중 누구도 역사가가 아니다.

모든 국가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 몰라도 어떤 전쟁도 인간성에서 승리할 수는 없다.

전쟁도 전쟁사도 기록하지 않고 기억하지 않는 베트남전쟁, 월남전쟁 기록과 기억과 희미한 흔적을 찾아내 전시하는 이유는 간명하다.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다. 이 염원을 ‘평화’라고 부른다.

전시 ‘확인중…’은 베트남전쟁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과정과 활동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이다.

때로 전시물이나 자료가 빈약해 보일 수 있다. 여전히 이는 ‘확인중…’에 있다. 앞으로도 한동안은 거듭 ‘확인중…’일 터이다.

인간 역사에서 인간과 인간성을 패퇴시키는 것은 기억이 아니라 망각이다. 망각에 지지 않으려는 노력이 인류 역사를 발전시켜왔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 아카이브 전시는 그 노력의 일환이다.

망각과 싸우는 이는 기억하는 사람이다. 함께 기억하면 역사다. 서울 성동구 작은 전시장(소월아트홀)에서 그 기억과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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