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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서 온 편지

평화우체국의 편지 3통

제1282호
등록 : 2019-10-08 12:55 수정 : 2019-10-11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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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문에 실렸던 베트남전 병사들의 사진. 1969 보도사진연감
“이 신분증은 우리 어머니의 유일한 유품이야.”

쩐민(79)은 한참이나 한국의 주민등록증과 흡사한 종이로 된 어머니의 신분증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수십 년을 버텨준 종이였지만 시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색이 누렇게 바랬다. 베트남전쟁 때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유가족이 간직한 유품을 ‘잠시 넘겨받으러 온’ 구수정 한베(한국·베트남)평화재단 상임이사에게 쩐민은 이 말만 되풀이했다. 신분증은 그에게 남은 어머니의 흔적 전부였다.

한국군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을 수색한다는 명목으로 거의 1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을 무참히 죽이고 마을에 불을 질렀다. 쩐민의 어머니 역시 이때 한국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쩐민이 마을로 돌아왔을 때 집은 잿더미가 돼 있었다. 그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집을 뒤져 어머니의 신분증을 찾았다. 어머니가 침상 머리맡에 신분증을 놓아두던 습관을 몰랐다면 화마가 삼켰을 물건이다.

겉을 싼 코팅 비닐이 불에 녹아 우그러진 신분증을 사이에 두고 아들과 구 상임이사는 두 손을 맞잡았다. 두 손 다 베트남전쟁 때 한국군에게 학살당한 민간인들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진 뒤에도 속절없이 흘러간 스무 해의 세월이 주름져 있었다. 한베평화재단은 2018년부터 희생자 유가족이 보관해온 유품과 베트남전쟁의 흔적을 찾아나섰다. 저마다 간직해온 유품에는 사무치는 그리움과 전쟁의 비극이 깃들어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일기장에, 마을 위령비에 그날의 한과 증오를 기록했다. 그것은 베트남전쟁의 역사가 됐다.

전쟁범죄는 공식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2000년부터 시작된 <한겨레21>과 한베평화재단 등 시민사회의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 이후 지난 9월9일 20년 만에 처음으로 입장을 밝힌 국방부는 “국방부에서 보유한 한국군 전투 사료 등에서는 주월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관련 내용이 확인되지 않는다”며 선을 그었다. 베트남 꽝남성과 꽝응아이성의 17개 마을에 사는 학살 희생자 유가족과 피해자 103명의 청원서에 담긴 민간인 피해 인정, 사과, 피해 회복 조처는 또다시 아득해졌다.

한베평화재단은 베트남전쟁의 흔적이 사라지기 전, 수많은 기억과 기록의 편린을 모아 새로이 기록 중이다. 한국과 베트남의 서로 다른 기억을 마주하고 진실을 확인해가는 첫걸음이 될 ‘미안해요 베트남’ 20주년 기념 아카이브 기록전 ‘확인 중…’은 11월4일부터 21일까지 서울 성동구 성동문화회관 1층 소월아트홀에서 열린다. <한겨레21>은 세 차례 걸쳐 아카이브 기록전에 전시될 희생자의 유품과 참전 군인, 종군기자의 물건 등을 미리 공개한다. 이번호에서는 아카이브 기록전을 기획한 서해성 감독이 편지 형식으로 전시물들을 소개한다.

평화우체국 첫 번째 편지는 총알, 두 번째 편지는 쩌우까우, 세 번째 편지는 어떤 잡기장(잡다한 것을 적는 공책) 이야기입니다. 여섯을 스러지게 한 다섯 총알, 쩌우 잎과 까우 열매를 찧던 절구통, 베트남 농부가 가슴에 품고 있던 잡기장을 전시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1. 쇠가 말할 차례

여섯 사람이 한자리에 쓰러지고 총알 다섯 개가 남았다. 그날 마을 사람 여섯은 총에 맞아 한 구덩이에 묻혔다. 총알 다섯 발로 여섯 사람이 죽었는지, 한 발은 사라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총알이 발사된 때는 1966년 5월14일이었고, 베트남 중부는 건기였다.

