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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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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살기 위해 펜을 들었다

<사이공의 흰옷>부터 <전쟁의 슬픔> <찌 패오> <미에우 나루터>까지 소설가 김남일을 깨운 ‘베트남
등록 2018-01-12 20:38 수정 2020-05-02 19:28
은 한베평화재단과 함께 꽝남성 학살 50주기를 추모하고 민간인 학살의 진실 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 개최 자금을 모으는 스토리펀딩 ‘내가 만난 베트남’을 진행합니다. 베트남에서 벌어진 가해와 피해의 역사가 머나먼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임을 생각하며 여러 분야의 인사들이 간직한 베트남에 대한 기억을 조명하는 작업입니다. 베트남의 국민작가 반레에 이어 소설가 김남일이 ‘내가 읽은 베트남’을 전해왔습니다. _편집자
2008년 포스코가 주최한 아시아문학포럼에 초청된 바오 닌 작가(오른쪽)와 김남일 작가가 경북 포항의 한 식당에서 사진을 찍었다. 뒤 왼쪽에 방민호 서울대 교수, 오른쪽에 소설가 이경자, 함정임이 살짝 보인다. 사진가 최경자 제공

2008년 포스코가 주최한 아시아문학포럼에 초청된 바오 닌 작가(오른쪽)와 김남일 작가가 경북 포항의 한 식당에서 사진을 찍었다. 뒤 왼쪽에 방민호 서울대 교수, 오른쪽에 소설가 이경자, 함정임이 살짝 보인다. 사진가 최경자 제공

그 시절, 그러니까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 베트남은 ‘해방’의 다른 이름이었다. 놀랍게도 우리는 베트남에 대해 딱 한 권의 책을 읽었을 뿐이지만, 해방을 위해서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 나는 의식의 저 밑바닥에 완강히 버티고 있던 무엇인가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한마디로 저자는 ‘파월 한국군=자유의 십자군’이라는 등식이 집단적 최면일지 모른다고 주장하는 셈이었다. 두렵지도 않나, 심지어 그는 남베트남 정권을 미국의 ‘괴뢰’라고 했다.

리영희 교수, 그는 사실이 왜 진실로 진화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준 우리 시대의 드문 지성이었다. 그는 늘 풍부한 데이터를 모았는데, 그것들은 그의 손을 거치는 순간 단순한 정보를 넘어서서 시대의 어떤 진실로 변모했다.

베트남 여행에서 만난 ‘하얀 아오자이’

1995년 첫 번째 베트남 종단 여행 뒤, 김남일 작가는 여러 차례 베트남에 갔다.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작가들의 모임’을 만들고 ‘베트남 연대의 밤’ 행사도 열었다. 베트남 여행길에서 한 장. 작가 김남일 제공

1995년 첫 번째 베트남 종단 여행 뒤, 김남일 작가는 여러 차례 베트남에 갔다.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작가들의 모임’을 만들고 ‘베트남 연대의 밤’ 행사도 열었다. 베트남 여행길에서 한 장. 작가 김남일 제공

1997년 10월,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또 다른 저서 를 편집한 경력을 무슨 큰 인연인 양 허두를 떼었다. 그는 내 청탁을 기꺼이 들어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흥분한 기색마저 조금 묻어났다.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작가들의 모임’이라고요? 참 좋네요.”

우리가 연 ‘제2회 베트남 연대의 밤’ 행사는 대성공이었다. 나는 그날 그가 종이에 빼곡하게 적어온 데이터를 통해 ‘우상과 이성’을 날카롭게 갈라내는 혜안에 감탄했다. 예컨대, 영국은 미국의 가장 가까운 우방이지만 베트남전쟁에 참가한 영국군이 몇 명인지 아는가. 의장대, 달랑 6명! 그는 또 말했다.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의 중앙위원회가 39명인데, 그중에 프랑스 식민정권과 연이은 일본 통치 아래서 항쟁을 벌이다 투옥되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반면 남베트남 정부에는 단 한 명을 빼고 전 각료와 군 장성들이 식민체제에 기생하던 자들이었다, 운운.

꼼꼼한 그도 한 가지 작은 실수를 저질렀다. 강연 원고를 책(·삼인·1999)에 수록할 때, 우리 모임 이름을 ‘베트남을 생각하는 젊은 문인들의 모임’이라고 적은 것이었다. 뭐, 그래도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날의 강연이 당당히 역사에 기록됐으니. 이 자리를 빌려 새삼 고인에게 존경의 뜻을 바친다.

