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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받기 위해 모였나요?

이주의 키워드/ 평화시위 vs 폭력집회
등록 2015-12-15 07:57 수정 2020-05-02 19:28
컴퓨터그래픽/ 김민하  편집장

컴퓨터그래픽/ 김민하 편집장

12월5일 집회 직후, 극우 매체를 포함한 대부분의 언론이 오랜만에 한목소리를 냈다. ‘참 평화롭고 선진적인 시위였다’는 칭찬이다. 그날 집회는 어느 노래처럼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집회처럼 보였다. 우아하고, 조용하며, 무엇도 위험하지 않았다. 그려낸 듯 완벽한 평화시위였다. 밝혀두지만 나는 행복한 분위기를 못 견뎌하다 끝내 파티를 엉망으로 망치고 마는 심술궂은 인간이 아니다. 모두 좋다면 그걸로 된 거라고 생각해버리는 속 편한 인간이다. 그렇지만 이날의 집회에 쏟아지는 칭찬을 보면서, 질문 하나를 던지고 싶었다. 우리가 사랑받기 위해 광장에 모였나요?

11월14일 민중총궐기대회에서 농민 백남기씨가 경찰의 물대포 직사에 쓰러져 중태에 빠졌다. 여론이 들끓었다. 초점은 ‘폭력’이었다. “이게 모두 폭력시위 때문”이라는 정권과 극우 미디어의 프레임 짜기와 더불어, 집회 참여자들 사이에서조차 폭력시위에 대한 비난이 일어났다. 12월5일 집회까지 20여 일 동안 사람들은 폭력시위에 대해 갑론을박했다. ‘폭력시위를 폭력이라 규정하는 힘이야말로 더 큰 폭력’이라 일갈하는 이들이 있었고, ‘폭력시위 대 평화시위’라는 프레임부터 잘못됐다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세는, ‘무조건 비폭력·평화 시위로 가야 한다’였다.

그렇게 시위의 ‘형식’을 문제 삼는 와중에, 늙은 농민 백남기가 왜 서울까지 올라와야 했는지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집회의 메시지는 무엇인지, 사람들은 왜 광장에 모였는지 토론하는 모습도 잘 보이지 않았다. 폭력과 비폭력의 강요된 이분법을 해체하자고 말하면서도, ‘폭력시위를 폭력이라 규정하는 힘이야말로 진정한 폭력’이라 통찰하면서도, 큰 틀에서 우리는 여전히 시위의 ‘방법론’이라는 미궁에 갇혀 있었다. 모두가 전략가이고 사령관인 양 떠들어댔지만 그 화려한 달변 속에 정작 우리가 광장에서 나눌 이야기는 없었다. 전략과 전술이 필요 없다는 게 아니라 그게 전부인 것처럼 매몰되고 말았던 것이다. 실은 이것이야말로 권력이 원하던 광경 아니었을까.

1996년 대학생들은 서울 종로 바닥을 뛰어다니며 “등록금 인상 반대”와 “수석이를 살려내라”를 외쳤다. 그때 김영삼 정부와 언론은 그들을 ‘폭력과격분자’라고 규정했다. 이 무렵 나는 어딘가에 이렇게 썼던 것 같다. ‘노수석의 죽음에 항의하는 게 폭력이라면 그를 구타해 죽인 건 무엇인가. 가장 잔혹한 폭력을 휘두르면서 저항하는 사람을 폭력집단으로 규정하는 폭력은 뭐라 불러야 하는가.’ 2002년 최초의 촛불시위 당시 “운동권 깃발은 내리세요”라는 요구로 이른바 깃발 논쟁이 촉발됐고 ‘운동권’과 ‘일반 시민’ 사이에서 균열이 일어났다. 촛불시위의 첫 헤게모니 충돌이었다. 그리고 2008년의 광장. 예비군복을 입은 청년들은 중년 사내들에게 호통치고 있었다. “아이 참, 아저씨들, 집회 처음 나오셔서 잘 모르시나본데요. 저희 가이드대로 움직이셔야 해요. 잘못하면 폭력집회로 몰립니다!” 그 아저씨들은 반평생 구사대와 경찰 폭력에 인이 박인 노동조합원들이었다.

권력이 가장 강력할 때는 언제일까. 폭력을 직접 행사하거나 폭력을 규정할 때? 아니다. 피억압자가 권력의 시선을 내면화할 때다. 이 자기규율이 작동하기 시작하면 피억압자는 분열증적 상황에 빠진다. 즉, 권력에 맞서 싸우면서도 스스로를 타자화해 ‘우매한 대중’을 통제하려는 주체가 된다. 이들은 권력이 자신들의 저항을 역이용할 것이 너무나 두렵다. 대중의 돌발행동으로 여론이 돌아서는 게 너무나 두렵다. 그 두려움 때문에 어떤 폭력도 용납할 수 없게 된다. 시위는 계몽된 시민의 세련됨과 선진성을 보여주는 것에 집중한다. 그것이 권력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함은 물론이다. 권력은 자애롭게 미소짓는다. “거봐요, 평화시위, 하려면 할 수 있잖아요?”

1996년엔 폭력을 규정하는 권력을 비판하는 것으로 족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저항하는 자가 알아서 자신을 규제하고 억압한다. 오늘날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란 권력의 시선을 깊숙이 체화한 스스로와의 싸움이기도 하다. 앞서의 질문이 다른 누군가가 아닌 우리 자신을 향한 건 그래서다. 우리가 사랑받기 위해 광장에 모였나요?

박권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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