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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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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이 홀로 사라지지 않도록

<한겨레21>-여성가족부 공동기획 ‘젠더 폭력으로부터 안전한 사회’ 좌담

성폭력 사건 폭로와 2·3차 피해의 악순환 끊을 방법은 무엇인가
등록 2017-11-28 06:15 수정 2020-05-02 19:28
11월20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여성가족부 회의실에서 이은의 변호사, 정현백 장관, 김현진 작가, 이종혁 교수(왼쪽부터)가 ‘젠더 폭력으로부터 안전한 사회’에 대해 긴급 좌담회를 열었다.

11월20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여성가족부 회의실에서 이은의 변호사, 정현백 장관, 김현진 작가, 이종혁 교수(왼쪽부터)가 ‘젠더 폭력으로부터 안전한 사회’에 대해 긴급 좌담회를 열었다.

“한국에는 왜 하비 와인스타인이 없을까요?”(이종혁 광운대 교수)

“성폭력 피해 경험을 고발하고 공론화한 피해자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신뢰도 경험도 없거든요.”(이은의 변호사)

“한국에도 작은 하비 와인스타인이 많은데 말이에요.”(김현진 작가)

11월20일 오후 4시30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17층 여성가족부 회의실. 최근 한국 사회는 가구기업 ‘한샘’과 한림대 산하 성심병원 등에서 불거진 직장 내 성폭력·성희롱 문제로 뜨럽게 달아올랐다. 과 여성가족부는 직장 내 성폭력·성희롱 문제와 최근 급증하는 사이버 성범죄 등 각종 젠더 폭력의 양상에 대한 대책을 논하기 위해 ‘젠더 폭력으로부터 안전한 사회’라는 이름의 긴급 좌담회를 마련했다.

한샘, 성심병원… ‘젠더 폭력’과 이별을!

좌담에는 11월25일~12월1일 ‘2017 성폭력·가정폭력 추방 주간’을 운영하는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 최근 기승을 부리는 몰래카메라 범죄를 막기 위한 몰카 방지 캠페인 ‘빨간원 프로젝트’를 고안하고 흥행시킨 이종혁 광운대 교수(미디어영상학·공공소통연구소장), 삼성전기 성희롱 사건 피해자에서 변호사로 커리어를 전환해 ‘피해자 승리’ 서사의 주인공이 된 이은의 변호사, 여성혐오·성폭력·가정폭력 등을 겪어온 두 여성의 카카오톡 대화로 ‘여혐 시대’를 그려낸 세태소설 를 쓴 작가 김현진이 참여했다.

이번 좌담에서 자주 입길에 오른 이는 등을 만든 미국 할리우드의 거물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이었다. 그는 지난 10월 가 영화배우 앤젤리나 졸리, 귀네스 팰트로 등과 인터뷰해 와인스타인의 성추행 의혹을 보도하면서 ‘거물 성추행범’이 됐다. 미국 여성들은 ‘나도 그랬어’라는 의미의 ‘미,투 해시태그’(#Me,too) 운동을 벌이며 더 많은 가해자를 세상 밖으로 끌어냈다. 가해자들은 추락했다.

한국은 어떨까. 한국에서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 문제가 드러나는 과정은 다르다. 한샘의 경우를 보자. 일단 여성이 용기를 내 공론화하는 것도 어렵지만, 곳곳이 가시밭길이다. 성폭력 피해자인 여성은 사건이 벌어진 뒤 회사와 수사기관 등에서 2차 피해를 입었다. 이 사실을 재폭로하면서 피해자의 상처는 두 배, 세 배로 깊어지고 사건은 곁가지를 치며 복잡해진다. 가해자는 많아지고, 피해자는 누더기가 된다. 성심병원 문제도 성별 위계가 일상화된 병원 내에선 문제제기가 수용될 수 없었다. 이 사실은 시민단체를 통한 은밀한 제보로 외부에 알려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11월21일 국무회의에서 “직장 내 성희롱, 성폭력이 있어서도 안 되지만 피해자가 2차 피해를 겁내 문제제기를 못하는 건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피해자가 두려움 없이 고충을 말할 수 있고 적절한 대응이 이뤄지는 직장 내부 시스템과 문화 정착 △기관장 인식 전환을 위한 조치 마련, 기관장 책임 강화 등을 강조했다.

