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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노동’ 없이 ‘좋은 영화’ 없다

<아버지의 전쟁> 스태프·배우 임금체불 소송… 영화 현장 노동권 여전히 ‘깜깜’
등록 2017-07-26 07:46 수정 2020-05-02 19:28
영화 <아버지의 전쟁> 제작진이 7월18일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영화 제작사·투자사에 ‘체불임금 지급’ ‘근로계약 체결, 4대보험 지급’ 등을 요구했다. 류우종 기자

영화 <아버지의 전쟁> 제작진이 7월18일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영화 제작사·투자사에 ‘체불임금 지급’ ‘근로계약 체결, 4대보험 지급’ 등을 요구했다. 류우종 기자

“영화 한 편이 만들어지는 건 명망 있는 감독, 유명 배우 때문만은 아닙니다. (영화를 만드는 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카메라를 옮기고, 조명기를 설치하고, 촬영 장소를 발에 땀이 나도록 돌아다니고, 연신 머리를 조아리고, 점심 메뉴 뭐 괜찮은 게 있는지 고민하고, 졸린 눈 비벼가며 운전대를 잡는 일입니다….”

안병호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위원장이 ‘빛나지 않는’ 영화 노동에 대해 말을 이어갔다. 7월18일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 앞. 그 말이 흐르는 현장에 영화 제작을 위해 묵묵히 일한 스태프 9명이 서 있다. 그들은 “제작사 무비엔진과 투자사 우성엔터테인먼트는 스태프 및 배우들의 임금체불 문제를 즉시 해결하라”고 쓰인 펼침막과 함께였다.

갑작스런 영화 촬영 중단 통보

제작진과 배우 43명은 7월20일, 투자사 우성엔터테인먼트를 상대로 제작사 무비엔진을 대위해 체불임금 및 장비 사용료 2억4천여만원을 지급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은 1989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의문사한 김훈 중위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다. 임성찬 감독은 2011년 12월 무비엔진과 각본·감독 계약을 맺고 5년간 기획·개발 단계를 거쳐 2017년 2월23일 배우 한석규를 주연으로 캐스팅해 촬영을 시작했다. 그런데 23회까지 이어진 촬영이 갑자기 중단됐다. 4월13일 스태프들은 부산에서 1회 촬영을 남긴 상태로 ‘철수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투자사가 이날 제작비 지급 중단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연출팀 막내 정민영(27·가명)씨는 지난해 3월 부산에서 올라와 영화 현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이번이 세 번째 작품이다. 앞선 영화와 웹드라마 한 편도 촬영이 엎어졌다. 그때마다 임금을 제대로 챙겨 받지 못했다. 표준근로계약서를 쓴 적도 없다. 촬영팀에 합류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군 의문사’를 파헤치는 인권영화지만 그의 노동권은 관심 밖의 일이었다.

하루 8시간 근무나 초과근무수당은 바란 적도 없다. ‘프리프로덕션’(제작 준비) 기간에는 오전 10시에 출근해 밤 9~10시까지 일했다. 일찍 끝나는 날이 저녁 8시였다. 본격 촬영에 들어가자 첫 작업부터 밤샘이었다. ‘데이(DAY) 촬영’(낮 촬영)에는 아침 7시 서울 신림동 집에서 나와 촬영 현장에 도착해 모니터 설치·연결 등 준비 작업을 했다. 특수효과 촬영 준비도 그의 몫이었다. 하루하루 전쟁같이 보내고 그가 손에 쥔 돈은 한 달 160만원이었다. 최저임금은 배부른 소리다. 특별히 불만도 없었다. “영화를 전공했고 영화를 좋아해 현장에 왔다. 여기는 다 그런 사람들이다.”

