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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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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헌법을 읽읍시다”

헌법 전문 써넣은 초대형 작품 출품하고 시민과 함께하는 헌법 읽기 운동 벌이는 임옥상 작가
“헌법 정신 되새기며 우리의 권리와 의무 성찰할 필요 있어”
등록 2015-03-05 07:27 수정 2020-05-02 19:27

우리네 삶과 문화가 스며든 이 땅의 산천이 붓과 먹으로 펼쳐진다. 고요히 누운 대지 위로 역동적인 글씨가 내리꽂히고 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1987년 6월항쟁 이후 개정된 현행 헌법이다.

정부가 지킬 것은 ‘헌법 가치’

지난해 2월부터 6월까지 대구미술관이 기획한 ‘네오 산수전’에 출품돼 전시장 한쪽 벽을 차지한 초대형 작품(가로 18m·세로 4.8m) 의 모양새다. 작품의 작가는 임옥상(65)이었다. “야만과 문명을 결정적으로 가르는 것이 글자의 탄생이라고 본다. 하나의 획이 글자의 출발이다. 그림과 글씨, 시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시서화 전통을 되살리고 싶었다. 이러한 작품을 구상하다 헌법이 떠올랐다. 전시 지역이 대구였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대구가 차지하는 정치적 위상이 큰 만큼 대구 시민과 헌법을 함께 읽자는 의도였다. 정부가 ‘체제를 지켜야 한다’고 하는데 진정 지켜야 할 체제는 ‘헌법 가치’ 아닌가.” 법학자인 영남대 박홍규 교수에 따르면 헌법은 사회생활의 기본을 정한다는 점에서 법 이전에 기본 상식 또는 사상이다. 모두가 함께 사는 기초이다. 그러나 헌법을 읽고 현실과의 괴리감을 생각해본 시민은 얼마나 될까.

헌법에 쓰인 대로, 딱 그만큼

스스로 붙인 호 ‘한바람’(큰 바람, 하나밖에 없는 바람이라는 뜻)처럼 임 작가는 작업실 안팎을 넘나들며 작품 활동을 해왔다. 서슬 퍼런 시기인 1980년대 민중미술가를 거쳐 최근엔 공공미술가로서 모든 사람들이 예술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 활동에 열심이다. 지난 2월27일 그를 만나기 위해 서울 청운동 임옥상미술연구소를 찾았다. 지난해부터 키워온 토종닭 연산오계(천연기념물 265호) 열두 마리가 활보하는 마당 한켠에 ‘대한민국 헌법’을 보전하기 쉽도록 병풍 형태로 축소해 만든 ‘대한민국 헌법 병풍’이 세워져 있다. 작업을 하면서, 배에 힘을 주고 붓으로 헌법을 써내려갔다. 무릇 예술가란, 체제 전복적이고 아나키스트들이라던 그가 ‘대한민국 체제 수호의 선봉’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웃음이 났다. 비장하게 써내려간 헌법이 새롭게 보였다. 민주화운동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모든 것이 명백하게 문구로 돼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에게 와닿은 조항은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제10조)였다. “인간답게 품위를 잃지 않고 사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자꾸 도구화되는데, 헌법에 쓰인 대로 해줬으면 좋겠다.”

임옥상 작가가 지난 2월26일 서울 청운동 임옥상미술연구소 마당에 세워진 그의 작품 〈대한민국 헌법 병풍〉 앞에 섰다. 임 작가 뒤로 레이저코팅 기술로 오려붙인 현행 헌법 전문이 보인다. 류우종 기자

임옥상 작가가 지난 2월26일 서울 청운동 임옥상미술연구소 마당에 세워진 그의 작품 〈대한민국 헌법 병풍〉 앞에 섰다. 임 작가 뒤로 레이저코팅 기술로 오려붙인 현행 헌법 전문이 보인다. 류우종 기자

