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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한 압류’ 이제 그만!

건강보험료 체납 이유로 고통받는 116만 저소득 가구

민간 연구소, 실태조사와 개선안 내놔… 정부 대책은?
등록 2017-02-07 08:42 수정 2020-05-02 19:28
1월17일 서울 여의도동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건강보험 체납 문제 해결을 위한 제도 개선 토론회’. 정용일 기자

1월17일 서울 여의도동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건강보험 체납 문제 해결을 위한 제도 개선 토론회’. 정용일 기자

“건강보험료 체납 상태에서 병원을 이용하면 부당이익금을 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계속 보험료를 못 내면 독촉장이 나온다는 말을 들었어요. 독촉장까지 받고 싶지 않아서 병원에 안 가요. 병원에 다니고 싶어서 한 달 급여 80만원 받으며 4대보험 되는 직장을 다녀요. 그런데 체납 보험료를 다 못 내면 병원을 이용할 수 없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병원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다는 건데….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생지옥’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말로만 듣던 복지 사각지대가 이런 거구나 싶어요. 왜 해결이 안 되는지 궁금해요.”(김아무개씨·여성)

1월17일 서울 여의도동 국회 의원회관. ‘건강보험 체납 문제 해결을 위한 제도 개선 토론회’가 열렸다. 권미혁 의원실(더불어민주당)과 건강세상네트워크·시민건강증진연구소·주빌리은행이 주최했고, 아름다운재단이 지원했다. 토론회 들머리, 체납 보험료로 고통받는 시민들의 증언이 있었다.

은 2016년 7월부터 생계형 건보료 체납 문제의 심각성을 고발하고 피해자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전하는 기사를 연재해 제도 개선을 촉구했다(제1120호 표지이야기 ‘비정한 압류’ 참조).

“우리들에겐 ‘생지옥’이에요”

이날 토론회에서 시민건강증진연구소는 생계형 건보료 체납 실태조사와 제도 개선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 기간은 2016년 4월부터 2017년 1월까지다. 먼저 주목할 지점은 생계형 건보료 체납자 통계가 이전 연구보다 정확하게 분석됐다는 것이다.

2015년 12월까지 누적 현황을 보면, 대표 납부 의무자 기준으로 6회 이상 건보료를 체납한 경우가 216만 가구(가구원 수 적용시 405만명, 체납액 3조457억원)로 나타났다. 이전 조사·연구에서는 150만 가구 안팎으로 추정된 바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체납 통계를 산출하면서 지역가입자 자격이 상실된 경우는 제외해왔기 때문에 수치의 차이가 있다. 216만 가구 가운데 한 달 보험료가 5만원 이하인 저소득층은 116만 가구(57%)에 이른다.

전체 연령층에서 0~19살 미성년자가 4709명이나 됐다. 25살까지 연령층을 늘리면 체납자는 4만7천 명을 훌쩍 넘어선다. 부모의 학대로 사회복지시설에서 지내는 10살 초등학생한테 체납 보험료 독촉 고지서를 집요하게 보낸 사례도 있다(제1122호 ‘초등생한테 19번 독촉장’ 참조). 소득이 없는데도 건보료를 부과하는 제도와 무감각한 운용 탓이다. 이 부분에 대한 제도 개선이 절실하다.

토론회에 참석한 국민건강보험공단 징수팀 김후식 부장은 “체납자 보험료 징수를 무작위적·악의적으로 하지 않는다. 체납 처분은 공단의 책무이다. 자립 능력이 없는 미성년자의 경우 내부적으로 납부 의무 면제는 아니지만 독촉 고지를 하지 않고 추후에 결손처분하는 제도를 보건복지부와 협의해서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보험료 체납이 지속되는데 제도적으로 방치되는 문제점도 지적됐다. 소득·일자리가 불안정하다보니 건보료를 체납하고 그 결과 병원을 이용하지 못해 건강이 더욱 나빠지면서 취업에 제한을 받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건보료 체납으로 통장마저 압류되는 사례도 흔하다.

한국과 동일하게 사회보장 방식으로 운영되는 일본과 대만의 제도도 비교 분석됐다. 한국은 보험료 징수율이 일본·대만보다 높지만 보험료를 내기 어려운 저소득 취약계층 지원 제도는 미흡한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가입자의 취약성, 위기 상황을 고려하여 ‘갚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보다 적극적인 ‘추심자’ 역할을 한다”고 비판했다.

미성년자에게 독촉, 위헌 소지
지난해 7월 생계형 건강보험료 체납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한겨레21> 표지 이미지.

지난해 7월 생계형 건강보험료 체납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한겨레21> 표지 이미지.

서울사회복지공익법센터 전가영 변호사는 미성년 체납자 독촉·고지 처분, 통장 압류, 결손처분 등에 대한 법적 문제점을 지적했다. 전 변호사는 국민건강보험법과 시행령에서 규정한 ‘보험료 연대 납부 의무와 면제 대상’ 조항 가운데 미성년자 부분은 위헌 소지가 크다고 보았다. “건강권, 인간의 존엄성,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및 평등권에 반하는 규정”이기 때문이다. 미성년자에게까지 보험료 연대 납부 의무를 지우는 규정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밖에 체납 보험료를 정부에서 탕감해주는 결손처분제도는 기준이 불명확하고 최저생계를 유지할 장치가 없다는 점이 개선 이유로 제시됐다. 보험료 장기 체납자의 통장을 압류하는 현행 제도 또한 위법한 압류를 해제할 방안이 없는 맹점이 지적됐다.

건강세상네트워크·주빌리은행이 함께 운영하는 ‘생계형 건강보험 체납자 상담센터’ 누리집(healthforall.or.kr)에 2016년 5~12월 민원을 접수한 시민은 519명이다. 이들 가운데 40%인 210명이 월소득 자체가 없다. 주거 유형도 월세(51%)가 압도적으로 많다. 체납 사유(중복 응답)로는 정기적 소득이 없거나(64%), 과도한 부채(39%)를 들었다. 체납 때문에 벌어지는 어려움(중복 응답)으로 병원 이용 제한(44%), 통장 등 동산 가압류(31%)가 꼽혔다.

김정숙 건강세상네트워크 활동가는 “건보료 6회 이상 체납자에게 보험급여 혜택을 중단하는 것은 헌법에 보장된 건강권을 위배하는 것이므로 폐지되어야 한다. 건보료 납부 의무가 없는 세대원에게 급여 혜택을 제한하거나 연대 책임을 지워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연구팀은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제도 개선 방안을 내놨다. 체납 문제를 체계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통계 지표 개발과 공개, 지속적 문제 개선을 위한 ‘건강보장시민위원회’를 보건복지부에 신설, 미성년자와 고용 불안 청년에 대한 보험료 납무 의무 면제, 결손처분 기준 완화 등이다.

정부·공단 “제도 개선 노력”

보건복지부는 1월23일 국회·정부 합동공청회를 열어 건보료 부과체계 개편안을 공개했다. ‘송파 세 모녀’ 사건으로 상징되는 저소득 지역가입자의 보험료 감경안도 내용에 포함됐다. 보건복지부 보험정책과 이창준 과장은 “성실 납부자와의 형평성과 도덕적 해이 문제를 아울러서 체납자가 부담을 덜 수 있도록 제도 개선에 노력하겠다”고 했다.

건보료 체납으로 몸과 마음 모두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은 국민건강보험공단과 정부를 향해 호소하고 있다. 한마디로 추리면 이렇다. 무감각은 범죄다.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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