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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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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가 행해지기 위해 또한 보여져야 한다”

커밍아웃한 주자네 베어 독일 연방헌법재판소 재판관…
동성 커플 보호하는 동반자등록법 시행으로 “사회는 더 건강해져”
등록 2014-10-23 05:55 수정 2020-05-02 19:27
지난 9월30일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주자네 베어 재판관(왼쪽)과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이준일 교수가 만나 차별 문제에 대한 대담을 나누었다. 베어 재판관은 동반자등록법 시행 이후 독일 사회에서 동성 커플의 권리가 점진적으로 확대됐으며 사회적 인식 변화를 가져왔다고 소개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지난 9월30일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주자네 베어 재판관(왼쪽)과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이준일 교수가 만나 차별 문제에 대한 대담을 나누었다. 베어 재판관은 동반자등록법 시행 이후 독일 사회에서 동성 커플의 권리가 점진적으로 확대됐으며 사회적 인식 변화를 가져왔다고 소개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등록된 동반자’(registered civil partner ship).

독일 연방헌법재판소 홈페이지에 게재된 주자네 베어(50) 재판관의 이력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다. 동료 재판관의 소개에서 볼 수 있는 ‘기혼’(married)이라는 설명 대신이다. 여성인 베어 재판관이 같은 성(性)의 배우자와 결혼과 유사한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독일에서는 2001년부터 동성 커플에 대한 법적 보호를 위해 동반자등록법을 시행하고 있다. 베를린 훔볼트대학 공법과 여성학센터장을 거쳐 2011년 취임한 그는 ‘동성애자임을 커밍아웃’한 사상 첫 연방헌재 재판관이다. 연방헌재 재판관은 의회 상원과 하원에서 각각 8명을 선출하고 임기는 12년이다. 지난 9월30일,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베어 재판관과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이준일 교수가 만나 공통 관심사인 차별 문제에 대한 대담을 나누었다. 국내 변호사·연구자로 구성된 ‘성적지향·성별정체성 법정책연구회’가 세계헌법재판회의 3차 총회 참여차 한국을 찾은 베어 재판관과 개별적으로 접촉해 마련한 자리였다. 베어 재판관은 동반자등록법 시행 이후 독일 사회에서 동성 커플의 권리가 점진적으로 확대됐으며 사회적 인식 변화를 가져왔다고 설명했다.

질 높은 판결, 다른 시각 공존할 때 가능

이준일 교수(이하 이): 재판관님은 독일 국민의 대표자이면서 여성을 대표하고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하는지 궁금하다.

주자네 베어 재판관(이하 베어): 나는 다양성이 판결의 질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라고 믿는다. 수준 높은 판결을 위해선 법에 대한 이해만큼이나 세상에 대한 이해도 중요하다. 헌법에 규정된 권리나 인권과 관련해 질 높은 판결을 원한다면 정치적·이념적으로 편향되지 않고 다양한 인생 경험에서 나오는 서로 다른 시각이 공존하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연방헌재 재판관으로 선출된 데는 커밍아웃한 동성애자라는 ‘성적 지향’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나는 여성을 대표한다기보다, 여성과 성소수자로서의 경험에서 얻은 시각을 제공하고, 그런 시각이 다른 시각과 만남으로써 판결에 기여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대표성이 있기는 하다. 영어 표현에 ‘정의는 행해져야 한다. 그러나 정의가 행해지기 위해서는 또한 보여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중년 백인 남성만 (연방헌재에) 있는 그림은 남성, 여성, 다양한 연령층이 있는 그림과 다르다.

: 재판관으로 임명될 때 보수 진영으로부터 역풍은 없었나.

