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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가방’을 찾아서

‘가방이나 밝히는 것들’
등록 2015-10-13 13:30 수정 2020-05-02 19:28
그래픽 김민하 <미디어스> 기자

그래픽 김민하 <미디어스> 기자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호랑이는 곶감을 무서워한다. 호랑이는 곶감을 먹어본 적도 없고, 심지어 그게 뭔지도 모르지만, 자기가 온다는 말에는 눈썹 하나도 아랑곳하지 않던 아기가 곶감이라는 말 한마디에 울음을 뚝 그쳤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하게, 오늘날 한국의 남자들은 ‘(명품)가방’을 무서워한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가방을 사준 적도 없고, 가방을 사달라고 말하는 여자를 만나본 적도 없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본 다른 남자들의 글에 등장하는 아는 형님과 친구와 동생 등등의 경험담들로 미뤄볼 때 언제 자신에게도 십자수나 털실 목도리 같은 것을 들이밀며 가방을 사내라고 말하는 여자가 나타날지 모르는 것이다. 이 절체절명의 공포에 맞서 남자들은 쓰린 속을 달래며 햄버거를 먹으러 간다. 아, 남자의 인생이여….

KFC는 최근 새롭게 선보인 옥외 광고에서 “자기야~ 나 기분전환 겸 빽 하나만 사줘^^”라는 문구를 사용했다가 여성 혐오 논란이 발생하자 “많은 분들께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며 공식 사과했다.

대체 가방이란 무엇인가? 이 전설의 가방은 한국 사회에 퍼져 있는 여성 혐오의 서사에 거의 반드시 등장한다. ‘된장녀’나 ‘김치녀’가 사치와 허영에 찌들어 가방을 사주지 않는 남자를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는 서사는 일반적이고, 심지어 여성가족부가 게임 규제를 통해서 조달하는 자금으로 명품가방을 살 것이라는 식의 이야기도 있다. 그 결을 따라가다보면 가방이란 결국 한국 남성들이 바라보는 한국 여성들의 욕망의 기표 같은 것이고, 그 기의는 여성들의 사치와 허영이며, 그 무의식에는 그것을 충족해줄 수 없다는 좌절이 깃들어 있다.

대체 몇 겹의 오해와 편견과 무지가 이 전설의 가방을 만들어내는 것에 쓰였는지는 알 수 없다. 물론 세상에는 남자친구에게 기분 전환을 위해 가방을 사달라고 말하는 여자도 있을 것이고, 가방만 있으면 식음을 전폐하고 섹스를 하지 않아도 모든 욕망이 해소되는 여자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수가 대체 얼마나 될 것이며, 또 그런 사람을 만나서 실제 가방을 사주게 되는 일이 벌어질 확률이란 얼마나 되겠는가? 아니, 그에 앞서 여자란 이런 존재라고 단정짓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연애를 할 가능성은 얼마큼이란 말인가?

가방이라는 환상은 여성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욕망과 삶의 방식을 오로지 금전적인 것으로 재단하고, 관계를 금전 거래로 대체할 수 있다고 여긴다. 이 거래의 요체는 물질로서 여자의 욕망을 충족해주면 여자는 섹스를 제공한다는 것인데, 문제는 이 계산식을 세우는 데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계산식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관계가 있기도 하겠지만, 대체로 이 계산식은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가는 과정을 생략하고 싶은 자기중심적인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더 문제인 것은, 이 계산식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남자의 수는 정작 매우 적다는 점이다. 그래서 남자들은 자기들이 마음대로 만들어놓은 계산식에 굴복해 좌절하고 스스로를 무능력한 존재로 인지한다. 그런데 이들의 화살이 향하는 곳은 언제나 가방과 여자이지, 돈 많은 남자는 아니다. 남의 욕망, 그것도 자기 마음대로 정해놓은 타인의 욕망을 공격하고, 단죄하고, 끌어내려서 관계의 우위를 점하겠다는 치졸한 수법이다. 하지만 대체 ‘네가 그렇게 사치와 허영에 절어 있는 것은 천하의 도리를 외면하는 것이니, 이리 와서 아무것도 주지 않는 나와 섹스를 하자’라는 말을 하면서도 조금의 이상함도 느끼지 못할 수 있단 말인가?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는 우리가 그렇게나 좋아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나 유엔 같은 곳에서 발표하는 글로벌한 지표들에서 언제든지 확인 가능하다. 그런 증거들은 모두 외면하고 가뜩이나 힘든 사람들을 ‘가방이나 밝히는 것들’로 만들어서 얻을 이익이 뭔지 나는 궁금하다. 여자도 똑같은 사람이니 같이 평등하게 잘 좀 살자는 말이 그렇게나 고까운가? 그 비뚤어진 마음들이 모여 여러분의 ‘헬조선’은 오늘도 더 뜨거워진다.

최태섭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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