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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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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러스브리저의 ‘후계자’

일개 영국 신문을 세계적 디지털 미디어로 만든 <가디언> 편집국장 후임 공모에 언론계 관심
4명 후보 출사표 살펴보니, 저널리즘 원칙 옹호하며 개방성·투명성 공통으로 내세워
등록 2015-03-24 08:27 수정 2020-05-03 00:54
언론은 세계를 반영하는 동시에 주조한다. 그러나 세상 모든 것을 다루는 언론도 언론에 대해서는 잘 보도하지 않는다. 기자들조차 국내외 언론계의 뉴스를 잘 모른다. ‘기자도 모르는 언론 이야기’는 저널리즘 원칙, 매체 변동, 미디어 기술, 언론시장 등 언론계 전반과 안팎을 아울러 기자, 독자, 전문가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언론 뉴스를 싣는다.
이 기사는 지난 3월 20일(한국 시각) 밤 출고·편집이 끝났다. 은 21일(〃) 새벽 2시께 새 편집국장으로 캐서린 바이너가 임명됐다고 발표했다. 그는 올 여름부터 앨런 러스브리저 현 편집국장의 뒤를 이을 예정이다. 많은 언론들이 타전한 것처럼, 바이너는 창간 194년 만에 탄생한 첫 여성 편집국장이다. 바이너는 어떤 비전을 제시해서 직원들의 지지를 받았을까? 이 기사는 바이너의 임명이 정해지기 전에, 바이너를 포함한 의 새 편집국장 후보 지원자들의 공개 출사표를 살펴봤다. 새 편집국장 선출 과정에 투영된 의 디지털·저널리즘 비전과 역사적 의미를 짚기 위해서다. 바이너의 당선이란 ‘결과’만큼이나 흥미로운 선출 ‘과정’을 공개한다. _편집자

‘에드워드 스노든 폭로 보도’의 시작은 전자우편 한 통이었다. 2012년 12월1일 전자우편을 본 미국판의 칼럼니스트이자 기자인 글렌 그린월드는 당황했다. 미 국가안보국(NSA) 전 직원 스노든은 닉네임 ‘킨키나투스’로 보낸 전자우편에서 “암호화는 스파이나 바람둥이한테만 필요한 조치가 아닙니다. 기자님과 연락하려는 사람 누구에게나 반드시 필요한 보안 조치입니다”라며, 그린월드에게 전자우편 암호화 프로그램 설치를 종용했다. 스노든은 ‘저널리스트를 위한 PGP(암호화 프로그램)’란 제목의 10분짜리 동영상까지 만들어줬다.

바뀐 시대 맞춰 온라인 출사표

스노든이 디지털 기술에 무지한 기자를 ‘가르치는’ 수고까지 아끼지 않은 이유는, 그가 그린월드를 직접 선택했기 때문이다. 스노든은 미국의 다른 유명 언론들을- 적어도 보다는- ‘신뢰’하지 않았다.

파트너로 선택받은 은 신중했다. 보도 전에 정확성, 취재원 보호 등 자체 편집 규정을 따졌다. 일단 보도가 시작되자 거침없었다. 미·영 정부 인사들이 보도를 막으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수난도 겪었다. 영국을 위험에 빠뜨린 ‘매국노’란 비판이 쏟아졌다.

그러나 의 편집국장 앨런 러스브리저는 2013년 12월 영국 의회 청문회에 출석해 이 어떤 방식으로 책임감 있게 스노든 보도에 임해왔는지 설명하고 자사 보도를 옹호했다. 그의 말을 전세계 언론이 타전했다.

2014년 12월, 러스브리저가 편집국장에서 물러날 의향을 밝힌 소식도 기삿거리가 됐다. 사실 러스브리저는 스노든 보도 이전부터 세계 언론계의 ‘스타’였다. 1995년 편집국장으로 선출된 그는 영국 안에서만 읽히던 종이신문 을 세계의 수많은 수용자들이 접속해오는 디지털 미디어로 변모시킨 리더라는 평가를 받는다. 스노든 보도뿐 아니라 위키리크스 문건 보도, 루퍼트 머독 소유의 타블로이드 신문 의 전화 해킹 보도 등도 지휘했다.