긴 전쟁이 끝나고 동네 사람들은 함부로 가매장한 무덤을 이장하기 위해 파헤쳤다. 2012년이었다. 뼈는 거의 다 썩고 두개골이나 치아 정도만 남아 있었다. 뼈의 주인은 알 길이 없었다. 어느 전쟁터나 시간이 흐르면서 죽음은 이 뼈들처럼 익명화한다. 뼈마저 사라지고 전쟁이 단지 숫자가 될 때 고통은 측량할 수 없게 된다. 다만 거기 녹슨 총알 다섯 개가 남아 있었다.

엉성하게나마 겨우 뼈를 수습했을 때 유골들 사이에 녹이 슬고 일그러진 총알 다섯 개가 얼굴을 드러냈다. 죽은 자들 몸에 박혀 있던 총알이었다. 어떤 총알은 으깨져 앞이 부서지거나 심하게 부식한 채 가까스로 유골 틈새에 놓여 있었다. 그날 그 총알들은 사람 몸을 뚫고 들어가 어느 굵은 뼈에 부딪히면서 멈췄을 게다. 한 발은 어쩌면 누군가의 몸을 관통해서 다른 몸에 박혔을지도 모른다. 죽은 자는 여섯이고 총알은 다섯이다.

마을 어른들은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죽음을 머리로 기억하는 게 아니다. 살아 있는 죽음은 몸 어딘가에 검붉고 끈끈한 액체로 묻어 있다. 그걸 지우려고 문지를수록 죽음과 그 기억은 몸 전체로 퍼져나가고 또 더 깊이 스민다.

총알은 다섯이지만 다른 한 명도 총으로 사살된 게 분명하다. 무덤을 열었을 때 총알 다섯은 눈 뜨고 죽은 자처럼 거기 남아 있었다. 그 총알들은 살이 썩고 뼈가 녹을 때 다 삭아내리지 않은 채 아직 무얼 말하려는 것일까.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녹슨 한낱 3g짜리 작은 쇠붙이를 함께 자세히 들여다보고자 한다. 무심한 죽음을 기억하려는 건 삶을 더욱 거룩하게 하려는 행위다. 쇠는 말이 없다. 쇠가 말을 얻는 건 오직 인간이 쇠에게 언어를 입힐 때뿐이다. 인간이 그 쇠로 인간을 해쳤기에.

쇠가 태어난 곳은 필시 미국 스프링필드 조병창이었고, 몸에 박힌 곳은 베트남 푸옌성 토럼마을이고, 총알을 발사한 이는 한국군이다. 이제 53년 만에 세상으로 나온 녹슨 쇠가 말할 차례다.

*당초 서해성 감독이 평화우체국에 써서 부친 편지 원본들 속 지명은 ‘베트남’이 아닌 ‘비엣남‘이었습니다. 서 감독은 “세계에서 ‘비엣남’을 ‘베트남’으로 부르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뿐입니다. ‘비엣남’을 현지 발음으로 표기하는 것이 정상적으로 ‘비엣남’을 이해하는 첫걸음이 될 겁니다”라며 ‘비엣남’ 표기 이유를 전해왔습니다. 다만 지면에는 <한겨레21>과 국립국어원 표기법을 고려해, 당사자의 동의를 받아 ‘베트남’이라고 표기했습니다.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희생 유가족이 보관해온 유품과 기록.

2. 쩌우와 까우 이야기

베트남 사람들은 구장나뭇잎인 라쩌우에 석회를 바르고 빈랑나무 열매 꽈까우를 나무나 쇠로 된 작은 절구에 찧어서 먹는다. 쩌우 잎(라쩌우)으로 까우 열매(꽈까우)를 싸면 봉황새 모양이 되는데 이를 ‘쩌우까우’라고 한다. 베트남 민간에서 쩌우까우는 오래도록 절개 있는 연인이나 남녀의 사랑을 뜻했다. 지금도 혼례에 쩌우까우는 빠지지 않는다. 쩌우까우는 원앙이자 금슬인 셈이다.

