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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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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출발선’에 섰다

‘2015년 비정규직 1070명 심층 보고서’ 취재 후기
숫자와 단어 사이 튀어나오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
새롭진 않지만 여전히 ‘뉴스’
등록 2015-03-25 08:34 수정 2020-05-03 00:54

“정규직은 상행선이라도 있지, 여기는 평행선이야.”
장동호(48)씨는 2010년 처음 취업한 후배(28)에게 단단히 일러줬다. 인터넷 설치 작업을 가르치면서, 비정규직의 삶에 대해서도 가르치는 게 도리라 여겼다. 후배는 갓 제대한 스물셋이었다. “넌 아직 나이가 젊잖아. 여기서 시작하면 당장 손에 쥐는 돈이 많아 보일지 몰라도, 임금 인상이란 게 없어. 다른 일 해봤다가 다시 와도 되는 곳이야. 너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떠나라.” 그 뒤 5년이 지났지만 장씨와 후배는 여전히 평행선 위를 달린다. SK브로드밴드 협력업체인 부천행복센터가 그들의 일터다. 장씨는 이쪽 업계에서 14년차 경력을 쌓았지만, 월 150만~200만원 남짓을 손에 쥔다. 후배는 5년 가까이 사귄 여자친구가 있지만 불투명한 미래 탓에 결혼을 미루고 있다.

“상행선은 없어, 여기는 평행선이야”

장씨 아내는 몇 달 전부터 화장품 공장에서 파견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최저시급 5580원을 받는 일자리다. 지난 2월 상고를 졸업한 딸은 세무사 사무실에서 수습사원으로 일한다. 주말 근무까지 합쳐 월 95만원을 받는다. 장씨는 대학교 등록금을 댈 형편이 아니라서 “전문대라도 보내달라”는 딸의 소원을 못 들어줬다. 홀어머니 아래서 자란 장씨도 학비 때문에 대학을 자퇴했다. 경기도의 4년제 대학을 다니는 아들은 5월 제대를 앞두고 있다. 아들만은 ‘상행선’을 타길 바라지만 “확률상 현실적이지 않은 꿈”만 같다.

지난 3월19일 서울 맥도날드 홍제점에서 알바노조가 ‘고무줄 근무시간(스케줄)’으로 불안정 노동을 양산하는 맥도날드에 항의하고 있다. 한겨레 김경호 선임기자

지난 3월19일 서울 맥도날드 홍제점에서 알바노조가 ‘고무줄 근무시간(스케줄)’으로 불안정 노동을 양산하는 맥도날드에 항의하고 있다. 한겨레 김경호 선임기자

‘비정규직 1070명 심층 보고서’를 쓰느라 지난 한 달 동안 만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은 장씨와 어금지금했다. 가족들이 대부분 비정규직으로 취업해, 함께 저임금과 불안정 노동의 늪에서 발버둥치고 있었다. 가족이 모두 비정규직인 경우, 20차례 경험한 일자리 모두 비정규직인 사람, 신용불량자가 되거나 공과금을 못 낼 정도로 힘겨운 사연 등을 취재했다. 일부러 안타까운 사연만 찾아다닌 것도 아닌데, 그들의 노동 생애사는 구구절절 애달팠다. 인터뷰하다 말고 공연히 눈길을 피해 딴 곳을 쳐다보곤 했다. “이쑤시개를 항상 들고 다니다가 마비된 다리를 찔러요” “내가 배운 게 없고 가진 게 없어서 딸이 비정규직이 된 건 아닐까 생각하면 속상해요”.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마음의 상처를 괜히 헤집는 것 같아 미안했다.

그동안 비정규직 취재에 매달릴 만큼 매달렸다고 생각했다. 2007년 비정규직법(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시행된 직후, 사회부 노동 담당 기자로 1년6개월 동안 이랜드·코스콤·기륭전자 등 비정규직 취재에 몰두했다. 그 뒤 경제부 산업팀에 있으면서도 기회가 닿을 때마다 자동차·조선·물류(화물·택배) 등 출입 영역에 있는 비정규 노동자들의 삶을 기사로 썼다. 로 자리를 옮긴 뒤 지난 1년6개월 동안에도 비정규직은 주된 관심사였다. 그런데 지난 한 달간 다시금 가슴을 쳤다. 비정규직에 관한 통계와 숫자들은 절반의 진실밖에 보여주지 않는다. 가난과 차별, 착취는 그들의 삶을 찍어누른다. 그들이 품고 사는 불안과 분노, 그리고 무엇보다 자식에게 이런 현실을 대물림할지 모른다는 절망의 깊이는 드러나는 숫자보다 훨씬 깊었다.

