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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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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애써 성별을 밝혀야 하나

여성이 아니면 남성으로 구분하는 사회의 이분법…
성역할을 구분하는 회사에선 트랜스젠더에 대한 ‘배려’와 ‘배제’로 밀어내기
등록 2014-10-03 03:53 수정 2020-05-02 19:27

자은(가명)은 자신이 mtf(male-to-female)/트랜스여성인지, ftm(female-to-male)/트랜스남성인지 굳이 밝히려 하지 않았다. 트랜스젠더 모임에서 우리는 처음 만났는데, 트랜스젠더와 비트랜스젠더 구분 없이 참가하는 자리였기에 자은이 트랜스젠더인지 아닌지 (어떤 느낌은 있을 수 있다고 해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비트랜스젠더는 아니라는 말을 했기에 자은이 트랜스젠더려니 했다. mtf/트랜스여성인지 ftm/트랜스남성인지, 단지 트랜스젠더로 설명하는지, 혹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설명하는지 굳이 묻지도 않았다.

더벅머리에 남방과 면바지를 입고

조금 궁금하긴 했다. 만날 때마다 자은은 더벅머리에 남방과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이런 복장은 자은의 성별을 가늠할 수 없도록 했다. 굳이 mtf/트랜스여성과 ftm/트랜스남성으로 구분하자면, 어느 쪽으로도 가능한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영화 〈소년은 울지 않는다〉는 생물학적 성별을 뛰어넘어 살고자 했던 사람의 일생을 그린 작품이다. 사람들은 옷차림을 보고 성별을 판단하지만, 편견이 판단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20세기 폭스코리아 제공

영화 〈소년은 울지 않는다〉는 생물학적 성별을 뛰어넘어 살고자 했던 사람의 일생을 그린 작품이다. 사람들은 옷차림을 보고 성별을 판단하지만, 편견이 판단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20세기 폭스코리아 제공

주변의 ftm/트랜스남성 중 몇몇은 ‘센스 없는’ 패션 스타일로 놀림을 받곤 했다. 그들은 베이지색 면바지에 체크무늬 남방을 입고 돌아다니곤 했는데, 어쩐지 주변에서 “딱 아저씨 스타일로 나왔네”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패션이었다. 그래서 옷 잘 입는 다른 ftm/트랜스남성에게 옷 입는 법을 좀 배우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놀리듯 ‘아저씨 스타일’이라고 했지만, ‘칭찬’이기도 했다. ‘아저씨 스타일’은 그가 자신이 원하는 젠더를 표현하는 방식, 혹은 남성성을 실천하는 방식을 가장 잘 재현한다. 그 스타일로 자신이 원하는 남성적 존재로 잘 통할 수 있다면 그것은 충분히 성공적이고 훌륭한 선택이다. 자은의 스타일은 내가 알고 있는 몇몇 ftm/트랜스남성의 것과 닮았기에 자은을 ftm/트랜스남성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자은의 모습은 흔한 mtf/트랜스여성의 스타일이기도 했다. 미디어에서 주로 재현하는 mtf/트랜스여성은 언제나 ‘예쁜’ 외모에 ‘여성스러운’ 스타일이다. 미디어에 출현하지 않는 mtf/트랜스여성 역시 의료적 조치를 어느 정도 하고 있다면 화장을 하고 여성복을 입는 등 여성스럽게 멋을 내고 다닌다. 하지만 의료적 조치를 하고 있건 아니건, 아직 안 했건 하지 않기로 선택했건 상관없이 또 다른 많은 mtf/트랜스여성은 흔히 ‘여성스럽다’고 말하는 스타일을 취하지 않는다. 티셔츠나 남방, 청바지나 면바지 등 흔한 복장을 주로 입는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남자처럼 입었다고 인식할 법도 하다.

