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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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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원전의 신호탄

문재인 대통령, 고리 1호기 폐쇄와 신규 원전 건설계획 백지화 천명

재생에너지 잠재량 높아 독일보다 탈핵 더 유리한 환경
등록 2017-06-27 12:01 수정 2020-05-02 19:28
문재인 대통령이 6월19일 부산 기장군 고리 1호기 영구 정지 선포식에서 아이들과 함께 정지 버튼을 누르는 행사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6월19일 부산 기장군 고리 1호기 영구 정지 선포식에서 아이들과 함께 정지 버튼을 누르는 행사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우리나라 제1호 원자력발전소(원전)가 문을 닫았다. 1977년 6월19일 처음 핵분열이 일어나면서 방사선과 열을 뿜어내던 고리 1호기(부산 기장군 장안읍)가 40년 만에 가동을 멈추고 2017년 6월18일 자정을 기해 영구 정지됐다. 이 땅에서 고리 1호기는 지난 40년간 유지된 원전 중심 에너지 정책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이번 폐쇄를 계기로 고리 1호기는 탈원전의 상징이 됐다.

“탈핵 시대로 가겠다”

문재인 대통령은 6월19일 오전 ‘고리원전 1호기 영구정지 기념식’에 참석해 “원전 중심의 발전 정책을 폐기하고 탈핵 시대로 가겠다”고 천명했다. 그와 함께 △준비 중인 신규 원전 건설 계획의 전면 백지화 △원전 설계 수명의 연장 금지 및 월성 1호기 폐쇄 △신고리 5·6호기의 안전성·공정률·투입비용·보상비용·전력설비 예비율 등을 종합 고려한 사회적 합의 도출 △원자력안전위원회의 대통령직속위원회로 승격 및 다양성·대표성·독립성 강화 △탈핵 로드맵의 조속한 마련 △친환경 에너지 세제 합리적 정비 △에너지 고소비 산업구조 효율화 및 산업용 전기요금 재편 등의 정책 방향을 내놓았다.

기념사에서 한국의 에너지 정책을 탈핵·탈원전 쪽으로 전환하겠다는 명확한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고리 1호기 폐쇄와 함께 수명연장 처분 위법 판결을 받은 월성 1호기 폐쇄도 시간문제가 됐다.

고리 1호기(발전용량 587MW)는 1977년 6월19일 처음 ‘임계’(원자로에서 핵분열 연쇄반응이 시작되는 것을 뜻함. 이 과정에서 막대한 열에너지가 발생해 발전이 이뤄짐)에 도달했다. 이듬해인 1978년 국내 총전기생산량의 7.4%(2324GWh), 1979년 8.9%(3152GWh), 1980년 9.3% (3477GWh), 1981년 7.2%(2897GWh) 1982년 8.8%(3777GWh) 등을 기록했다. 월성 1호기가 본격 가동되는 1983년까지 대한민국 발전량의 7~9%를 꾸준히 담당해온 것이다.

2011년 일본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원전 참사 뒤 고리 1호기는 원전 ‘불안전’의 대명사가 됐다. 고리 1호기는 미국의 웨스팅하우스사가 건설해준 원전을 넘겨받아 국내에서 처음 가동한 원전이다. 그러다보니 초기 운전에서 문제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25기 전체 원전 고장 사고의 약 20%가 고리 1호기에서 발생했다. 사고는 가동 초기에 집중됐다.

가동 1년 만에 핵연료를 담은 핵심 설비인 원자로 압력 용기가 수명 말기처럼 취약해졌다는 시험 결과가 나왔다. 또 다른 핵심 설비인 증기발생기는 계속 문제를 일으켜 30년 설계 수명을 채우지 못하고 가동 20년 만에 교체됐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1년 만인 2012년 3월에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때와 같은 ‘전원 상실’ 사고가 발생했다. 그렇지만 운영업체인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은 한 달간 사고를 은폐했다.

단위면적당 원전설비 세계 최고

유엔과학위원회의 2000년 ‘방사능 피폭 보고서’(United Nations Scientific Committee on the Effects of Atomic Radiation Vol 1 UNSCEAR 2000)와 한수원의 제출 자료를 통해 고리 1~4호기의 1993년 기체 요오드 131의 배출량이 13.2기가베크렐(GBq)으로, 미국·일본·스위스 등 선진국에 비해 최대 1300만 배 이상 높은 사실도 확인됐다. 1990~1997년 전세계를 통틀어 가장 높은 수치다. 요오드 131은 갑상샘암 발생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방사성물질이다. 1993년 고리 1~2호기의 기체 요오드 131 배출량은 울진원전(현 한울원전) 1·2호기보다 3천 배 높다.

고리 1호기 건설 뒤 정부는 급속한 경제성장을 떠받치기 위해 원전을 계속 증설해갔다. 2016년 말 현재 가동 중인 25기(2만3116MW)의 원자로가 매년 16만2176GWh 전기를 생산하고 있다. 이는 국내 전체 발전량의 30.7%를 차지한다. 2016년 고리 1호기의 발전량(4772GWh)은 원전 발전량의 2.9%, 총발전량의 0.9%에 해당한다.