를 읽은 학생들이 베트남 작가 응우옌 반 봉의 (친구·1986, 2006년 로 재출간)을 읽는 것은 통과의례 같은 일이었다. 그건 사이공의 여고생 응우옌 티 쩌우가 부패한 남베트남 정부에 맞서 싸우는 민주화운동을 그린 실록소설이었다. 광주의 그 5월 이후였으니, 가슴 떨리는 독서일 수밖에 없었다. 꿈속에서 나는 삐라를 숨긴 채 자전거를 타고 사이공 거리를 누비는 한 여학생을 만났다. 바람에 휘날리는 긴 생머리와 눈부시도록 하얀 아오자이, 그리고 페달을 밟을 때마다 휙휙 뒤로 지나가는 종려나무들. 그러다 그가 ‘사이공 동물원’에 끌려가 짐승처럼 잔혹한 고문을 당하는 장면에선 기어이 가위에 눌리고 말았다. 그래도 그는 놀라운 정신력으로 버텼고, 살아남아 다시 햇빛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다섯 번째 베트남 여행에서 마침내 그를 만났다. 쿵쾅쿵쾅, 음악이 요란하게 울려퍼지는 사이공강 유람선 위에서였다. 바람은 시원했고, 도시의 불빛 속에서도 남국의 밤하늘은 청명했다. 그의 실제 이름은 응우옌 티 쩌우. 여사라는 호칭이 자연스러운 나이가 된 그의 곁에서 삐쩍 마른 사내가 소년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그가 바로 저 악명 높은 꼰다오 감옥에서 살아 돌아온 전설의 전사임을 직감했다. 레 홍 뜨. 그는 그곳에서 무려 13년을 지낸 사람치곤 너무나 수줍은 얼굴이었다.

술자리에 홀로 남겨진 바오 닌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문제에 대한 생각을 물었을 때, 티 쩌우 여사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남편 레 홍 뜨가 대신 마이크를 잡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결국 조금은 실망스럽게, 그 역시 다른 베트남 지식인들처럼 “과거를 잊고 미래를 향해 함께 나아가자”고 교과서처럼 말했다. 물론 나는 속으로 안심했다. 만일 정색하며 사과를 요구했다면 어쨌을 것인가. 그때 거기 있던 ‘우리’가 과연 무슨 사과를, 어떻게 할 수 있었을 텐가.

을 읽은 청년들이 20세기의 마지막 10년에 읽은 두 편의 중요한 소설이 있다. 황석영의 과 바오 닌의 . 이전에 베트남전쟁을 다룬 우리 소설들은 대개 한국군의 정훈교본 같거나, 미국 할리우드 영화처럼 전쟁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귀환병을 그렸다. 은 달랐다. 그 작품은 전쟁이 할퀸 개인의 상흔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전쟁이 어떤 보이지 않는 구조로 작동되는지, 베트남 땅을 누빈 당대의 여러 주체들을 통해 입체적으로 그려 보였다. 그런 점에선 세계적으로도 드문 작품이었다. 황석영은 파월 청룡부대원이었다.

