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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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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괜찮은 내일일 거예요

청각에 이어 시력까지 잃어가는 구경선 그림작가의 버킷리스트 담은 <그래도 괜찮은 하루>
안 보여도 할 수 있는 일을 떠올리며 빛을 잃을 준비를 하다
등록 2015-03-24 08:38 수정 2020-05-02 19:27
〈그래도 괜찮은 하루〉의 작가 구경선씨는 시야가 점점 좁아지다가 시력을 잃어버리는 ‘망막색소변성증’을 앓고 있다. 구 작가는 빛을 잃어버리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을 ‘버킷리스트’로 만들어 하루하루 실천하는 중이다.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그래도 괜찮은 하루〉의 작가 구경선씨는 시야가 점점 좁아지다가 시력을 잃어버리는 ‘망막색소변성증’을 앓고 있다. 구 작가는 빛을 잃어버리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을 ‘버킷리스트’로 만들어 하루하루 실천하는 중이다.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토끼는 귀가 길다. 구경선(32) 그림작가가 그리는 토끼 귀는 더 길다. 유독 긴 귀를 가진 토끼 ‘베니’는 2009~2011년 사람들이 도토리를 사서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열심히 꾸미던 시절 인기 아이템이었다. ‘다 귀찮아’ 바닥에 벌러덩 누워버린 토끼. 온몸에 덕지덕지 반창고를 붙이고 “나 상처투성이야” 말하는 토끼. 화르르 타오르는 토끼. 게임에 중독돼 컴퓨터 모니터에 허리까지 빠져버린 토끼…. 사람들은 뭐랄까, 마이너스의 감정에도 솔직한 베니를 좋아했다.

8.8cm의 원 안에 갇힌 시야

토끼 베니는 구 작가가 원하는 또 다른 자신이다. 그는 점차 소리를 잃어가며 살았다. 두 살 때 열병을 앓고 청각장애가 생겼다. 보청기를 껴야 소리가 들렸다. 보청기를 껴도 뒤에서 건네는 말은 언어가 아니라 소리뭉치로만 들렸다. 소리를 보아야 소리를 안다. 스물일곱이 되던 해엔 보청기를 껴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됐다. 완전히 소리를 잃었다. “토끼는 귀가 큰 만큼 소리에 예민하다. 듣지 못하는 나 대신, 베니가 잘 들어주길 바랐다.” 토끼였던 이유다.

위즈덤하우스 제공

위즈덤하우스 제공

구 작가가 지난 2월 책을 냈다. . 소리에 이어 빛도 잃어가는 자신의 이야기다. 구 작가는 2013년 가을,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병이 진행되면 시야가 점점 좁아진다. 지름 10cm 내외의 좁은 관으로 보는 것 같다가 지름 5cm로, 급기야는 시력을 잃게 된다. 지금 구 작가의 시야는 지름 8.8cm의 원 안에 갇혀 있다. 원은 점점 작아질 테다. 는 구 작가가 “눈이 보일 때 할 수 있는 걸, 하고 싶은 걸 모두 해보자”고 결심하고 만든 버킷리스트에 관한 이야기다.

위즈덤하우스 제공

위즈덤하우스 제공

3월18일 아침, 구 작가를 만났다. 서울 성동구 도선동의 한 카페. 민트색 스웨터와 프린트가 예쁜 니트 스커트를 입은 여성이 말을 건넸다. “기자님이세요?” 손에는 젤리과자 ‘왕꿈틀이’를 들었다. 만나자마자, 꿈틀이 하나를 건넨다. 소녀 같은 아가씨였다.

