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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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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의 마지막에서 그녀는 맘 놓고 울었다

삼성전자 그만둔 뒤 뇌종양 걸린 한혜경씨

대법원 패소 등 10년 만에 산재 재신청 승인
등록 2019-05-11 03:29 수정 2020-05-02 19:29
4월29일 서울 영등포구 근로복지공단 서울남부지사에서 김시녀(왼쪽)씨가 한혜경씨의 휠체어를 밀고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회의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4월29일 서울 영등포구 근로복지공단 서울남부지사에서 김시녀(왼쪽)씨가 한혜경씨의 휠체어를 밀고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회의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4월29일 오후 2시, 서울 영등포구 근로복지공단 서울남부지사.

이종란 반올림 노무사가 비장하지만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우린 마지막 기회까지 탈탈 털어 다 썼어. 이제 더는 없어. 마지막 기회야.”

이날 ‘업무상 질병판정위원회’(이하 질판위)가 열렸다. 한혜경(42)씨가 재신청한 산업재해보상보험의 인정 여부가 최종적으로 결정되는 자리였다. 한씨는 1995년 10월부터 삼성전자 기흥공장에서 5년10개월간 일하다 퇴사하고 4년 뒤 뇌종양 진단을 받았다. 종양 제거 수술을 하면서 뇌에 손상이 생겨 지체장애, 보행장애, 언어장애 1급이 됐다.

한씨는 산업재해를 인정받기 위해 10년을 싸웠지만 번번이 졌다. 2009년 3월 근로복지공단 평택지사에 처음 산재 신청을 했으나 불승인됐고, 근로복지공단 심사·재심사 청구로도 결과를 뒤집지 못했다. 행정소송을 했지만 1심(2013년), 2심(2014년), 3심(2015년)에서 모두 졌다. 이종란 노무사의 말대로 마지막 남은 한 번의 기회는 근로복지공단 재신청 절차뿐이었다.

한씨가 2011년 4월7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삼성전자 직업병 피해자 제2차 집단 행정소송 기자회견’에서 “삼성전자는 피해자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말하는 모습.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한씨가 2011년 4월7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삼성전자 직업병 피해자 제2차 집단 행정소송 기자회견’에서 “삼성전자는 피해자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말하는 모습.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1시간 전, 근로복지공단 앞 닭곰탕집.

한씨의 어머니 김시녀(62)씨가 하얀 국물을 뒤적이며 말했다. “근로복지공단에 하나 고마운 건 맛있는 닭곰탕집을 알게 해줬다는 거야.”

주변 식당을 꿰고 길을 외울 정도로 다녔다. 김씨는 10년간 휠체어를 탄 딸 한씨를 밀고 삼성 본관, 국회, 법원, 근로복지공단을 수없이 찾았다. 이날도 강원도 춘천의 집에서 장애인 콜택시와 지하철을 타고 4시간 걸려 서울로 온 길이었다.

모녀는 10년간 별다른 수입 없이 버텼다. 아파트를 팔고 전세, 다시 월세로 이사 갔다. 이혼하고 음식 장사를 하던 어머니 김씨는 딸 병간호와 산재 투쟁에 바빠 일도 거의 못 나갔다. 반올림을 통해 조금씩 생계 지원을 받으며 힘들게 버텼다. 그래서 ‘10억원을 줄 테니 반올림이랑 손 끊고 산재 소송하지 말라’는 삼성의 제안도 받아들이려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딸이 막아섰다. 김씨는 딸의 뺨을 네 차례나 때리며 “엄마가 이렇게 힘든데 그래도 안 되냐”고 했다. 딸은 그래도 안 된다고 했다.

2014년, 함께 싸우던 피해자들이 반올림과 삼성직업병가족대책위원회로 갈라지던 순간이 가장 절망적이었다. 김씨는 화병이 나서 딸과 함께 죽을 생각도 했다. 한씨는 그 무렵부터 액정표시장치(LCD) 공장에서 일을 강요받는 꿈을 꿨다. 잠에서 깨고도 꿈과 현실을 헷갈려 옆에서 자는 엄마에게 화낸 적도 많았다.

2015년 천막농성을 시작한 뒤로 오히려 활력이 돌았다. 김씨는 딸과 함께 매주 토요일 밤을 농성장에서 보냈다. 그때마다 늘 깨끗하게 정리정돈을 해 반올림 활동가들에게서 ‘시설반장’이란 별명을 얻었다.

