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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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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독새기콩, 쥐이빨옥수수, 앉은뱅이밀의 맛을 아시나요

토종씨앗 운동 10년, 강산이 변하다
등록 2019-04-11 02:53 수정 2020-05-02 19:29
경기도 화성 길국분 할머니가 수확한 키큰수수. 화성푸드통합지원센터 제공

경기도 화성 길국분 할머니가 수확한 키큰수수. 화성푸드통합지원센터 제공

전라남도 영광에 사는 최영식(63)씨는 집에 딸린 15평 텃밭에 농사짓는 농부다. 최씨는 2008년 퇴직한 뒤 농부가 되었다. 어린 시절 부모와 함께 농사를 지었고, 직장생활 하면서 퇴직하면 작은 밭을 갖는 게 꿈이었다. 그의 텃밭 특징은 작은 평수에 여러 과채류가 오손도손 모여 있다는 것. 이렇게 된 건 최씨가 토종씨앗의 다양함에 이끌려서다.

두부콩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토종씨앗을 알게 된 것은 유튜브에서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서다. “터미네이터라는 게 있는데요, 그게 식물에서 받은 종자는 싹을 못 틔우게 종자회사에서 유전자조작을 하는 거라고 하대요. 생명체 갖고 장난치는 게 아주 분하더라고요.” 다큐멘터리를 본 뒤 그간의 수수께끼가 풀리는 듯했다. 천생 농사꾼이던 그는 종묘사에서 모종이나 씨를 사면 씨를 받아서 다음해에 심었다. 그런데 발아가 된 오이가 죽어버리거나 실컷 다 커서는 열매를 맺지 못했다. 배추를 심으면 잡종 풀같이 되어버리기도 했다. 그는 토종씨앗을 심고 나서는 진짜 농부가 된 기분이다. 옛말에 “농사꾼은 굶어 죽어도 씨주머니를 베고 죽는다”고 했다. “안 쓰는 씨앗도 냉장고에 보관합니다. 그렇게 하면 영구적으로 보관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상추·찰옥수수·콩·들깨·고추·곰취를 텃밭이 넘치게 아기자기하게 심었다. 토종씨앗으로 키운 상추, 찰옥수수를 먹어보면 “쌉쌀한 것이 옛날에 먹던 맛이 난다. 맛 유전자가 살아 있는 것 같다”.

최씨는 2013년부터 해마다 언니네텃밭(www.sistersgarden.org)에서 토종씨앗을 분양받는다. 전국여성농민회에서 운영하는 소비자 직거래 사이트인 언니네텃밭은 토종씨앗 지킴이 운동 ‘만원의 행복’을 2008년부터 해왔다. 만원을 입금하고 씨앗을 신청하면 4월 토종씨앗 4가지 중 3가지를 무작위로 발송해준다. 올해는 수수·대파·어금니동부·흰당근 씨앗을 보낸다. 2018년에는 노랑팝콘옥수수·부상추·아주까리밤콩·검정넝쿨콩, 2017년에는 메밀·푸른독새기콩·강낭콩·쥐이빨옥수수, 2016년에는 부상추·토종호랑이콩·토종찰옥수수·오리알태콩을 나눴다.

종묘상이나 마트의 씨앗들과 달리 토종씨앗들은 고향이 있다. 노랑팝콘옥수수·쥐이빨옥수수·토종찰옥수수는 강원도 횡성에서 왔다. 언니네텃밭에 꾸러미(농촌 직거래 택배 서비스)를 공급하는 횡성군 오산공동체의 한영미씨는 여성농업인센터(강원도 횡성 소재) 소장이다. 오랫동안 토종씨앗 지키기 운동을 해왔다.

한 소장은 ‘GMO반대 생명운동연대’ 활동이 토종씨앗을 찾는 계기가 되었단다. 대기업의 두부에 GMO 콩을 사용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루어진 연대 활동이었다. “그렇다면 대안은 어딨지? 예전부터 한국에서 두부를 만들던 콩은 어디로 간 거지?” 이런 의문에 답을 찾으면서다.

(위 부터) 언니네텃밭 꾸러미를 포장하는 강원 횡성 공동체 생산자 회원들. 여성농업인센터 한영미 소장이 횡성의 토종씨앗틀 앞에 서 있다. 구둘래 기자

(위 부터) 언니네텃밭 꾸러미를 포장하는 강원 횡성 공동체 생산자 회원들. 여성농업인센터 한영미 소장이 횡성의 토종씨앗틀 앞에 서 있다. 구둘래 기자

농가 방마다 보물처럼 숨겨진 씨앗들

당시 몇몇 마을에서 운동의 싹이 자라고 있었지만 토종씨앗이란 것 자체가 낯선 시대였다. 강원도 원주의 신림농협에서는 토종씨앗으로 기른 농산물을 수확해 전시장에 가져갔더니 모두 외국에서 온 작물이라고 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전해진다. 난생처음 보는 작물이어서다.