임 작가는 10여 년간 해마다 손수 만든 연하장을 지인들에게 보내왔다. 이번 설 연휴엔 ‘헌법 병풍’을 축소해 연하장을 만들었다. 붓으로 쓴 새해 인사에는 “대한민국 헌법을 읽읍시다”라는 말이 적혀 있다. 애초 2011년 있었던 1%에 저항하는 99%의 오큐파이 운동에서 영감을 얻은 연하장을 2015년 버전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가 지난해 말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내린 뒤 생각이 바뀌었다. “헌법에 명시된 바에 따르면, 이념과 상관없이 정당을 만들고 활동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국민한테 있다. 통진당 당원들이 이적 행위를 했다고 하지만, 결정문을 보면 아무런 설득력이 없다. 내가 무식한지는 모르겠지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난 이의가 있다. 헌법재판소는 우리가 만들고 최후의 보루로 생각해야 할 헌법 정신을 위반했다고 본다.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도 통진당 해산 결정은 헌법 정신과 맞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런 의견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도 한번 보고, 헌법 정신을 되새기면서 우리의 권리와 의무를 성찰할 필요도 있다고 보았다.”

연하장을 받아든 지인들은 ‘헌법을 읽자’는 그의 제안에 화답했다. 자연스럽게 ‘헌법을 읽는 사람들의 모임’도 생겼다. 최근 서울대 조국 교수, 소설가 정도상 등과 만나 3월1일부터 페이스북을 통해 본격적인 ‘헌법 읽기’ 운동을 해보자고 했다. 담벼락 등에 마음에 와닿는 헌법 조문을 선택해 그 이유를 밝히고 또 다른 지인 3명을 지정해 같은 방식의 헌법 읽기를 제안하는 것이다. 4·19혁명일인 4월19일엔 헌법을 읽은 사람들이 모여 문화 행사를 해보면 어떻겠느냐란 구상도 있다. “좋아하는 헌법 조문을 낭독하기도 하고, 노래로 만들어 부르기도 하면 좋을 것 같다.” 임옥상미술연구소는 크라우드펀딩 사이트 텀블벅을 통해 대통령, 헌재 재판관, 대법관, 국회의원 등 헌법 가치를 존중하고 실현해야 하는 322명에게 ‘헌법 병풍’을 보내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2월28일 목표 후원금액이 100% 달성돼 이 계획은 현실화될 예정이다.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 예술

흙을 되살리기 위한 도시농업 전도사, 문자 심포지엄 집행위원장 등 몸이 열두 개라도 바빠 보이는 임 작가의 새해 계획이 궁금했다. 작품 외적인 발언을 되도록 줄이고, 손과 발, 마음과 머리 모든 것을 작품에 쏟아부어 작품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싶다는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연말 연초에 심각하게 생각한 건 향후 10년 동안 내 작품에 몰입해야겠다는 것이다. 개인 작품과 공공을 위한 작품 작업은 좀 다른 것 같다. 공공미술 작업은 많은 사람들의 협업 시스템으로 가동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대로 작품이 나오지 않을 때도 있다. 물론 사람들이 유기적으로 만들어내는 작품을 긍정적으로 보지만 ‘나’라는 개인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는 작업도 하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나이도 작용했을 거다.” 그렇다고 공공미술 작업을 멈추겠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작가를 너무 단선적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논리를 세워 그 길로만 가야 한다’는 것에서 벗어나는 게 그가 생각하는 예술이므로.

임옥상미술연구소가 심혈을 기울이는 서울 창신동 공공미술 실험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지금까지는 어떤 조형물을 세울 것인가 등이 고민의 중심이었는데, 결국 사람이 주체로 재탄생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이 지역에 청소년들이 많이 소외돼 있다. 이들과 진심으로 대화를 시작해보자는 의미로 ‘기린’ 공작소란 공간을 만들 예정이다.” 그런데 왜 하필 기린인가. 순정한 눈을 가지면서도 키가 커 멀리 볼 수 있는 동물. 심장에서 머리까지의 거리가 가장 먼 만큼 센 심장을 가진 동물이다. 멀리 보고, 상대편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강한 가슴으로 대화를 해보자는 의미란다. 기린에게 보고 배워야 할 사람이 많은 세상이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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