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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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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아의 함정

등록 2015-02-08 05:58 수정 2020-05-02 19:27

문제가 되풀이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뿌리를 건드리지 않았거나 문제 자체를 잘못 파악했거나. 어린이집 아동학대 사건이 잇따라 터지면서 정부가 내놓은 긴급대책을 보니 한숨부터 나온다. 나에겐 어린이집 아동학대를 뿌리 뽑을 묘책까진 없다. 다만 대책이란 것들이 깔고 있는 전제들을 제대로 의심해야 학대를 줄여나갈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전제를 의심하라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먼저 보육교사의 인성검사 의무화를 보자. 인성을 과연 측정할 수 있을까. 출제자가 원하는 답을 알아채는 기술만 있어도 ‘아동학대는 안 된다’는 정답풀이는 가능하다. 도덕시험 100점짜리 인생들이 저지른 무수한 폭력과 부패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폐회로텔레비전(CCTV) 설치 의무화는 어떤가. 학대는 아이를 때리거나 귀를 잡아당기거나 하는 특정 ‘행위’만이 아니다. 학대는 관계와 맥락을 타고 흐른다. 머리를 쓰다듬는 행위조차 어떨 때는 애정 어린 격려가, 어떨 때는 원하는 대로 아이를 조종하려는 암시가 된다. “자꾸 안아주면 버릇 돼, 냅둬.” 두려움에 울음을 터뜨린 아이를 외면하는 보육교사를 본 적이 있다. 이와 같은 정서적 학대나 외곽으로 숨어든 학대에 대해 CCTV는 말이 없다. 신고 포상금 증액, ‘학대 발각 즉시 어린이집 폐쇄’라는 엄포 어디에도 신고자에 대한 보호나 고용 승계 약속이 없다. 민원을 넣은 교사들의 블랙리스트가 원장들 사이에 공유된다. 신고가 곧 일자리 퇴출을 의미할 때 신고가 가능할까.

그렇다면 나름 구조적 해법으로 보이는 대책들은 어떨까. 보육교사들의 저임금, 업무 부담, 직무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것은 마땅한 노동권 보장이다. 학대 예방 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열악한 업무 조건과 아동학대는 상관관계가 있지만 인과관계는 아니다. 고수익 전문직 남편도 아내를 팬다. 강도 높은 입시 부담에 시달리는 고3이라고 해서 부모를 패지는 않는다. 과거에 비해 학교 체벌이 줄어든 이유는 교사의 임금이 올라서, 학급 규모가 줄어서, 직무 스트레스가 줄어서가 아니다. 스트레스를 왜 굳이 아이에게 푸는지, 처우 개선 대책은 말해주지 않는다. 국공립 어린이집 확충도 마찬가지의 맥락이다. 게다가 민간에 비해 국공립이 더 안전하다는 믿음은 적어도 공무원이 어린이 인권에 관한 감수성이 높고 관리·감독을 철저히 한다는 전제 위에서 가능하다. 관리·감독 강화는 곧 예산 증가를 의미한다. 고작 5.3%에 불과한 국공립 어린이집을 늘리려면 더 많은 예산이 소요된다. CCTV 설치로 예산을 퍼붓고 나면 예산이 과연 남아 있을까. 무상보육 지원비용을 교육청에 떠넘기고 성과만 챙기던 정부가, 단 한 번의 국제 경기를 치르느라 생긴 예산 공백을 보육비 인하로 메우던 지방자치단체들이 과연 이 대책을 두고는 어떤 싸움을 벌일지, 예산이 증액이라도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가정 양육 활성화라는 대책은 또 어떤가. 양육의 사회화가 제기된 맥락을 완전히 거스르고 있다는 문제 말고도 가정이 더 안전하다는 전제부터 신화에 불과하다. 아동학대의 절대다수가 가정에서 발생한다.

텃밭을 갈아엎어야

어떤 대책도 어린이를 바라보는 시선, 어린이가 이 사회에서 갖는 위치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과정과 연계되지 않는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어린이는 맡기고 찾는 사물처럼 말해진다. 탁아방에서 어린이집으로 이름은 바뀌었지만 어린이집의 주인은 교사·원장이다. 행동 교정을 명목으로 이뤄지는 폭력은 대개 학대가 아닌 ‘벌’로 해석된다. 보육교사의 행위에는 분노하던 부모가 ‘내 아이’에겐 비슷한 행위를 가한다. 똑같은 행위도 유아기엔 학대로 보면서 청소년기엔 ‘맞을 짓 한 놈들 가르친 것’이 된다. 이런 기만과 이중 기준의 텃밭에서 학대는 자라난다. 이 텃밭을 갈아엎어야, 어린이가 학대를 인식할 촉과 거부할 힘을 갖도록 도울 수 있다. 인천 연수구 어린이집 아동학대 사건은 상황을 목격한 어린이의 증언으로 공론화될 수 있었다. 배경내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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