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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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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멈추지 않을 권리

등록 2014-12-02 06:56 수정 2020-05-02 19:27

몸무게가 40kg은 될까. 작고 깡마른 몸집이었다. 방사선 치료를 받느라 빠졌던 머리카락이 고르지 않게 새로 자라나고 있었다. 암과 씨름하던 어머니의 인생에 난데없이 딸의 죽음이 먼저 찾아왔다. 마른 눈물을 삼켜가며 4·16 참사와 아깝게 놓쳐버린 딸을 이야기하는 어머니의 시계는 그날 직후에 멈춰서 있는 듯했다. 그 잔인했던 봄을 지나 여름, 가을을 넘겨 초겨울 바람이 차갑게 몰아치던 11월의 끝자락이었다. 그날은 세월호 범정부사고대책본부가 해체된 날이기도 했다. 세월호는 이제 끝났다는 분위기가 사회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딸이 없는 세상이 여전히 꿈처럼 느껴진다. 딸 채원이가 쓰던 방은 아버지가 사다준 커다란 곰 인형과 함께 마치 주인이 금방이라도 돌아올 것처럼 그대로 간직되어 있었다. 영정사진으로 쓰였음직한 커다란 액자 사진만이 주인의 부재를 알려주고 있었다. 그날 이후 어머니의 세상에는 지독한 슬픔과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들어찼다. 어머니는 딸의 사망신고를 아직 하지 못했다.

아직 사망신고를 못한 엄마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세월호 유가족 구술을 기록하는 작가단에 합류하면서 그들이 겪은 고통을 온전히 듣고 함께 기억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했다. 그들의 고통은 살릴 수도 있었던 아이들이 수장되는 모습을 속절없이 지켜봐야 했던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어떤 이에겐 컨테이너 안치실 바닥에 덮개도 없이 뉘어 있던 아이의 주검이 한이 되었고, 어떤 이는 주검이 뒤바뀌어 아이를 또 한 번 놓칠 뻔했던 아찔한 상황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어떤 이는 상황판 하나 없이 설명도 제대로 않는 재난대책 당국에 피가 말랐고, 어떤 이는 주검을 찾은 뒤에도 어째야 할지 몰라 허둥지둥 헤매었던 시간이 지독히도 외로웠다. 어떤 이는 ‘자식의 목숨값’이라는 비아냥거림에 당연한 배상에 대한 요구도, 나라에 돈 한 푼 내는 게 아까울 지경인 분노도 황급히 숨겨야 했다. 어떤 이들은 남은 아이마저 어찌될까 지금도 두려움 속을 헤맨다. 어떤 이에겐 그만할 때도 됐다는 조언이, 호기심 어린 시선조차 칼이 되어 꽂혔다. 국민 혈세 운운하며 인양 비용 문제를 꺼내든 정치인들 앞에 유가족이 되는 게 소원이라는 실종자 가족들의 고통은 설 자리를 잃고 있다. 4·16 참사는 세월호를 꼭 닮은 이 나라가 빚어낸 혹독한 결과물이었지만, 이 나라는 겨우 뭍으로 나온 주검들에게도 가혹했고, 휘청거리는 가족들에게조차 냉담했다.

이 멈추지 않는 슬픔들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유가족의 고통은 그저 그들만의 것인가. 불어에서 푸닥거리를 의미하는 ‘콩쥐라시옹’(conjuration)에는 ‘함께(con-) 맹세하다/모의하다(-juration)’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푸닥거리 혹은 사회적 애도는 그저 슬퍼하기가 아니라 산 자와 죽은 자, 산 자와 또 다른 산 자들이 함께 모여 죽음을 빚어낸 사회와 근본적인 단절을 모의하는 행위다. 세월호 참사가 사회구조적 폐해가 응축된 결과임을 되뇌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참사를 만들어낸 국가가 생명과 안전을 보장해주기를 또다시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다. 참사가 빚어지는 과정에서 잊혀버린 권리들, 또다시 훼손된 권리들을 결코 침범할 수 없는 굳건한 기준으로 만들어내는 사회적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 위험을 알고 통제할 권리, 주검을 존엄하게 인도받을 권리, 무엇보다 슬픔을 멈추지 않을 권리 등 고통 속에서 길어올린 권리들을 구체화하는 작업이 시민들의 모의를 기다리고 있다.

약속이자 권리의 재확인

때마침 12월10일 세계인권선언 기념일에 ‘존엄과 안전에 관한 인권선언’ 운동이 내년 4월16일 채택을 목표로 출발한다. 선언운동은 ‘잊지 않겠다’는 약속의 재확인이자 유가족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권리를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배경내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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