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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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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연극’은 막을 내려야 한다

성폭력반대연극인 공동 행동,

연극인 대상 교육 소책자 희곡 형태로 만들어
등록 2019-02-02 16:16 수정 2020-05-02 19:29
성폭력반대연극인공동행동(성반연)이 발간한 소책자 ‘불편한 연극’이 서울연극센터 앞에서 배포되고 있다. 성폭력반대연극인공동행동 제공

성폭력반대연극인공동행동(성반연)이 발간한 소책자 ‘불편한 연극’이 서울연극센터 앞에서 배포되고 있다. 성폭력반대연극인공동행동 제공

신 no.1 ‘선배의 교태 수업’

(선배 갑자기 후배의 사타구니 근처로 손을 쑥 들이민다. 후배 깜짝 놀란다.)

배우1: 왜 놀라?

배우2: 네?

배우1: 내가 이렇게 했는데, 왜 놀라냐고.

배우2: 아니 너무 갑자기 그러셔서… 좀, 그래서…. (중략)

배우1: 애비게일같이 능숙하게 존 프록터를 가지고 노는 인물이 이 정도로 놀라겠냐고.

배우2: 아, 아니요….

배우1: 이거야, 이거라고. 네 연기가 안 풀리는 게 여기 있는 거야. 막 자봐, 한번! …그 새끼가 너한테 질질 끌려다닐 정도로 꼬셔봐. 안달 나게.

연극인들이 겪은 성폭력·조직문화 사례집

‘불편한 연극’ 책 표지. 성폭력반대연극인공동행동 제공

‘불편한 연극’ 책 표지. 성폭력반대연극인공동행동 제공

앞의 대본을 읽을 때 어떤가. ‘불편’한가. 이런 불편함을 현장에서 겪는 연극인들을 위해 연극인들이 나섰다. 연출가 이윤택·오태석, 배우 이명행 등 연극계에서 암암리에 행해지던 성폭력이 2018년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결성됐던 성폭력반대연극인공동행동(성반연)이 #미투 1년을 맞아 소책자 ‘불편한 연극’을 만들었다. 실제 연극인들이 예술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겪었던 성폭력과 위계적인 조직문화에서 일어난 폭력 등 6개 장면을 대본 형식에 담았다.

1장은 성폭력이 난무하는 연극 수업 편, 2·3·4장에선 서열에 따른 폭력적인 조직문화, 5장에선 근로계약서 없는 현장, 6장에선 뒤풀이에서 일어나는 성희롱이 상황별로 정리돼 읽기 쉽다. 각 장면에 실 린 사례들은 연극인들이 작업 현장에서 실제 겪은 일이다.

성반연은 2018년 2월 출범한 뒤, 같은 해 여름까지 일주일에 한 번씩 ‘지금 말하기 자리’라는 모임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연극인들이 털어놓은 연극계 내 뿌리 깊은 성폭력과 위계 문제가 ‘불편한 연극’의 대본이 됐다. 연출·작가·기획·배우 등 6명으로 구성된 소책자 제작 준비팀은 그해 여름부터 책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대본이 약 20개 만들어졌고,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중복되는 것을 추리고 감수를 받아 6개 장으로 정리했다.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에선 제작비를 지원했다. 발간까지는 약 6개월이 걸렸다.

성반연은 책을 내면서 “‘불편한 연극’을 하고 있을 연극인들에게, ‘불편한 현장’에서 고민할 동료들에게, 이것은 분명한 잘못이고 폭력임을 말해주기 위해 기획했다”며 “피해자를 위해 연대 활동을 이어가고, 정기적으로 포럼을 열며, 처벌과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를 만들어가는 등 노력하면서, 성반연 구성원들은 현장 연극인을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성평등한 작업환경을 만들기 위해 기존 직장 내 성희롱 예방 교육과는 다른 현장의 공연예술인을 위한 성희롱, 성폭력, 더 나아가 위계 및 공정성, 젠더 감수성까지 이르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담았다”고 밝혔다.

미래 연극인들에게 대물림되지 않도록

각 대본 뒤엔 ‘문제적 장면’의 ‘문제의 이유’를 해설로 붙였다. 예를 들어 연기 강습을 빙자해 갑작스럽게 신체를 만지는 행위에 대해선 “상대의 동의 없는 신체 접촉은 작업현장에서도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연기 지도를 빙자한 성폭력입니다”라고 설명했다. 성기 안마를 시키거나 연기 지도라면서 여성의 신체 등을 만진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이윤택 사건이나, 영화 촬영 중 사전에 협의 없이 여성 배우의 바지 속에 손을 집어넣은 배우 조덕제의 사건 등에서 보듯, 연기를 가장한 성폭력이 비일비재한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또 “막내” “야!” 같은 호칭을 쓰는 것에 대해서도 상대를 동료가 아닌 상하 관계나 서열 구조상 말단에 놓는다고 했다. 위계적 조직문화에선 성폭력이나 신체적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다.

책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가장 고려했던 점은 ‘목적과 대상’이었다. 성반연에서 활동하는 한 연극인이 말했다. “현재 연극계가 가진 성폭력 구조에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을 대상으로 할 것인가, 피해 사례를 고발하는 형식으로 할 것인가 등을 고민했다. 피해를 입고 있음에도 주변에서 ‘피해가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에게 ‘그것은 성폭력’이라는 확신을 줘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고발이 아닌 교육 차원에서 접근하기로 했다.”

연극인들은 일반 직장인들과 달리 매년 받는 직장 내 성희롱 교육도 받지 않는다. 공공 극장에선 공연팀에 의무적으로 성희롱 교육을 받게도 하지만 형식적인데다 직장인을 대상으로 만든 성희롱 예방 교육을 받기 때문에 연극계 현실과 동떨어진다는 지적이었다. 성반연이 연극인들이 겪은 실제 사례를 책에 담은 이유다.

자율 규약 ‘코리안 스탠더드’ 준비 중

이 연극인은 “학교나 연극을 갓 시작한 연극인들이 있는 공간에서 성폭력이 자행되는 조직문화가 확대재생산되지 않도록 각 예술대학과 예술 전공이 있는 대학교에 책을 배포할 예정”이라고 했다. 성반연은 총 1200부를 제작해 그중 250부가량을 지난 1월 말부터 서울 종로구 혜화역 4번 출구 앞, 서울연극센터와 1번 출구 방향의 서울문화재단 대학로연습실에서 배포하고 있다. 또 성반연 페이스북 페이지와 ‘예방교육 통합관리’ 누리집 등에서 ‘불편한 연극’ PDF를 내려받을 수 있다.

성반연은 올해 조직을 재정비할 예정이다. 또 오디션, 연습, 공연 종료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황과 대처법을 정리한 미국의 ‘시카고 시어터 스탠더드’(Chicago Theater Standard)를 참고한 ‘코리안 스탠더드’를 준비하고 있다. ‘시카고 스탠더드’는 미국 공연예술계에서 성차별·성폭력적 작업 방식을 반대하며 만든 자체 규약이다. 예를 들어 ‘극에 성행위나 노출이 포함됐다면 오디션에서 동의를 구해야 한다’ 등이 담겨 있다. 성반연은 “연극 제작 과정에서 성폭력을 줄이고 잘못된 관행을 고칠 수 있도록 상황에 따른 대처법을 ‘코리안 스탠더드’에 담을 것이다. 또 법적 대가를 다 치른, 성폭력에 연루된 연극인들이 돌아올 때 언제 어떤 방식으로 무대에 받아들일지에 대한 고민도 함께 다뤄질 것”이라고 밝혔다.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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