원전뿐만 아니라 석탄·가스 발전 등 발전설비가 대폭 증가해 한국의 총발전량은 대폭 늘었다. 1978년 총발전설비가 6916MW였지만, 2017년 6월 현재 10만9493MW로 대폭 늘었다. 전체 에너지 생산에서 원전의 비중은 1987년 9기 53.1%(3만9314GWh)로 최고점을 기록한 뒤 점차 낮아지고 있다. 한국의 단위면적당 발전설비와 원전설비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전력의 안정적 수급을 위해 어떤 발전소를 언제, 어디에 건설할지는 산업통상자원부가 2년마다 갱신하는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담겨 있다. 이 계획에서 원전은 기본값으로 제시돼 있다. ‘정책 전원’이라는 이름으로 정부가 언제, 어디에 몇 기를 지을지 정한다. 현재 가동 중인 원전 25기는 전적으로 정부가 결정해 운영해왔다.

한국은 발전설비가 단위면적당 세계 최고 수준이면서 1인당 전력소비량 역시 경제 수준에 견줘 높다. 2015년 기준 전력의 55%를 산업부문, 그중 93.9%가 제조업에서 소비한다. 이 가운데 40.8%가 석유화학과 1차 금속 등 ‘에너지 다소비 산업’에서 소비된다. 이들 산업의 부가가치 생산 비중은 30%가 되지 못한다. 싼 전기요금을 기반으로 하는 국가 경쟁력은 오래 유지되기 어렵다. 에너지 다소비 산업의 비중이 줄어들면서 산업용 전기 소비는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제조업 공장에서 사용되는 전기 소비의 절반가량은 전기의 ‘열소비’다. 전통적 발전 방식은 석탄, 석유, 가스, 원자력의 핵분열을 이용해 물을 끓여서 얻은 증기로 터빈을 돌려 전기를 얻는 것이다. 이때 열에너지의 40% 정도만 전기로 전환된다. 이렇게 생산된 전기를 다시 물을 끓이는 등 열소비에 사용한다는 것은 매우 비효율적이다. 산업용 전기요금이 석탄·가스·석유 등 1차 에너지보다 싸게 책정돼 있어 비정상적인 에너지요금 체계 때문에 발생한 비정상적인 전기 소비다. 2015년 현재 가정용 전기 소비는 13.2%밖에 되지 않는다. 산업용 전기 소비는 줄어들고 가정용 전기 소비는 늘어나면서 전체 전기 소비는 정체 또는 감소될 것으로 전망된다.

지을수록 낭비인 발전소

국제환경운동단체 그린피스가 6월18일 새벽 고리 1호기 벽면에 ‘잘 가라 고리 1호기’라는 글씨를 레이저로 쏘고 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국제환경운동단체 그린피스가 6월18일 새벽 고리 1호기 벽면에 ‘잘 가라 고리 1호기’라는 글씨를 레이저로 쏘고 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전기 소비가 둔화되면 이제 한국에서 더 이상 신규 원전과 석탄발전소를 지을 필요가 없어진다. 발전설비가 너무 많아 가스 발전설비 가동률이 2015년 현재 32%밖에 되지 않았다. 발전소를 많이 짓는 것은 낭비다. 가동하지 않아도 지급되는 발전소 용량요금이 2015년 4조8천억원을 기록했다. 발전설비가 늘면서 용량요금도 늘어나고 있다.

일본·한국·독일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가운데 2016년 기준으로 에너지 순수입량이 많은 1위, 3위, 4위 국가다. 한국은 일본과 독일보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낮으면서 1인당 전기 소비가 높다. 독일은 한국보다 에너지 순수입량이 많았지만 국산 에너지인 재생 가능 에너지 비율을 높이면서 에너지 순수입량이 한국보다 적어졌다.

전력 수급을 고려해도 더 이상 신규 원전 설비가 필요하지 않다. 2030년까지 월성 1호기를 포함해 수명이 마감되는 11기의 원전을 폐쇄해도 발전설비는 여유가 있다. 대통령의 6월19일 선언으로 준비 중인 6기의 신규 원전 계획은 백지화되었다. 문제는 건설 중인 원전 5기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2016년 6월23일 건설 허가를 시작해서 공정률 10% 정도인 신고리 5·6호기 건설을 중단하겠다고 공약했다. 하지만 지난 기념사에선 명백한 언급 없이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겠다고만 말해 실망했다는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문 대통령이 말한 사회적 합의란 탈원전 속도와 ‘원전 제로’ 시점을 염두에 둔 건설 중인 원전 취소 계획과 그에 따른 사회적 부담에 대한 논의다.

한국은 지난 40년간 이어진 정부의 일방적 원전 확대 정책으로 세계에서 가장 원전이 밀집한 국가가 됐다. 탈원전을 논의하는 사회적 합의는 이렇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시작될 수는 없다. 건설 중인 원전 중단은 사회적 합의를 위한 최소한의 사전 조치다. 일단 건설 중인 원전 공사를 멈추고 추가 비용 투입을 중단해야 한다.

중장기 계획으로 석탄, 원전 줄여야

2001년 독일이 탈핵을 결심할 때 전체 에너지 가운데 원전 비율은 현재 한국과 같은 30%였다. 15년간의 탈핵 로드맵을 통해 2016년 원전 비율이 13%로 줄어들었다. 50%이던 석탄발전 비중 역시 40%로 줄었다. 2001년 6.6%이던 재생 가능 에너지 비율은 29%로 늘었다.

한국도 20년가량 중장기 계획을 세워 석탄과 원전을 줄이면서 재생 가능 에너지 비율을 늘려나가면 된다. 독일보다 재생에너지 잠재량이 높고(2016년 태양에너지의 기술적 잠재량 7451GW) 사회적 환경이 더 좋은 한국은 재생에너지 확대에 더 유리하다. 더 빨리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양이원영 환경운동연합 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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