당시 정부도 씨앗 비상이 걸렸다. 2002년 국제식물신품종보호동맹(UPOV)이 발효되고 유예기간을 거쳐 2012년에 발효되었다. “씨앗의 근거를 남기는 게 시급했죠. 실태조사를 하는 대로 등록하고 기록을 남겼죠.”(한 소장) 종자회사들의 유전자조작과 이 기업들에 줘야 하는 엄청난 종잣값도 알려졌다. 청양고추 같은 한국산 씨를 보유한 종자회사가 외국에 팔리면서 로열티를 물어야 하는 일도 문제로 떠올랐다.

“한국에는 아무것도 안 남아 있을 줄 알았어요.”(한 소장) 그런데 뜻밖이었다. 농가의 방마다 보물이 숨어 있었다. 조사단이 가가호호 방문하자 어르신들이 씨앗들을 꺼내 보여주었다. 2009년에서 2015년까지 횡성군 ‘재래종 씨앗 보유 실태조사’를 벌여 토종 작물 84종 403가지 씨앗을 찾아냈다. 그렇게 10년 동안 한국 농업은 ‘씨앗’을 모태로 훌쩍 자랐다. ‘씨앗혁명’이었다.

토종앉은뱅이밀의 발견과 전파는 10년 사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극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이 재래종 밀은 수입 밀의 수익성·채산성에 밀려서 사라졌다는 게 정설이었다. 농과학자 안완식 박사가 1997년 남해에서 이 밀로 농사짓는 것을 관찰한 이래, 전혀 보고가 없었다. 이 밀은 세계적으로 아주 유명하다. 농학자 노먼 볼로그는 개발도상국의 굶주림을 해결해 노벨평화상을 받았는데, 그가 국제밀연구소에서 ‘소노라’라는 품종을 개량한 것이 ‘녹색혁명’의 바탕이 되었다. 이 소노라 품종이 토종앉은뱅이밀을 개량한 것이었다. 정작 한국에서는 사라질 위기에 부닥쳤다. 2012년 경남 진주시 금곡면에서 3대째 정미소를 운영하는 집안에서 오랫동안 이 밀을 재배해온 것이 알려졌다. 정미소 백관실 대표는 그렇게 오랫동안 씨앗을 밑지지(잃지) 않았던 이유를 병충해에 강한 것과 함께 경제성이라고 단언한다(, 백승우·김석기 공저). 이 토종 밀은 함양, 하동 등으로까지 재배지를 넓혔다.

제일 좋은 것으로 때를 놓치지 않고

모든 삶이 낱낱이 드러나 새로운 것이라곤 없을 것 같은 시대에도 여전히 ‘씨의 발견’은 계속된다. 변현단 토종씨드림(http://cafe.daum.net/seedream) 대표는 지금 전남 순천을 돌며 씨앗을 수집한다. “얼마 전 방문한 농가에 못 보던 무가 있더라. 씨를 갖고 있는 할머니가 시래기로 많이 먹는다고 한다. 다른 것에 비해 너무너무 맛있다고 한다.”

토종씨드림은 씨를 찾고 서로 나누고 길러본 뒤 기록을 남기는 단체다. 이 단체도 올해 2월 10주년 행사를 했다. 변 대표는 씨를 찾아 전국을 누비다가 새로운 씨를 발견하면 그동안의 노고를 다 잊는다. 2016년과 2017년 경기도 화성 토종씨앗 보유 현황 조사에서는 242농가에서 73가지 작물의 270개 품종 602점의 씨앗을 수집했다. 달갓과 갓무라는 생전 처음 보는 채소 씨도 얻을 수 있었다. 달갓은 갓 종류인데 그렇게 쓰지 않고, 갓무는 화성의 염전 지대 사람들이 김치로 즐겨 담가 먹 는다.

토종씨앗의 주역은 할머니다. 한영미 소장은 씨앗을 내준 분의 90%가 할머니였다고 한다. 김은숙(47)씨는 언니네텃밭 횡성공동체에서 채종포를 맡고 있다. 채종포는 내년 농사를 위해서 씨앗을 받는 밭이다. 김씨가 맡고 있지만 채종은 주로 시어머니 강종석(75) 할머니가 한다. “씨앗은 좋은 것으로 골라야 한다. 옥수수알을 만져 단단한 것을 고른다. 참깨는 먼저 턴 것을 남겨둔다. 파는 겨울을 나서 대가 올라와야 꽃이 피고 씨를 받을 수 있다. 그걸 기다려야 한다.” 해를 걸러 밑져서는 안 되거니와 게으름을 피워서도 안 된다. 가장 좋은 씨를 내기 위해서 절기에 맞춰 심어야 한다. 씨를 내는 기술도, 김씨가 보기에는 그저 놀랍다. “어머니가 치질(키질)을 하면 지저분한 게 밖으로 나가요. 가벼운 것만 나가는 게 아니라 무거운 돌도 밖으로 나갑니다. 씨만 남죠. 엄청 신기해요. 그런데 제가 하면 씨가 치(키) 안에 남아나는 게 없어요.”