절망에 몰려 폭로하다
김현진 작가

김현진 작가

지난여름,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젠더 폭력이 뭔지 모른다’고 고백한 뒤 관련 주제를 이야기할 때 일단 이게 뭔지 이야기하고 시작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다. (웃음) 먼저 용어 정의부터 해보자.

김현진 솔직히 검사 생활 15년, 정치인 생활 20년을 한 사람이 그걸 모른다고 질문한 사실 자체가 나에겐 또 하나의 폭력이었다. 젠더는 사회적으로 부여된 성별이다. 극단적 남성성과 극단적 여성성 사이에 여러 성별이 있다. 그 가운데 굳이 따지면 여성은 세상에서 가장 수가 많은 ‘소수자’다. 세상의 절반이 당하는 일을 모른다니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이종혁 일상에 너무 깊이 스며들어 있어 폭력으로 자각하기 쉽지 않은 게 젠더 폭력의 특징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반복돼 일상이 되고 일반화되다보니 폭력인 줄 모르고, 신고도 안 하고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 그래서 가장 무서운 사회적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정현백 정리하면, 성별 권력 구조가 작동해서 발생하는 폭력이다. 물리적 폭력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인종차별주의 같은 구조적 폭력, 잠재적 폭력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1970년대 말 유학 가기 전 중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아주 추운 겨울이었고, 난방도 잘 안 됐다. 바지를 입고 학교에 갔다가 선배 교사로부터 지적당했다. “치마를 입어야죠.” ‘여성이기 때문에 ~을 해야 한다’, 이런 것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공기처럼 일상화된 젠더 폭력이 드러나는 방식이 대체로 ‘폭로’를 통해서다. 최근 들어 젠더 폭력이 수면 위로 많이 드러나는 이유는 뭘까.

이은의 하루 두세 건 정도 꾸준히 법률 상담이 들어온다. 요즘 질문의 트렌드는 ‘이거 회사에 이야기해도 될까요’다. 말하는 당사자는 오히려 ‘꽃뱀’ 등으로 낙인찍힐 거라는 두려움을 갖는다. 현재 직장에서 성폭력·성희롱 문제가 다뤄지는 방식 때문이다. 모든 문제는 법에 의해 범죄로 기소될 수 없다. 법이란 건 최소한의 규율이다. 법으로 모든 것을 규율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그게 잘못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런데 기업들은 법원과 수사기관만 바라본다. 피해자가 ‘형사 고소했다’고 하면 기업은 ‘수사기관의 결과를 지켜본 뒤 처리한다’고 한다. 증거불충분으로 기소되지 않으면 징계를 안 한다. 피해자는 가해자와 계속 같이 일하게 된다. 가해자는 피해자에 대해 나쁜 이야기를 한다. 결국 피해자가 떠난다. 수사기관에서도 직장에서도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으니, 사적 보복으로 절망의 상태로 몰려 온라인 등에 폭로하게 된다. 이 폭로로 피해자는 이후 사법절차에서 더 불리해질 공산이 큰데도 일단 쓰고 본다.

정현백 사회적으로 해석할 만한 지점도 있다. 지난 촛불 광장에서 시민들은 부패한 정부, 권위주의 정부를 축출해야 한다는 이슈로 모였다. 이에 그치지 않았다. 이번 촛불에선 ‘정치적 민주주의’ 완성 다음 단계로 ‘일상의 민주주의’ 달성을 위한 문제제기가 함께 이뤄졌다. 그 과정에서 여성의 권리를 이야기하는 ‘페미당당’ 같은 연대체도 생겼다. 새롭게 등장한 정부가 성평등을 기본 가치로 표방하니까 ‘이제는 말하면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치가 폭로에 반영되는 지점도 있을 것 같다.

이종혁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물리적 채널이 굉장히 많이 열렸다. 언론이 주목하는 극단적 사건과 사고가 아니더라도 내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의견, 내가 겪는 사건·사고를 분출한다.