나뭇잎을 석회와 함께 씹는 문화는 동남아시아 말고도 라틴아메리카나 아프리카에도 있다. 이는 주술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코카잎을 석회나 재와 함께 씹던 안데스 문화에서 발상을 얻은 게 코카콜라라고 한다. 초기 광고(1886년)에는 분명히 그렇게 나온다. 석회는 나무즙이나 향기를 오래 입안에 머물게 하여 치아를 보호하는데 이때 색소 침착이 일어난다.

쩌우까우 한입은 이야기의 시작이라는 말이 있다. 베트남 여성들은 쩌우까우를 씹으면서 들에 나가고 산에 올랐다. 사랑방에 모여 앉아 인생살이를 풀어놓을 때는 쩌우까우를 서로 입에 넣어주곤 했다. 이제는 만나기 쉽지 않지만, 쩌우까우를 씹는 여인이 베트남에선 흔했다. 쩌우까우는 어디서나 있는지라 베트남에는 쩌우까우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

손님이 찾아오면 베트남 여인들은 쩌우까우를 같이 씹었다. 처음 만난 사이에도 쩌우까우를 나누고, 사랑과 우정을 맹세하는 날에도 쩌우까우가 함께했다. 쩌우까우를 씹으면 입술에 붉은 물이 들고 쌉싸름한 맛이 돌면서 몸이 따뜻해졌다. 쩌우까우는 치아를 보호하는 역할도 했으므로, 쩌우까우는 사람들끼리 소통하는 것이자 약이었다. 피부나 치아를 한번 물들인 쩌우까우 색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하미마을에 사는 팜티호아는 여러 해 동안 쩌우까우를 씹었다. 사촌언니도 함께 씹었다. 여느 베트남 여인들처럼. 예로부터 전해오는 말에 따라 몸에 바르기도 했다. 한국군이 하미마을에 들어온 것은 1968년 2월이었다. 과자를 쥐여주면서 친절하게 굴던 군인들은 어느 날 총을 들이대고 팜티호아와 사촌의 옷을 벗겨냈다. 겉을 찢어 드러난 몸을 본 군인들은 두 여인이 피부병이라도 걸린 것으로 여기고 일단 손을 떼어냈으나 곧 거칠게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팜티호아는 상처에 붕대를 감고 한동안 누워 있어야 했다.

죽을 때까지 팜티호아는 자주 말했다. 쩌우까우 덕분에 그날 욕보지 않을 수 있었다고. 식구들은 그 쩌우까우 절구통을 여태껏 보관했다. 손가락 두 개 정도 들어가는, 쇠로 된 조그마한 절구통이다. 다시는 쩌우까우 색소를 여인들 몸에 바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위하여 팜티호아를 지켜준 그 쇠절구통이 한국으로 오고 있다.

*팜티호아는 135명이 한꺼번에 사살당한 하미마을 학살 때(1968년, 당시 40살) 다섯 살 딸과 열 살 아들을 잃고 자신은 수류탄 파편에 두 발목을 잃었다. 학살 사건 일주일 뒤, 그는 다낭으로 후송돼 독일 의료진에게 치료받았다. 2013년에 세상을 떠났다.

3. 농부에게 시와 그림을 가르친 전쟁

빈호아 청년 응우옌니엠은 일곱 살 아래 빈호아 처녀 도안티지엡과 한마을에서 자라 혼인했다. 지아비에게 아내는 고왔고, 아내에게 지아비는 씩씩하고 자상했다. 두 가시버시(부부)는 늘 주리고 헐벗었다. 쌀밥을 먹지 못하는 날에는 마와 비슷한 콰이미를 느억맘(젓갈)에 찍어 먹는 것으로 끼니를 때우는 일이 다반사였다. 설이 돌아와도 여러 해 동안 설빔을 입지 못했다. 옷이 해지면 기워 입고 또 깁다가 얻어 입거나 했다.