시집와서야 농사를 짓기 시작한 김씨는 시어머니가 고되게 일하는 것을 보고 계산기를 두들겨본 뒤 작물을 단일화했다. 사람 사서 쓰기도 좋고 팔 곳도 찾기 쉽다. 농약 치면 땡이니 일도 없이 편하다. 2천 평을 이렇게 짓는데, 토종씨앗·유기농으로 짓는 텃밭 300평은 이보다 일이 많다. “천연 농약 만들고, 섞어짓기·이어짓기 하고, 제초제 못 쓰니 풀 뽑아야 돼서”다.

어느 편이든 채산성은 어김없다. “찰옥수수도 우리 먹을 것만 짓는다. 조그맣고 찰지다. 옥수수는 줄기 한 대에 하나만 달리지만 찰옥수수는 한 대에 네 개씩 달리니까 조그매도 많이 먹을 수가 있다. 하지만 팔 데가 없어서 크게 지을 수가 없다. 마트에 내놔도 누가 사가겠는가.” 김씨는 빠르게 셈을 해나갔다. 400평에 4월부터 7월까지 심는 거니 한 달에 100만원꼴을 벌려면 하나에 400원에는 팔아야 하는데, 그렇게 사는 데가 없다는 것이다. 찰옥수수는 병충해에 강하고 맛있고 경제적이다. 토종씨앗의 약점은 씨앗 자체의 경쟁력이 아니라 시장경제에 있다. 하지만 이런 시장이 점점 열리고 있다. 다품종 소량생산 시대, 살 사람이 어딘가에 있다.

다품종 소량생산 시대에 맞춤

변현단 대표는 ‘아산제터먹이’처럼 토종씨에서 얻은 식재료를 가공한 식품을 소비자 식탁까지 올리는 형태가 계속해서 나타날 것이라고 말한다. “요즘 건강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들 시켜 먹잖아요.” 대기업에 종속되지 않는 협동조합 형태로, 소비자들까지 편입하는 선순환의 방식으로. 이 모든 것은 토종의 다양함 때문이다. 앞서 변 대표는 “절대 ‘토종고추’라는 식으로 말하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 풍각초, 칠성초, 앉은뱅이고추, 칼초… 골라 먹을 수 있는 게 이렇게 많다.


마트 가면 한 종류지만 토종은 10가지


텃밭·화분에 뭐 심을까


토종씨드림 변현단 대표에게 텃밭에 지금 무엇을 심으면 좋을지 물어보았다. 4월5일 한식 전후 모종을 내서 4월 하순부터 5월 어린이날(중부) 심는 것이 보통이다.
작은잎아욱 보통 볼 수 있는 아욱보다도 잎이 작다. 4월에 씨를 받으면 잎이 나는 것을 계속 따먹어 서리가 내릴 때까지 먹을 수 있다. 된장과 함께 먹으면 좋다. 위장에 좋다.
조선부추 부추는 다년생이라 베어서 먹으며 다음해에 또 난다. 마트에 있는 부추는 대부분 하우스에서 재배한 것이다. 맛과 향도 떨어진다. 조선부추는 냉장고에 넣지 않아도 빨리 세지 않는다. 맛과 향이란 약성과 연결되는 것이다. 간이 나쁜 이들에게 좋다.
조선파 개량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달고 향이 강하다. 양념거리로 더할 나위 없다. 몇 조각을 내서 넣어도 감칠맛이 난다. 웬만한 추위는 견디기 때문에 겨울을 나고 다음해 또 먹을 수 있다.
칠성초 고추는 토종씨앗 10종이 있다. 사서 먹는 고추는 다 비슷하지만 토종 고추는 맛도 향도 다 다르다. 칠성초는 매우면서도 단맛이 강하다. 고춧가루 내기에는 음성 재래고추가 좋다.
괴산 찰토마토 쉽게 재배해서 먹을 수 있다. 잘 터지지 않는다. 원래 토마토에는 신맛이 있다. 신맛, 단맛, 찰기 세 가지가 어우러질 때 맛있다. 토종을 먹으면 새로운 맛을 경험할 수 있다. 진안 토마토는 노란색을 띤 큰 토마토다. 이것 또한 맛있다.
키작은강낭콩 전라도에서는 동부라고 한다. 7월에 따고 그대로 또 심어서 먹을 수 있어 ‘두벌콩’이라고도 한다. 지금 뿌려 7월에 수확해서는 풋것으로 먹을 수 있다. 꼬투리 벗겨 밥에 넣어 먹고, 반찬해 먹고, 간장조림해서 먹는다. 일 년 내내 먹는 콩 중 가장 먼저 먹는 콩이다. 빨간색, 검정색, 알록달록한 것들이 있는데 모두 맛 차이가 있으니 자기에게 맛있는 것을 고르면 된다.

횡성(강원도)=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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