피해 여성 1~2년 뒤 해고하면?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

직장 내 성폭력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정현백 우선 한샘 등 직장 내 성희롱 문제가 불거지면서 여성가족부가 고용노동부와 함께 11월14일 대책을 발표했다. 내년부터 근로감독에 직장 내 성희롱 발생시 사업자 조치 부문, 성희롱 예방교육 실시 등 성희롱 분야를 반드시 포함하도록 했다. 중요한 것은 근로감독관 본인의 성인지 교육이다. 지금은 근로감독관들이 주로 체불임금 문제 등을 다룬다. 성인지 교육이 별도로 필요하고, 이 부분은 여성가족부가 할 예정이다.

김현진 성희롱·성폭력 가해자가 강력한 처벌을 당하는 경험이 매우 중요하다. 그동안은 누가 누굴 건드려도 누구는 그대로 회사생활을 잘한다. 피해자만 적응하지 못하고 구설에 오르내린다. ‘꼬리쳤다’ ‘까칠하다’ 이런 말은 물론이고 제때 문제제기를 하지 않으면 ‘왜 늦게 이야기했냐’ ‘왜 당시에 당당하게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냐’는 비난까지 듣는다. 피해 여성의 거의 모든 것이 비난의 빌미가 된다. 가해자가 성희롱·성폭행으로 직장에서 아웃되는 선행 사례가 자꾸 나와야 한다.

이은의 현업에서 일하다보면 피해자 지원 조치가 좀더 섬세해야 할 것 같다.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은 굉장히 불공정한 게임처럼 진행된다. 피해자가 신고할 때, 피해자는 아무런 법적 상식이 없다. 혼란스럽고 불안한 상황에서 신고한다. 고소 고지를 받은 가해자는 조사받을 때 각종 법적 자문을 다 거치고 온다. 자기에게 불리한 얘기는 싹 뺀다. 피해 사실이 있을 때, 신고 전 단계부터 연계기관을 통해 법률 지원을 받는 서비스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 현재 ‘남녀 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남녀고용평등법)에서 피해자에게 불리한 조치를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불리한 조치의 상당 부분이 인사재량권이라는 이름으로 허용되기도 한다. 결국 인사재량권 해석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인사재량권의 범위를 좁혀 피해 여성이 실질적으로 회사에서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정현백 이은의 변호사가 말한 대로, 1~2년 지난 뒤 피해 여성을 해고하거나 교묘하게 불이익을 주는 일이 발생한다. 이 점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최소 3년간 피해자 조치를 보고하는 시스템 등을 정착시키는 게 필요할 것 같다. 시스템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공공부문 규제다. 일단 사업장별로 사이버신고센터를 구축해 운영토록 할 계획이다. 공공부문에서 우선 시행해 문화를 만들어 민간부문이 따라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정부 ‘리벤지 포르노’ 삭제 지원한다
이종혁 광운대 교수

이종혁 광운대 교수

최근 남녀고용평등법이 개정됐다. 성희롱 피해자에게 불리한 조치를 금지하는 조항을 어기면 3년 이하 징역, 2천만원 이하 벌금에서 3천만원까지 벌금이 오르는 선에서 개정됐다.

이은의 여전히 너무나 부족하다. 기업에 3천만원 벌금이 클까. 전혀 안 크다. 근데 대한민국 법원에서 벌금의 최대치가 3천만원이다. 그리고 징역형은 잘 안 나온다. 세월은 흘러 물가는 올랐는데 벌금은 그대로다. 기업에 대한 벌금이나 과태료는 개인에 대한 벌금이나 과태료와는 부과 수준이 달라야 한다. 벌금, 과태료를 넘어서서 지원금을 줄이고 세제 혜택을 줄이는 등 각종 경제적 불이익이 강화돼야 기업이 좀더 따라올 것이다.

최근 헤어진 연인에게 복수하려는 목적으로 유포하는 보복성 성적 영상물이나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불법촬영(몰래카메라) 등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불법촬영죄가 2013년 4823건, 2014년 6623건, 2015년 7623건으로 매년 늘고 있다.