은 정씨처럼 ‘영화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기댄 영화였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인권영화 투자자를 찾기 어려웠다. 어렵게 만난 중소 투자사 우성엔터테인먼트는 투자금 30억원을 제시했다. 제작사·투자사는 해당 금액으로 완성도 있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포부’ 아래 촬영 스태프의 노동권부터 희생시켰다. 제작사 무비엔진은 ‘영화산업 노사임금 및 단체협약’에 따라 표준근로계약서를 체결해야 하지만 이를 지키지 않았다. 노조법을 위반하면서 영화 촬영을 계획한 셈이다. 제작사는 “궁여지책이었다. 촬영 스태프에게 계약 당시 ‘너무 죄송하지만 예산 문제 때문에 도급계약으로 진행하자’고 양해를 구했다”고 했다. 투자사는 제작사에 책임을 떠넘겼다. “우리 책무는 솔직히 투자금을 제시하고 ‘이 금액으로 찍을 수 있느냐’고 묻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표준근로계약서를 쓰는 게 좋지 않겠냐’고도 권유했다. 우리에게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지만 제작사의 선택이었다.”

‘도급계약’ 빈번한 영화 제작 현장

근로계약서는 ‘좋은 노동’을 담보한다. 영화·드라마 아트디렉터(미술팀 스태프)로 일해온 강동훈씨가 말했다. “표준근로계약서를 쓰느냐 쓰지 않느냐가 현장 분위기를 담보한다. 표준근로계약서에는 1일 8시간, 일주일 40시간이 원칙이고, 1일 노동시간은 12시간까지 할 수 있도록 한다. 일단 계약서를 쓴 현장은 초과노동을 하더라도 몇 시간 넘겨 일하는 수준이지 밤샘 촬영을 예고 없이 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강씨는 에서 평소의 절반 수준 임금으로 도급계약을 했다. “감독님이 오랫동안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어 안타까웠다. 좋은 영화를 만드는 일이라기에, 또 함께 일하는 미술감독님 때문에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근로계약서는 ‘안전판’이다. 도급계약서를 쓴 제작 스태프는 모두 노동자가 아니라 ‘사업자’다. 이들은 고용노동부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 ‘노동자성’을 인정받으려면 지난한 법정 다툼을 벌여야 한다. 영화계는 2011년 표준근로계약서를 도입했다. 2014년에는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면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표준보수지침을 마련하고 이를 준수하도록 했다.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은 매년 한국영화제작가협회 등과 임금협약을 체결한다. 제도적 장치가 많아도 현장에서는 여전히 도급계약이 빈번해 스태프는 노동자가 아니게 된다.

촬영 중단에는 복잡한 사정이 숨어 있다. 제작사와 투자사의 갈등은 결이 다양해 보였다. 고 김훈 중위 유족을 설득하는 데 실패해 결국 유족이 ‘촬영 및 상영 금지 가처분 소송’을 제기했다. 합의된 촬영 회차 위반 및 제작비 과다 집행, 투자사의 감독 교체 요구 등 여러 쟁점이 있다. 제작사·투자사는 표면적으로 ‘촬영 스태프와 단역 배우들의 체불임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다만 그 책임을 서로 떠넘기고 있다.

“우리는 철저하게 ‘을’이다”

23회차 촬영 기간에 집행된 제작비는 22억8400만원이다. 정민영씨는 “소속사가 든든한, 인지도 있는 배우들의 출연료는 지급된 걸로 안다. 그런데 단역 배우들은 계약서조차 쓰지 않았다. 우리 같은 프리랜서 촬영 스태프는 철저하게 ‘을’이다. 똑같이 영화 만드는 사람들인데 왜 다른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속상하다”고 말했다.

정씨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은 암흑이다. 사진 위로 ‘밤은 언제 끝나니’가 쓰여 있다. 이전 프로필 사진은 스태프와 찍은 것이었다. 영화감독이 꿈인 그는 8월 새 영화 현장에서 일하기로 구두계약했다. 다음 영화는 성공적으로 촬영을 마칠 수 있을까. 당당히 노동자로서 급여를 받을 수 있을까. 그는 아직 어둠 속에 있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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