걱정했던 의사소통은 어렵지 않았다. 구 작가의 발음은 또렷했다. 기자의 말을 대부분 입 모양을 보고 이해했지만, 정확도를 위해 노트북에 질문을 써가며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의 정확한 발음은 노력의 산물, 그리고 엄마의 힘이다. “어린 시절 엄마는 말을 해보지 못한 제 혀가 굳을까봐 설탕을 입 주변에 묻혀 빨아먹는 연습을 하게 했어요. 계속 움직여야만 혀가 굳지 않으니까요.” 조금 자란 뒤에는 자음 하나하나를 발음할 때마다 목에 손을 대고 달라지는 울림을 느끼게 했다. 소리를 듣지 못해도 ㅁ·ㅂ·ㅍ처럼 입 모양이 같은 입술소리를 구분해서 말할 수 있게 됐다. 글자를 익힌 뒤에는 동화책의 문장을 가린 뒤 엄마가 읽어주는 입 모양을 보고 받아쓰게도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는 엄마가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늘 붙어서 공부를 봐줬어요. 4학년이 돼서 혼자 공부할 수 있게 되면서 엄마는 보험설계사 일을 시작했어요.” 발음 연습은 평생 해야 한다. “저한테 우리말은 외국어랑 같아요. 지금도 며칠 말하지 않고 채팅만 하고 지내면 발음이 부정확해져요. 자주 말하고 계속 연습해야 해요. 기자님이랑 지금 ‘프리토킹’ 하는 거예요.”

‘구경’이 싫었던 ‘경선’이

소리만 들리지 않을 때도 세상살이는 힘들었다. 그는 구경선이라는 이름보다 ‘구 작가’라는 필명을 더 좋아한다. “‘경선’은 괜찮은데 ‘구경’이 싫어요. 안 그래도 주목받기 싫은데, 초등학교·중학교 때 키가 너무 컸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 키가 154cm였는데 키를 재러 온 6학년이 킥킥대고 웃었어요. 구경거리 같은 느낌이 싫었어요. 울면서 집에 가는 날이 많았어요.” 중학교 때는 학교를 자주 빠졌다. “보청기를 껴도 칠판에 필기를 해주지 않으면 수업을 이해하기가 힘들었어요. 답답해서, 학교에 가는 대신 도서관이나 법원 같은 곳으로 ‘자율학습’을 떠났어요.”

어렵게 들어간 애니메이션고등학교는 1년 만에 그만뒀다. 구 작가에게 말 대신 의사소통을 하게 해줬던, 물과 공기처럼 당연한 일상이던 그림 그리기도 5년은 손을 놓았다. 대신 방구석에 틀어박혀 지냈다. 1년은 모든 친구들과 연락을 끊고 온라인 게임 만 했다. 3년은 검정고시 준비에 보냈다. 네일아트를 배웠지만 의사소통이 쉽지만은 않아 취직한 미용실에서 두 달 만에 잘렸다. “나도 돈을 벌고 싶다”고 생각할 때 ‘싸이월드 스킨작가’라는 직업을 알게 됐다. 다시 열심히 그림을 그려 9개월간 도전한 끝에 ‘싸이월드 스킨작가’가 됐다. 그리고 만들어낸 베니가 인기를 얻었다. 베니 덕분에 많게는 하루에 80만원을 벌기도 했다. 행복은 짧았다. 싸이월드가 사람들에게 외면받으면서 구 작가도 갈 곳을 잃은 느낌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병명을 처음 들은 때부터 넉 달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가득 찼다. 처음 한 달은 울고 또 울었다. 가족은 물론 친구들에게도 화내고 나쁜 말을 했다. “왜?” “어째서?” “왜 내 것만 자꾸 뺏어가는 거야?”라는 질문만 반복했다. 다음 두 달은 우울감이 오르락내리락했다. 밤새 울고 눈을 뜬 아침이었다. 2013년 11월27일. 창밖에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동안 첫눈이 예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어요. 제대로 본 적도 없었어요. 그런데 그날 첫눈을 보니 이렇게 예쁜 첫눈을 아직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했어요. 언제 시력이 완전히 사라질지 모르지만, 볼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걸, 하고 싶은 걸 모두 해보자 생각했어요.”