기사에 주렁주렁 달려 있는 댓글도 그랬다. “비정규직 엄마입니다. 내 아이도 자라서 저처럼 비정규직으로 살아가야 할까 두렵습니다”(마르마르××××), “대학생들 취업이 늦어지는 이유는 첫 직장을 비정규직으로 있기 싫고, 대기업이 아니면 평생 올라갈 썩은 동아줄도 없기 때문이다. 그걸 증명하는 기사다”(후아×).

숫자보다 깊었던 절망의 깊이

죽음이 어른대는 절망감은 이번 기획 취재의 단초였다. 지난해 5월, 서울 서초동 삼성 본관 앞에서 노숙농성 중이던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 소속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취재할 때였다. 염호석씨가 노조의 ‘승리’를 기원하는 유서를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직후였다. 누군가에게 물었다. “수백 명이 이렇게 수십 일째 노숙농성을 하며 끈질기게 싸우는 이유는 뭔가요?” 분노가 가득 섞인 답이 돌아왔다. “악에 받쳐서요” “그동안 착취당한 한풀이예요”.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해 여름, SK브로드밴드와 LG유플러스 협력센터에서 인터넷 설치·수리 기사로 일해온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노조를 만들었다. 이들은 그 뒤로도 1년 가까이 수백 명씩 노숙농성 중이다. 제1052호 표지 모델로 선뜻 나서준 이정훈씨와 그의 아들을 처음 마주친 곳도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 농성장 앞이었다. 아빠는 응원 나온 아들을 안고 거뭇하게 자란 턱수염을 비볐다.

“이들은 누구일까?” 궁금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그들의 가족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비정규직이라는 사회적 낙인과 차별의 시선 속에 갇혀 있는 심리 상태는 괜찮은지 좀더 종합적으로 들여다보고 싶었다. 답을 예단하지 않기로 했다. 최대한 객관적 실태를 보여주기 위해 설문조사 방식을 택했다. 비정규직 1070명의 설문 응답 표본을 확보하는 과정은 지난했다.

통계 분석과 취재 등을 위해 설문 응답 시트를 수백 번쯤 들여다봤다. 그런데 숫자나 엑셀과의 씨름보다 더한 괴로움이 그곳에 숨겨져 있었다. 기록된 숫자와 단어들 사이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이 툭툭 튀어나왔다. 자살·죽음 등의 단어들이 마치 일상어인 양 등장했다. 자신들이 직접 경험한 서러움, 두려움 등의 감정들로 흥건했다. 2회 ‘불안과 분노의 경고등’에 그 내용을 담았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선 엷은 우울증, 켜켜이 쌓인 분노, 오랫동안 닳고 닳았을 감정의 마비 같은 상태가 언뜻언뜻 비쳤다. 이 에필로그 기사를 쓰고 있는 3월19일에도 비정규직과 관련된 우울한 언론 보도는 이어진다.

#1.

구아무개(25)씨는 서울 관악구 고시촌에서 홀로 살았다.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39만원짜리 원룸이다. 구씨는 이날 저녁 원룸의 모든 문틈을 비닐테이프로 꽁꽁 막았다. 이웃의 신고로 소방관들이 들어간 방 안에는 번개탄 재만 수북했다. 구씨는 치킨집 배달, 호프집 종업원 등을 전전하던 ‘알바’ 청년이었다. 그는 조울증을 앓아왔고, 2013년 군대를 의가사제대했다고 한다. 유서는 없었다. 비정규직이란 그의 처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까닭이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알바 월급으론 월세 대기에도 빠듯했으리라.

#2.

김아무개(50)씨는 맥도날드 홍제점에서 5년 넘게 일했다. 한 달에 176시간가량 일하면 월 114만원을 손에 쥐었다. 김씨의 시급은 5년간 고작 100원이 올랐다. 올해 들어서는 근무시간이 104시간까지 줄었다. 일주일 단위로 노동시간을 조정하는 맥도날드의 ‘고무줄 스케줄’ 탓이다. 월급은 65만8천원까지 쪼그라들었다. 생활이 어려워진 김씨는 일을 그만뒀다. 노동시간도, 급여도 들쭉날쭉한 전형적인 불안정 노동이다. 김씨는 3월19일 알바노조와 함께 맥도날드를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아직 해야 할 이야기가 많다

비정규직은 새롭지 않은 주제다. 그러나 여전히 뉴스다. 한국 사회의 가장 아픈 단면이면서도, 누구도 해법을 내놓지 못하는 ‘노답’ 상태가 십수 년째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1070명 심층 보고서’는 이번호로 마친다. 하지만 끝은 아니다. 저임금, 빈곤노동, 청년실업, 불평등 등 꼬리에 꼬리를 물고 취재는 계속될 것이다. 아직 해야 할 이야기가 많다. 이제 겨우 ‘출발선’에 섰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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