mtf/트랜스여성이 비트랜스젠더 여성이 아니라 비트랜스젠더 남성과 구분하기가 더 어려운 스타일로 입고 다니기에 많은 사람이 잘못 인식한다. 하지만 남방이나 후드티에 청바지를 입는 스타일(패션에 별로 신경을 안 쓰는 비트랜스젠더 남성의 그것과 매우 닮은 것만 같은 스타일)은 mtf/트랜스여성으로 살아가는 방식 중 하나며, mtf/트랜스여성이 선택할 법한 여러 스타일 중 하나다. 이것은 트랜스젠더가 아닌 것처럼 살아가기 위해서, 혹은 트랜스젠더란 점을 밝히기 두려워서 선택한 것이 아니다. mtf/트랜스여성이어서 이런 스타일을 입는다. 어느 트랜스여성이 자신을 남성으로 알고 있는 주변 사람에게 ‘나는 남성이 아니야’ 혹은 ‘나는 여성이야’라고 밝히고 이른바 여성의 옷을 입고 다니기 시작하면 주변 사람들이 “이제까지 남자처럼 잘 하고 다녔으면서 갑자기 왜 그래?”라고 반응하는 것은 이런 ‘오해’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까지 남자 옷을 입고 남성처럼 다닌 것 같겠지만, 경우에 따라선 남성처럼 다닌 것이기도 하지만, 이제까지 mtf/트랜스여성으로, mtf/트랜스여성처럼 옷을 입고 다녔다. mtf/트랜스여성의 스타일을 이해한다면 자운을 mtf/트랜스여성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자은이 스스로 애써 밝히지 않듯 우리가 요즘 근황, 쉬는 날 집에서 하는 일, 최근 재밌게 본 영화 등을 이야기하는 데 성별 정보는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성별은 자은이 사회생활을 하는 데엔 종종 때론 자주 문제가 되었다. 특히 처음 취직을 하고 회사생활을 할 때 그랬다.

어떤 일을 부탁해야 할지 헷갈려 했다

몇 년 전 처음으로 소규모 회사에 취직했는데 나쁘지 않은 곳이라고 했다. 그 회사는 남성에겐 무거운 짐을 나르는 것과 같은 일, 여성에겐 커피를 타거나 복사를 하는 것과 같은 일을 시키는 ‘흔한’(성역할 구분을 유지하는) 회사였다. 자은은 자신에게 주어진 기본 업무 외에 생수통을 갈거나 무거운 짐을 나르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고 했다. 다과실을 정리하고 쌓여 있는 다 쓴 컵을 씻는 등의 일도 늘 하던 일이기에 어렵지 않았다. 회사 사람들은 종종 자은을 ‘독특한 사람’이라고 얘기했지만 직장 동료와의 관계는 대체로 좋았다. 다만 자신을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구분해서 대하는 태도가 불편했고, 그저 그 불편을 해소하려는 차원에서 회사 사람들에게 트랜스젠더라고 밝혔다. 말하기 전엔 두려웠고 그래서 많이 망설였지만, 또 한편으론 이게 무슨 큰일인가 싶어 무덤덤하기도 했다. 자은의 말을 들은 회사 사람들은 별일이 아니란 듯 받아들였고, 어쩐지 이런 반응이 의외이기도 했지만 그럴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남성의 일과 여성의 일을 나누는 회사의 분위기가 문제를 야기했다. 사람들은 자은에게 어떤 일을 부탁해야 할지 헷갈려했고 어려워했다. 무거운 짐을 옮겨야 할 때, 사람들은 자은에게 이를 요청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다. 이전처럼 요청하다가도 갑자기 뭐라도 깨달았다는 듯 요청을 철회했고, 자은은 짐을 옮기는 일에서 제외되었다. 가끔은 자은에게 무거운 짐을 나르는 일을 요청했는데, 그럴 때면 자은의 힘과 참여를 과하게 칭찬했다. 커피를 타거나 다과실을 치울 때도 자운에게 요청하기를 망설였다. 기분이 내키는 날 자은이 커피를 타서 직원들에게 돌리면 과도하게 칭찬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 분위기가 부담스럽고 당혹스러워서 자은은 커피를 타거나 다과실을 치우는 일을 그만뒀다.

사람들은 자은에게 친절했지만 그들의 ‘배려’는 자은을 이제까지 해왔던 일에서 밀어내는 효과를 야기했다. 기본 업무 혹은 중요한 업무를 진행할 땐 문제가 없었지만 그 외의 여러 일에서 ‘배제’되면서 자은은 결국 회사를 그만뒀다. 회사 동료와 길게 이야기를 나누면 그럭저럭 상황이 풀릴 수도 있겠지만, 트랜스젠더에게 어떤 일을 맡겨야 할지 모르겠다는 반응, 일을 맡길 때마다 뭔가 떨떠름하다는 표정이 스쳐지나가는 걸 떠올리니 애써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마침 다른 회사에서 좋은 조건으로 이직을 제안해왔기에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성별을 안다고 해서 무얼 더 아는 건가

자은은 함께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떤 성별인지 묻지 않아서 편하다고 했다. 자은의 성별을 궁금해했던 나는 속으로 미안했지만, 생각해보면 자은의 성별을 안다고 해서 자은에 대해 무얼 더 아는 건가 싶고, 성별을 안다고 해서 자은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는 것 같지도 않다.

루인 트랜스/젠더/퀴어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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