살림은 궁해도 아이는 넷이 태어났다. 그해 큰아들 타인뚜언은 여덟 살이었다. 큰딸 티오안은 네 살이었다. 둘째 딸 티훙은 두 살이었다. 막내아들 반중은 태어난 지 3개월이었다. 아내는 스물여섯 살이었다. 1966년이었다. 양력 12월6일 해 뜰 무렵 니엠은 식구들을 둔 채 혼자 숲으로 들어갔다. 아내 지엡은 아이들과 함께 집에 남겠다고 했다. 마을 사내들 대부분은 숲에 숨었다. 마을을 향해 군인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숲에서 나왔을 때 두 딸과 아내는 죽어 있었다. 막내아들도 사흘 뒤에 숨이 끊어졌다. 아내는 큰아들에게 쏟아지는 총알을 막아내면서 머리에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집도 불에 타서 사라졌다. 가재도구도, 옷 한 벌도, 가족사진 한 장도 남아 있질 않았다. 여섯 식구 중 큰아들과 남편만 살아남았다.

학살 사흘 뒤 니엠은 빈 집터에 앉아 잡기장에 시 ‘증오’의 초고를 끄적거렸다. 그가 썼다기보다 시가 어디선가 와서 그의 손끝으로 스며나왔다. “피의 빚은 피로 갚게 되리니 이 증오 영원하리라.” 그는 그때까지는 진짜 증오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한낱 가난한 농부였다. 니엠이 맘껏 미워하는 건 고작해야 메뚜기떼와 참새떼 정도였다. 그는 서른세 살이 되도록 증오에 관한 시 따위를 쓸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시를 써야 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전쟁이 끝난 뒤 니엠은 아내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새가 울부짖는 소리’라는 시를 썼다. 그는 시인이 아니라 여전히 가난한 농부일 뿐이었다. 몇 해 뒤에는 아내를 그림으로 그렸다. 니엠은 화가가 아니라 들에서 벼를 심는 등 굽은 농부였다. 그림 속에서 파란색 저고리를 입고 머리를 뒤로 땋아내리고 얼굴이 흰 소문난 동네 미인이었던 아내는 여전히 스물여섯 자태 그대로였다. 전쟁과 학살과 그리움은 니엠에게 시를 쓰게 하고 그림을 그리게 했다.

시가 있어 그날 총부리에 세상을 떠난 아이들을 불러낼 수 있었고, 그림이 있어 아내 얼굴을 잊지 않고 만날 수 있었다. 그림 위에는 ‘현처’(hiền thê, 賢妻)라고 써넣었고 아랫부분에는 ‘병오년 10월25일 남조선 학살’이라고 새겨넣었다.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지만 그는 어김없이 그냥 농부였다.

니엠은 베트남 정부가 학살자 추모 시설이나 유가족 지원에 적극 나서지 않는다고 생각해 더 늦기 전에 그날을 기록해두려 했다. 그는 다시 잡기장을 끄집어냈고 시 ‘증오’를 완성했다. 1990년께였다. 그 시는 <1966년 빈호아 학살사건 자료집>에 실렸다(꽝응아이성종합박물관 소장). 10년쯤 흐른 뒤, 니엠은 ‘병오년 10월25일, 남조선 무리의 동포 학살에 대한 사회의 무관심’이란 꽤 긴 제목으로 시를 썼다. 아직도 그는 빈틈없이 농부였다.

1933년에 태어난 응우옌니엠은 올해 여든여섯 살 농부다. 그의 두 딸과 막내아들과 아내의 목숨을 앗아간 이들은 한국 군인들이었다. 증오를 기록한 농부의 잡기장 표지에는 응우옌니엠이라는 이름이 박혀 있다. 그는 나이 들어서 몸은 조금 부실하지만 그 ‘증오’를 품은 채 살아 있다. 그의 잡기장도 살아 있다. 진짜 그 시를 읽어야 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비닐에 싸인 잡기장은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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