정말 좋아, 소개팅의 두근거림

고민고민해서 30개의 버킷리스트를 만들었다. 5개는 비워뒀다. “완전히 끝나버리는 기분이 싫어서요.” ‘소녀’에겐 역시 로맨틱. 버킷리스트 안엔 소개팅해보기,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연락처 묻기가 있다. “얼마 전에 처음 소개팅을 했어요. 곧 두 번째 소개팅을 해요. 소개팅을 하는 것만으로 두근대요. 그 두근두근거림이 너무 좋아요.” 주변 남자친구들과는 늘 썸만 탔다. “썸 타는 거 지겨워요. 30대 남자에겐 불타는 사랑이 없는 것 같아요. 현실을 두려워해서 연애로 발전하지 못하기도 하고, 마음 아팠던 적도 있어요. 가끔은 제가 남자였으면 좋겠어요. 그렇다면 두려워하지 않을 텐데.”

위즈덤하우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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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팅하기를 포함해 버킷리스트 25개 가운데 12개는 완료했다. 엄마에게 처음으로 미역국을 끓여드렸고, 혼자만의 작업실이 생겼고 독립에 성공했다. “눈이 보이지 않으면 더 이상 혼자 살기 힘들지도 모르니까, 한시라도 빨리 독립하고 싶었어요.” ‘헬렌 켈러의 소원을 대신 들어주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헬렌 켈러의 소원이 3일만이라도 눈을 떠서 세상을 보는 거였대요. 그녀의 소원을 제가 대신 들어주고 싶었어요.” 구 작가는 만약 자신이 헬렌 켈러라면 꼭 설리번 선생님의 얼굴을 보고 싶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설리번 선생님을 만나러 갔다. 애니메이션 고등학교 시절의 선생님을 만났다. 혼자 영화도 보고, 해 뜨는 것도 봤다. 제주도에서 돌고래와 헤엄치며 위로도 받았고, 오해로 연락이 끊긴 친구도 다시 만났다.

위즈덤하우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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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하루하루는 남은 버킷리스트를 실천하는 일로 머리가 꽉 차 있다. 3월31일에는 ‘베니를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팬미팅’이 이뤄진다. 출판사가 마련한 ‘저자와의 만남’을 통해서다. “토끼 베니, 제 그림을 좋아해주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고 싶어요. 보이지 않게 되기 전에 그 사람들 얼굴을 직접 보고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어요.” 요즘은 이 만남에서 어떤 이야기를 할까, 진심을 다해 만나러 와준 분들과 어떻게 마음을 나눌까 늘 생각한다. 언젠가 만날 짝에게 보여주기 위한 ‘셀프 웨딩 촬영’도 버킷리스트에 넣었다. 다가오는 토요일에 친한 사진작가 언니와 콘셉트 회의를 한다. 눈이 안 보이면 마음 놓고 뛸 수 없을 것 같아서 마라톤도 버킷리스트에 넣었다. “4월26일 여의도 마라톤에 참가하기로 신청했어요. 오늘부터 연습해야 하는데….”

버킷리스트를 채우는 일 말고 하는 일이 또 있다. 빛을 잃을 준비다. 일주일에 한 번 점자를 배운다. “점자는 6개의 점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점이 워낙 작아서, 점의 개수와 모양을 촉감으로 구분하는 데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해요.” 밤에는 지팡이를 짚고 걷는 연습을 한다. 망막색소변성증의 증상 중 하나가 야맹증이어서 구 작가는 밤이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점자 연습할 때는 딴생각할 겨를이 없는데, 지팡이를 짚으면서 걷기 연습을 하면 무섭기도 하고 슬퍼지기도 해요.” 그럴 때면 보이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한다. “보이지 않아도 그릴 수 있어요. 미얀마에 맹화가가 있대요. 우선은 그 맹화가를 만나볼 생각이에요. 그리고 보지 않고 그리는 나만의 방법을 찾아야죠.” 촉각은 살아 있으니 도예도 할 수 있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일도 할 수 있다. 새로운 버킷리스트가 기다리고 있다.

“보이지 않아도 그릴 수 있어요”

의 마지막 페이지는 예쁜 선글라스를 끼고 주머니에서 지팡이를 척 꺼내 콧노래를 흥얼대며 걸어가는 ‘행복한 베니’의 모습이다. 구 작가는 베니와 함께 소리를 보지 못하는 내일을 준비하고 있다.

글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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