이종혁 온라인 커뮤니케이션 채널의 확장이 오히려 왜곡된 젠더 인식이 확산되는 채널로 활용되고 있다. 청소년기부터 왜곡된 성별 고정관념이 넘쳐나는 영상, 성을 대상화한 영상 등에 노출될 가능성이 커졌다. 디지털 성범죄의 특성은 범죄 증가 속도가 가장 빠르다는 것, 또 의외성이 많은 범죄라는 것이다. 의외성이 많다는 건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사람이 범인인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사건·사고를 검색하면 교육자와 공직자가 범인인 경우도 많고,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도 지하철·공공화장실뿐 아니라 개인 사무공간, 연구실에서도 많이 일어난다.

김현진 최근 헤어진 연인이나 괴롭히고 싶은 사람의 사진을 보내면 그 사람 사진을 3만~5만원 정도 받고 나체 사진이랑 합성해주는 끔찍한 사업도 있더라.

정현백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을 인식해 지난 9월 14개 정부 부처가 합동으로 디지털 성범죄 피해 방지 대책을 마련했다. 일단 보복성 성적 영상물(리벤지 포르노)을 유포할 때는 무조건 징역형으로 처벌한다. 또 이런 불법 영상물 피해자에게 정부가 직접 삭제를 지원할 예정이다. 피해자의 불법 영상물이 바로 삭제될 수 있도록 긴급삭제를 지원하고 방송통신심의위원회와 연계해 사후 모니터링도 할 예정이다. 이와 관련해 내년 예산안도 7억4천만원을 확보했다.

이종혁 치료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수술을 하는 것과, 생활습관을 바꾸는 것. 법을 강화하고 제도를 만드는 것이 외과적 치료라면, 공공캠페인은 식이습관을 바꾸고 운동해서 생활습관을 바꾸는 것이다. 불법촬영과 관련해서 지난 9월 경기남부지방경찰청과 ‘빨간 원 프로젝트’를 고안했다. 각자 자기 스마트폰 카메라 둘레에 ‘불법촬영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빨간 원 스티커를 붙이는 캠페인이다. 스티커 초기 물량 6만 개는 소진됐고, 10만 장을 추가 제작했다. ‘너도 그랬지’ ‘나도 그렇다’는 미투 캠페인을 통해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처럼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모르는 몰래카메라 범죄도 ‘나는 안 할게’ ‘나도 안 할게’라고 서로 신호를 주고받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빨간 스티커는 그런 신호다.

정현백 ‘디지털 리터러시’라는 디지털 이해 교육이 필요하다. 어린이의 성인권 교육에 디지털 이해 교육도 포함해야 할 것 같다. 어린이들이 합성해서 인터넷에 올리는 일이 엄청난 범죄라는 걸 알지 못하고 장난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성평등 문화 확산 등 다양한 캠페인도 필요하다.

피해 폭로자를 위하여
이은의 변호사

이은의 변호사

여성이 피해자고 남성이 가해자인 구조를 바꿀 방법은 뭘까.

이은의 지금 모든 영역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문을 여는 열쇠를 가진 사람은 대부분 남성이다. 문학계를 예로 들면, 각종 문학상의 심사위원 다수는 남성이고 여성은 구색 맞추기 식으로 끼워져 있다. 이 열쇠를 더 많은 여성의 손에 들려줘야 한다.

김현진 더 많이 알려져야 한다. 대부분의 성폭행은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난다. 미국에서 1980년대에 여성단체 미즈가 ‘친밀한 관계에서의 성폭력 실태 조사’를 한 책 라는 책이 국내에는 2015년 번역 출간됐다. 우리는 모른다. 그게 강간인지, 성폭력인지 모르고 당한 뒤 혼자 자괴감에 빠졌다가 공적 공간에서 사라진다.

이은의 피해자가 싸우다 지쳐 사라졌다가 아니라, 피해자가 싸웠는데 더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 여성가족부가 사건·사고를 폭로하고 고발한 피해자를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더 많이 고민했으면 좋겠다.

진행·정리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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