가디언 홈페이지

가디언 홈페이지

이런 뉴스룸의 수장이 바뀐다니, 지난해 12월부터 시작된 의 새 편집국장 공모에 언론계의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다. 2월에 영국언론노동조합 가디언&옵서버 지부는 편집국장 후보로 자원한 사람들이 쓴 출사표를 온라인에 공개했다. 이전에도 노조가 편집국장 후보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투표를 벌인 일은 있었지만, 출사표의 온라인 공표는 처음이다.

놀랄 일은 아니다. 2003년부터 회사 경영 상태 등을 담은 회계 보고서를 공개하는 등 개방성·투명성을 강조해온 의 행보에 비춰본다면 말이다. 20년 만에 진행되는 편집국장 선출인 만큼, 당시보다 인터넷이 더 발달한 현재 상황에 맞춘 선택으로 보인다.

노조의 투표 절차에 참여해 출사표를 공개한 편집국장 후보 지원자는 모두 4명이다. 4명 중 3명이 여성이고, 1명은 영국 출신이 아니다. 출신이지만 현재는 외부인인 인물도 있고, 에 합류한 지 2년에 불과한 인물도 있다.

4명 모두 디지털 경험을 갖췄다. 현재 미국판 편집국장이자 편집부국장으로 일하고 있는 캐서린 바이너는 2013년 오스트레일리아판 창간에 편집국장으로 참여했다. 미국·오스트레일리아판은 모두 디지털 미디어로만 운영된다. 에밀리 벨은 2001년부터 10년 동안 의 디지털 콘텐츠 책임자를 맡았다. 현재 웹사이트 편집국장이자 편집부국장인 재닌 깁슨은 2011년 미국판 창간 때 편집국장으로 참여했다. 남성이자 독일 출신인 볼프랑 블라우는 독일의 시사주간지 의 온라인 편집장(2008~2013) 출신이다. 2013년 러스브리저가 의 디지털 전략 담당 임원으로 직접 영입했다.

저널리즘의 본질을 파고드는 승부

의 현실은 만만치 않다. 벨이 직설적으로 언급하듯 “저널리즘을 위한 안정적인 수익 모델이 (여전히) 없”기 때문이다. 과 등을 포괄하는 ‘가디언뉴스앤드미디어’ 그룹은, 비록 투자가 많은 탓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14년 3월 말까지 적자 규모는 3천만파운드(약 496억원)가량이다. 자동차 잡지를 발행하는 다른 계열사 TMG가 자체 지분을 팔아 적자를 메우고 있다. 디지털 분야 수익이 꾸준히 상승해 2014년에 전년보다 24% 오른 6950만파운드를 기록했지만, 인쇄 분야 수익 1억4천만파운드의 규모를 대체할 수준은 아니다. 오래전부터 인쇄 분야의 수익은 성장을 멈춘 상태다.

후보 지원자들은 어떤 비전을 출사표에 담았을까. 각각 1천 단어 안팎으로 쓰인 4명의 출사표를 살펴보니, 공통적으로 △정확성·공정성을 갖춘 의 저널리즘 전통을 옹호하는 동시에 △디지털 미래 전략(기존 인력의 디지털 적응 및 새 인력 영입 필요성 등)에 대한 개방적이고 투명한 내부 논의를 강조했으며 △독자·수용자와 소통을 넓히고 젊은 세대와의 접점을 찾을 수 있는 방안 마련 필요성 △의 지역 확장, 세계적 영향력 확대 필요성 등을 제시하고 있다.

모두 러스브리저의 ‘후계자’를 자처한 셈이다. “질 좋고 개방된 콘텐츠로, 수용자의 참여와 신뢰에 기반한 디지털 영향력을 확대한다”는 러스브리저의 전략을 성공적으로 평가하고, 앞으로도 이런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처럼 진술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실상 의 웹사이트 방문자 수 증가는 미국 9·11 테러와 이라크전쟁을 전후해 이 ‘리버럴 저널리즘’ 색깔을 유지한 데서 비롯됐다. 2001년 8월 사이트의 검색 건수는 3천만 건에서 같은 해 11월 5천만 건으로 늘었으며,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2003년 3월의 순 방문자 수는 전월보다 270만 명이 늘어난 970만 명에 달했다. 상당수는 미국발이었다. 전쟁의 ‘진실’이 궁금했던 사람들이 미·영 정부 등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는 을 찾은 것이다. 이후 위키리크스 보도, 스노든 폭로 보도를 거치며 2012년 6790만 명에서 2013년 7830만 명까지 올라간 월 방문자 수는, 2014년 1억 명을 돌파하기에 이르렀다.

