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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미화 검정교과서가 온다

국정교과서 왜곡·미화의 ‘보이지 않는 손’…

편찬기준 개정 없이는 검정도 국정과 다를 바 없어
등록 2017-01-03 06:13 수정 2020-05-02 19:28
‘국정교과서 반대 청소년 행동’의 청소년들이 2016년 11월27일 서울 종로구 동화면세점 앞에서 국정교과서 폐기를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국정교과서 반대 청소년 행동’의 청소년들이 2016년 11월27일 서울 종로구 동화면세점 앞에서 국정교과서 폐기를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2016년 12월27일 교육부는 국정교과서 현장 적용을 1년 늦추고, 그동안 검정교과서를 새로 개발해 2018년부터 국정교과서를 검정교과서와 혼용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필자 역시 교육부 발표 당일 한 출판사로부터 교과서 집필을 서둘러야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일각에서는 검정교과서 재도입으로 국정교과서를 둘러싼 사회적 논란이 일부 가라앉을 것이라고 예측하지만 이는 지나친 낙관이다. 교과서를 집필할 때 반드시 준수해야 하는 ‘편찬기준’이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편찬기준대로라면 검정교과서 역시 국정교과서와 유사한 수준의 왜곡과 미화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

검정교과서도 새마을운동 미화?

교육부가 교과서 집필진에게 제시하는 편찬기준은 저자가 지켜야 하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으로, 편찬기준 내용을 반영하지 않으면 교육부 권한인 검정을 통과할 수 없다. 2016년 11월 교육부가 공개한 교과서 편찬기준에는 △유엔 결의에 따른 5·10 총선거를 통해 대한민국이 수립됐다 △대한민국 수립 초기 의무교육과 문맹퇴치 노력이 전개됐다 △새마을운동이 농촌 근대화의 일환으로 추진됐다고 기술하라는 항목이 있다. 국정교과서는 바로 이 ‘기준’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는 표현을 ‘대한민국 수립’으로 고쳐 쓰고, 새마을운동을 특별히 부각시켜놓았던 것이다.

이전 교육과정 때는 새마을운동이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내용 요소로 규정되지 않았다. 물론 집필자의 재량에 따라 자율적으로 새마을운동을 서술한 경우는 있었다. 검정교과서 집필진이 단원의 흐름이나 문맥에 따라 내용을 구성하면서 새마을운동을 본문이 아닌 보조자료 정도로 언급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국정화가 결정된 뒤 상황이 바뀌었다. 교육부의 편찬기준이 그 많은 과거 정부 시책들 가운데 하필 ‘새마을운동’만 지목해 반드시 서술하라고 했기 때문에 본문에 새마을운동을 쓰지 않으면 검정을 통과할 수 없게 됐다.

“대한민국 수립 초기 의무교육”에 대해 서술하라는 편찬기준도 기존 검정교과서에서는 잘 다루지 않던 내용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시기는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한 한국전쟁이나 4·19 혁명 등과 같이 굵직한 사건들을 서술하는 것만으로도 할당된 지면이 부족해 집필진이 고심을 거듭해야 했다. ‘의무교육제 정착 노력’ 등 생소한 내용을 한정된 지면에 넣어 맥락을 찾아 설명하라는 건 현재의 교과서 분량으로는 여간 어렵지 않다.

역사적으로 보면, 해방 직후 정부가 채 출범하기도 전에 의무교육제를 정착시키려는 노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승만 정부도 교육법을 입안해 의무교육제에 필요한 법제를 정비하고, ‘의무교육 6개년 계획’도 수립한 바 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재정 사정이 열악하다는 이유로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고 오히려 당시 이승만 정부는 ‘사친회비’ ‘기성회비’란 이름으로 국가가 부담해야 하는 교육비를 학부모에게 전가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런 사정 탓에 ‘과연 국민학교 교육이 명실상부한 의무교육인가’ 하는 비판이 제기됐던 것이다.

역사적 사실이 이러한데 이번 편찬기준은 이승만 정부 때 의무교육제 정착 노력이 있었다고 특별히 지목해 서술하라고 했다. 기존에는 없던 내용이 새로 등장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혹시 누군가 이승만 정부 때 의무교육제를 실시하려 했다는 사실을 과대평가하고 이를 교과서에 명시하도록 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희석시키려 한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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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교과서 개발보다 편찬기준 개정이 먼저

편찬기준은 얼마 전에 공개된 국정교과서의 설계도에 해당하는 문서이기도 하다. 국정교과서에 나타난 서술상의 문제점은 바로 편찬기준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의 편찬기준이 검정 역사 교과서의 집필 기준으로도 원용될 가능성이 높다. 만일 이 편찬기준이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게 된다면 곧 선보일 검정교과서도 국정교과서와 동일한 내용을 담아야 한다. 이름만 ‘검정’교과서일 뿐 내용은 ‘국정’과 동일하게 된다는 의미다.

국정교과서의 편찬기준은 국정교과서 도입 확정 직전인 2015년 9월 필자를 비롯한 학자들이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용역을 받아 개발하고 있던 검정교과서의 집필기준안(국정은 편찬기준, 검정은 집필기준이라고 부른다)을 일부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편찬기준’과 기존 ‘집필기준안’을 비교하면 유사한 부분이 상당히 많아 새로 개발했다고 볼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 근현대사 부분을 중심으로 90여 곳 정도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사실상 누군가 자기 입맛에 맞게 검정교과서의 집필기준안을 헤집어놓은 것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일례로 기존 집필기준안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고 표현된 것이 모조리 ‘대한민국 수립’이란 표현으로 바뀌어 있다. 집필기준에 “경제성장의 과정을 경제개발 계획 등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급속한 경제성장 과정에서 사회 양극화, 환경오염, 노동문제 등이 나타났음을 서술한다”고 돼 있던 부분도 삭제됐다. 경제성장 성과를 설명하되 사회적 양극화 등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당면 과제도 함께 탐구하도록 했던 것인데, 편찬기준에선 이를 삭제하고 “사회 구성원의 노력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이미 해결되었고,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였다”는 식으로만 기술하라고 명시했다.

그동안 역사 교육 종사자들은 더 바람직한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들을 자라나는 세대가 제대로 인식하고, 또 창의적으로 그 문제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데 유념해왔다. 편찬기준대로 교과서를 쓰게 된다면 학생들은 정부 주도로 달성한 경제성장의 성과만 열심히 암기해야 한다. 민주화라든지 양극화 해소 등 우리 사회가 끊임없이 추구해야 할 과제들에 대한 균형감 있는 학습이 어려워질 것이다.

편찬기준과 국정 역사 교과서는 실과 바늘 같은 사이다. 편찬기준을 하루빨리 개정해야 한다.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역사 교육에 악영향을 미치는 부분에 대해 역량 있는 연구자들의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 편찬기준 개정 작업 없는 검정교과서는 국정과 다름없는 ‘무늬만’ 검정교과서다.

최병택 공주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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