월맹군(북베트남군) 출신 바오 닌의 을 만난 것은 첫 번째 베트남 여행 때 사이공의 외국인 거리에서였다. 영어 판본을 불법 복제한 그 소설을 몇 장 읽지도 않아서 나는 감동을 넘어 꽤 큰 충격을 받았다. 무엇보다 밀림을 덮는 축축한 비를 묘사한 부분 때문이었는데, 주인공 끼엔은 내가 알던 북베트남군 병사가 전혀 아니었다. 그 인상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귀국 뒤에도 한동안 찢긴 낡은 방수포가 온몸을 축축하게 휘감는 혼곤한 꿈속을 헤매었다. 코끝에선 햇볕 하나 들어오지 않는 밀림 속 나뭇잎들이 썩는 냄새가 쉽게 떠나지 않았다. 나는 영어 중역판(박찬규 옮김·예담·1999)에 발문을 썼다. 거기서는 진실의 또 다른 면에 대해 말했다. 저 죽음 같은 밀림이 북베트남군 병사의 영혼에 어떤 상처와 고통을 안기는지. 공산주의자의 영혼이라니! 그래도 나는 그렇게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바오 닌을 한국에 초청했다. 이미 새천년이 시작된 뒤였다. 공항에서 그를 기다렸다. 그저 그랬을 뿐이었다. 그런데 훗날 그는 베트남어 원본 번역판(하재홍 옮김·아시아·2012) ‘작가의 말’에서 대뜸 내 이야기부터 꺼냈다. 내가 공항에서 자기를 기다려줘서 눈물이 핑 돌 만큼 고마웠다고 썼다. 세상에! 사실, 우리는 만나자마자, 밑도 끝도 없이, 마치 한 10년 하숙방을 함께 쓴 형제처럼 친해졌다. 술 때문이었을까. 그는 술을 좋아했고, 그 점에서는 우리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웬걸, 밤이 이슥해 함께 술을 마시던 동료들이 하나둘 소리도 없이 사라진 술자리를 지키는 건 어느덧 나와 한 후배밖에 없었다. 다음날 행사 때문에 우리도 일어서야 했다. 그동안 하노이 출신 여선생에게서 대충대충 배운 내 베트남어는 야수처럼 거친 그 월맹군 ‘하전사’에게 통할 리 없었다. 바오 닌, 우리 가야 해. 그래도 그는 알아차렸다. 갑자기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술집 생철 원탁에서는 다 식어버린 삼겹살과 파무침과 소주병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그는 혼자 숙소를 찾아갈 수 있노라 했다. 나와 후배는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몇 걸음이나 떼었을까. 뭔가 내 목덜미를 잡아당기는 기운이 있었다. 휙 돌아보자, 거기, 그가 서 있었다. 나는 그렇게 슬픈 인간의 눈을 본 적이 없었다. 다만 술기운 탓이었을까. 천만에, 나는 두고두고 후회했다. 우리 시대 가장 많은 인간의 사체를 본 작가를 일껏 초청해놓고, 그때 그곳, 모든 게 정신없이 빙빙 돌아가는 낯선 자본주의 한복판에 덩그러니 내버려두고 발길을 돌린 건 비난받아 마땅한 처사였다.

바오 닌, 그는 열일곱 살에 입대해 곧바로 B3전선에 투입됐다. 이후 줄곧 최전선에서 싸운 그는 1975년 4월30일 사이공의 Tan Son Nhat 공항을 탈환하는 마지막 전투도 치러냈다. 살아남은 그의 곁에 단 한 명의 동료만 남아 있었다. 전후, 그는 유해처리반 소속으로 베트남 산하에 널린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주검을 수습한 뒤 제대했다.

그는 문학이든 뭐든 써야 했다. 살아남으려면!

살아남기 위해 써내려간 작품들

반 레는 점잖은 사람이다. 그에게서 전쟁의 흔적을 엿보기는 쉽지 않지만, 그 역시 바오 닌처럼 청춘의 대부분을 밀림에서 보냈다. 그는 함께 입대한 병사 300여 명 중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행운’의 5명 중 하나였다. 그런 그도 인천공항은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는 비행기가 착륙하고 3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출국장 밖에 모습을 드러냈다. 관리들은 한때 적국이던 나라에서 온 검은 얼굴의 작가를 밀입국자인 양 대접했다. 그래도 서울에서 그의 표정은 내내 밝았다. 공식 일정이 다 끝나고 하루 말미가 남았을 때, 그는 쇼핑 대신 망월동에 데려다줄 것을 부탁했다. 동료들이 그를 광주로 데려갔다. 나중에 그는 ‘시인 김남주를 생각하며’라는 시를 썼다.

세월이 흘러, 베트남 작가들의 작품도 이제 몇 편 더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베트남판 (루쉰)라 할 중편소설 (남 까오), 전쟁 당시 각기 월맹군과 베트콩이던 두 여성작가 레 민 퀘와 자 응언의 단편들, 그리고 전쟁 이후 세대 작가로는 응우옌 옥 뜨의 (아시아·2017)를 추천한다. 앞으로는 우리 대학 베트남어과들에서도 번역 작업에 좀더 관심을 기울여주기를 고대한다.

마무리는 이제는 고인이 된 찜 짱 시인의 시 ‘수련꽃’(구수정 옮김)으로 하자. 벌써 몇 차례 소개했지만, 뭐 어떠랴. 내가 읽은 베트남은 이런 베트남이었으니.

이른 아침에 뜰에 나가 수련꽃을 땄네

폭탄 구덩이 아래 어머니가 심은 수련꽃

아아, 어디가 아프기에 물밑 바닥부터

잔물결이 끝도 없이 일렁이는가

참,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김현아의 (책갈피·2002)도 목록에 넣어야 한다. 구수정씨와 함께 현장을 누빈 초기의 경험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감히 용기가 없던 나는 그저 또 ‘추천의 글’을 보탰을 뿐이다.

김남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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