러스브리저는 저널리즘의 ‘본질’을 파고드는 방식으로 매체의 명운을 건 승부를 해왔다. 최진순 기자(건국대 언론홍보대학원 겸임교수)는 “언론은 결국 영향력 산업이다. 은 디지털 시대에도 매체 영향력을 바탕으로 권력에 도전하고 사회의 민주적 여론을 환기시키는 저널리즘의 ‘본질’에 충실하려고 해왔다. 이번 출마자들도 디지털 혁신에 초점을 두지만, 트래픽 양이나 첨단 기술 따위에 치중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독자들을 에 참여하게 하고 그 영향력과 신뢰를 기반으로 생존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리버럴 전통에 대한 확고한 신념

러스브리저의 20년 도전에는 의 소유주인 ‘스콧 트러스트’(이하 트러스트)의 20년 투자가 있었다. 비영리 공익 법인인 트러스트는 1872년부터 자그마치 57년 동안 의 편집국장을 맡았던 C. P. 스콧의 아들 존이 1936년 만들었다. 트러스트는 ‘의 재정·편집권 독립 보장, 특정 정파에 치우치지 않는 고급 전국지 발행, 리버럴 전통에 대한 확고한 신념, 효과적인 경영에 의한 수익성 제고’를 존재 목적으로 명시했다. 트러스트는 편집국장 임명권이 있지만, 편집권을 보장하고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해고하지 않는다. ‘편집국장 종신 고용’ 분위기는 스콧 사후에도 이어진 전통에 가깝다. 이 지속적 적자에도 불구하고 디지털에 계속 투자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많은 전문가들은 이런 소유 구조를 꼽는다.

영국 런던의 사무실 로비에는 수염이 덥수룩한 스콧의 흉상이 있다. 스콧은 의 리버럴 저널리즘을 확고히 했다. 보어전쟁(1899~1902) 보도가 대표적이다. 은 영국이 남아프리카의 지배권을 빼앗고자 일으킨 보어전쟁을 보도하면서, 다른 영국 신문과 달리, 영국군에 의해 집을 빼앗기고 집단수용소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난민들의 삶을 폭로하는 기사를 실었다. 전쟁을 지지하는 영국 대중들이 구독을 끊고, 전쟁 반대 사설을 쓴 에밀리 홉하우스가 체포돼 영국 바깥으로 추방돼도 흔들림이 없었다. 홉하우스의 사설을 계속 싣고 지면에서 토론을 유도해 ‘맹목적 애국주의’의 문제점을 밝히려 했다. 노동조합 운동과 여성 참정권 보장 등을 지지했다.

출사표가 공개된 지원자들은 디지털 시대 ‘초기’를 통과한 전임 편집국장의 행동 원칙이자 의 전통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밝혔다는 점에서 같다. 각종 전략을 수립·실현시킬 수 있는 대내외적 소통 능력 등이 추가로 고려될 것이다. 이들 4명을 대상으로 한 직원들의 투표 결과는 3월5일(현지시각) 발표됐다. 투표 자격이 있는 964명 가운데 839명이 참여했다. 바이너가 438표로 절반을 넘긴 지지를 얻었다. 이어 벨 188표, 깁슨 175표, 블라우 29표 순이다. 9표는 무효다. 상위 득표자 3명만 노조 추천 후보자 자격으로 트러스트 면접을 본다. 트러스트는 꼭 이 투표의 최다 득표자를 뽑지 않아도 된다. 트러스트가 추천한 ‘익명의 후보자’들도 있다.

3월 말 편집국장 지명 계획

트러스트의 리즈 포건 회장은 지난해 말 인터뷰에서 “직원들이 보는 관점도 매우 중요하지만, 트러스트의 의무는 현 저널리스트 세대의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의 지속가능성을 고민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트러스트는 후보자들을 면접한 뒤 이달 하순 새 편집국장을 지명할 계획이다.

*이 기사는 누리집, (루크 하딩 지음, 이은경 옮김, 프롬북스), (글렌 그린월드 지음, 박수민·박산호 옮김, 모던타임스), (최은숙 지음, 커뮤니케이션북스)을 참조했으며, 황용석 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강정수 오픈넷 이사, 최진순 기자(건국대 언론홍보대학원 겸임교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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