2018년 11월 삼성전자와 반올림의 중재안이 나온 뒤 한씨는 ‘반도체·LCD 산업보건 지원보상위원회’로부터 보상받게 됐다. 덕분에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았다. 그래도 여전히 억울함은 풀리지 않았다.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와 함께 가장 오랫동안 치열하게 싸웠으면서도 10년 동안 국가로부터 산재를 인정받지 못했다는 응어리가 남았다.

2018년 11월23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삼성전자-반올림 중재판정 이행합의 협약식이 끝난 뒤 황상기 반올림 대표(가운데)와 김기남 삼성전자 대표이사(왼쪽), 한혜경씨가 기념사진을 찍기에 앞서 함께 손을 잡고 악수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2018년 11월23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삼성전자-반올림 중재판정 이행합의 협약식이 끝난 뒤 황상기 반올림 대표(가운데)와 김기남 삼성전자 대표이사(왼쪽), 한혜경씨가 기념사진을 찍기에 앞서 함께 손을 잡고 악수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한씨는 닭곰탕을 먹다 말고 손가락을 세 개 폈다가 네 개 폈다가 하면서 어머니에게 더듬더듬 말을 걸었다. 앞서 3월에 열린 1차 질판위에 들어가서 낭독한 진술서를 이번 2차 질판위에서도 그대로 읽을 예정인데, 마지막에 적은 날짜를 3월에서 4월로 바꿔달라는 뜻이었다. 1차 질판위 때는 의사 등으로 구성된 위원 6명의 의견이 3 대 3으로 갈려 결론이 나지 않았다. 2차 질판위는 마지막의 마지막인 셈이었다.

반올림의 조승규 노무사가 쓴 한씨 산재신청서는 54쪽에 이르렀다. 조 노무사는 과거 첨단전자산업 공정의 이해가 부족해 혜경씨가 담당했던 업무의 유해성이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10년 전에 ‘납’만이 실질적으로 고려됐다면 이제는 플럭스와 유기용제, 교대근무, 스트레스 등도 주목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첨단산업 분야에서 질병의 인과관계가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더라도 특정 사업장에서의 질환 발병률과 유해 요인들의 복합작용 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2017년 대법원 판례도 인용했다.

한씨가 처음 문제를 제기한 뒤 반도체 노동자의 뇌종양 발병률을 살피는 역학조사가 진행됐고, 그 덕분에 여러 반도체 노동자가 법원과 근로복지공단에서 뇌종양으로 산재를 인정받았다. 앞장서 길을 연 한씨만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한씨가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에서 읽기 위해 직접 쓴 최종의견진술서.

한씨가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에서 읽기 위해 직접 쓴 최종의견진술서.

오후 2시10분. 한씨는 질판위 위원들 앞에서 직접 쓴 진술서를 읽었다. 언어장애가 있어 발음이 정확하지 않고 느렸지만, 자세히 들으면 알아들을 수 있었다. 수없이 연습한 대로 읽었다.

“제가 예전에 산재 인정이 안 된 이유는 제 병의 원인이 아직 잘 밝혀지지 않았다는 거였어요.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는 거 알아요. 반도체, LCD 공정에서 뇌종양 피해자가 많이 나왔고, 또 명확히 입증 못해도 산재보험 취지상 뇌종양도 산재로 인정되는 분들이 여럿 생겼잖아요. 저는 꼭 산재로 인정받아서, 앞으로 저 같은 사람이 나오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어요.”

일주일 뒤, 한씨는 산재가 인정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공식 발표는 아직 안 났지만, 비공식적으로 반올림에 들어온 소식이다. 대법원이 불인정한 산재 판정을 근로복지공단이 뒤집은 것은 전례를 찾기 힘들다. 불과 10년 새 직업병을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이 그만큼 빠르게 성장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한씨는 산재 인정 소식을 듣고 소리 내어 울었다. 어머니 김씨는 “그래 울어라, 울고 싶을 때까지 울어라”고 했다. 김씨는 “가슴속에 막혀 있던 뭔가가 뻥 뚫린 거 같다”는 딸의 말을 듣고 같이 울었다.

최근 이사한 강원도 춘천의 새 집에서 김시녀(왼쪽)씨와 한혜경씨가 사진을 찍었다.

최근 이사한 강원도 춘천의 새 집에서 김시녀(왼쪽)씨와 한혜경씨가 사진을 찍었다.

김씨는 딸의 산재가 인정됐더라도 변함없이 그동안 걸어온 길을 계속 걷겠다고 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통과될 때까지 산재 피해자들과 연대해 싸우겠다는 말이다. 어머니와 함께 다니겠냐고 묻자 한씨가 답했다. “해야 해요.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어요, 자신은 자기가 지켜야 한다는 걸.”

글·사진 변지민 기자 d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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