베어: 다수파인 보수정당에서 나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레즈비언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그들과 따로 대화를 나눠야 했다. 그들은 내가 친절하게 말하지 않을 것이며, 유머감각이라곤 없고 좋은 동료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특정 이념에 기울까봐 우려했다. 기본권을 수호하는 데 헌신했음을 증명해야 했다. 취임이 확정된 뒤, 나를 비방하는 웹사이트가 생겼고 혐오감을 담은 전자우편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움직임이 큰 호응을 얻은 건 아니다. 하지만 항상 무슨 일이 일어날까봐 주의해야 하는 것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역풍이라기보다,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간다고 해서 동성애 혐오가 멈추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이다. 내 존재는 다른 재판관들에게 법원 바깥에 존재하는 동성애 혐오와 이로 인한 잠재적 위험을 알려주었다. 나 같은 사람이 존경받는 재판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독일이 ‘관용적 사회’임을 보여주는 신호이고, 보수 진영을 포함한 독일 사회는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2등적 지위라도 국가 인정은 큰 힘

: 한국에서는 동성 커플을 법적으로 인정하면 동성애자 수가 늘어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동반자등록법이 시행된 뒤 이런 우려가 현실이 됐나.

베어: 내가 알기론 아니다. 아무도 동성애자 증가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젊은 학생들의 자살이 줄었다. 그동안 여성성·남성성과 관련해 사회적 압박이 많았던 것이다.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는 동성애자뿐만 아니라 이성애자에게도 해를 끼친다. 동반자등록법 시행으로 사회가 더 건강해졌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서로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는 토대를 마련했으며, 동성애자들은 두려워하거나 숨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 독일은 결혼 대신 동반자관계 등록을 통해 법적 보호를 하고 있다. 미국 흑백 차별의 근간인 ‘분리하되, 동등하게’(separate but equal) 원칙과 비슷한 것 아닌가.

베어: 분리됐지만 거의 동등하다. (웃음) 독일 연방헌재는 10여 년 전 동반자등록법 관련 첫 판결에서 결혼을 이성 간 결합이라고 판시했다. 미국의 인종차별적 분리주의 정책과 비교하기는 좀 그렇지만, 상징적·문화적 측면에서 등록동반자 관계가 결혼에 비해 2등적 지위인 것은 맞다. 하지만 오늘날 공동입양(등록된 커플이 공동으로 입양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것을 제외하면, 등록동반자 제도가 지닌 법적 효력은 결혼과 거의 동등하다. 우리 재판소는 지난해 동성 커플 한쪽이 다른 한쪽의 입양 자녀에 대해 친권을 가질 수 있다고 판결했다. 이어 동성 커플을 세액공제 혜택에서 배제하는 것은 차별적이라고 판결했다. 이제 공식적인 자리에서 내 파트너를 동반자가 아닌 ‘배우자’라고 소개한다. 10년 전이었다면 도발로 간주됐을 것이다. 진보적이지 않은 동료들도 ‘부인께 안부 전해주세요’라고 말한다. 2등적 지위이긴 하지만, 국가가 우리의 관계를 인정한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 동반자 등록을 한 다음날 누군가 와서 ‘축하해요’라고 했는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보호받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동성 결혼 인정, 단계적으로 바뀔 것

: 독일 연방헌재에서 헌법상 결혼은 이성 간 결합이라고 판시했다고 하셨다. 사실 헌법엔 그런 말이 명시돼 있지 않은데, 어떻게 그런 결론이 났는지 궁금하다.

베어: 모든 헌법에는 명확하지 않은 용어들이 있다. 독일 헌법에도 그런 개념들이 있고, 심지어 기본권과 관련한 용어 중에도 그 내용이 입법부에 의해 정의되고 채워지는 경우가 있다. 자연적 재산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입법부가 재산권의 성격과 범위에 대해 정의를 내린다. 결혼도 비슷하다. 재판부는 문화적 전통과 1945년 헌법이 만들어질 때 오간 모든 이야기를 고려해, 결혼이란 이성 간 결합으로 여겨진다고 한 것이다.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 의회는 (2005년에) “지금부터 동성 간의 친밀하고 헌신적 관계도 결혼이라 정의한다”고 했다. 독일도 헌법을 바꾸지 않고 이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입법부가 이런 결정을 내리면 우리(사법부)가 따를 것이다.

정리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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