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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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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워만 할 수 없다

네덜란드·독일 등 합의제 민주주의를 이룬 선진 복지국가들의 모습…

정치제도 개혁, 만능은 아니지만 꼭 필요한 조건
등록 2014-10-02 06:19 수정 2020-05-02 19:27

“복지국가는 정치가 낳은 아이이며, 그러므로 정치의 미래이기도 할 것이다.”
복지국가 연구의 세계적 석학인 에스핑안데르센 스페인 폼페우파브라대학 교수의 말이다. 한 나라의 정치체제가 복지국가 체제를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의미다. 복지국가와 정치체제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는 전세계적으로 활발히 진행돼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주로 복지국가 건설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진보적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이런 논의가 진행 중이다. 이들은 특히 우리나라가 복지국가를 이루려면 선거제도 개편을 통해 ‘다수제 민주주의’에서 ‘합의제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합의제 민주주의 기획 연재 1회(제1029호 표지이야기 참조)에서 소선거구제로 대표되는 우리나라의 양당 정치체제(다수제 민주주의)가 어떤 한계를 나타내고 있는지를 다뤘다면, 2회에서는 합의제 민주주의를 이룬 복지 선진국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아본다.

복지 수준, 비례대표제 국가가 월등히 높아

합의제 민주주의란 무엇을 의미할까. 합의제 민주주의를 이해하려면 우선 이와 대립되는 개념인 다수제 민주주의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수제 민주주의는 한마디로 ‘다수결의 뜻에 따르자’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바로 대표적인 다수제 민주주의 국가다. 우리나라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 지역구에서 가장 많은 표를 받은 1명을 뽑는 소선거구제를 채택하고 있다. 다수결의 원칙에 충실한 제도다. 이런 다수결의 원칙은 민주주의 정신에도 부합하며 일견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다수로 선택되지 않은 나머지의 모든 의견은 무시된다는 뚜렷한 한계가 있다. 1등과 표수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2등이 얻은 표는 사표로 버려지는 현실이 이런 한계를 잘 나타낸다.
반면 합의제 민주주의의 명제는 ‘가능한 한 많은 국민의 뜻을 반영하자’는 것이다. 언뜻 다수결의 원칙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이지만 분명히 다르다. 합의제 민주주의는 ‘다수를 따르되 다수의 크기를 최대한 늘리자’는 것이다. 다수가 선택한 하나의 의견만 채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견이 조금 조정되더라도 최대한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의견을 채택하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협상과 타협이 중요시될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하다.
합의제 민주주의의 대표적인 선거제도로는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가 있다. 유권자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을 선택하고, 각 정당은 자신이 얻은 득표율에 따라 의석수를 배분받는다. 비례성이 높은 이 선거제도는 새로운 정당의 의회 진입을 상대적으로 쉽게 만들어 자연스럽게 다당제가 형성되도록 돕는다. 다당제 아래에서는 하나의 당이 의석수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기 힘들기 때문에 집권을 위해서는 정당 간의 연합이 필요하다. 다당제 국가에서 ‘연립정부’ 형태의 행정부가 꾸려지게 되는 이유다. 이 과정에서 서로 이해관계를 조금씩 양보하는 ‘협의’의 문화가 발달하게 된다. 합의제 민주주의와 다수제 민주주의의 더 구체적인 차이는 표를 참조하면 자세히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합의제 민주주의는 복지국가와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일단 선진 복지국가라고 일컫는 북유럽 국가의 대부분이 합의제 민주주의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 큰 시사점을 던져준다. 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지난 8월15일 에 게재한 칼럼에서 “정치경제학계의 석학인 아이버슨과 소스키스는 소선거구 일위대표제 등의 단순다수제 선거제도를 택하고 있는 국가에선 중도우파 정부가 지배적이며, 비례대표제를 택하고 있는 국가에선 중도좌파 정부가 압도적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1945년에서 1998년 사이 17개 선진 민주국가에 들어섰던 모든 정부의 이념 성향을 분석한 그들의 2006년 연구에 의하면 단순다수제 국가에선 정부의 약 75%가 중도우파였던 반면, 비례대표제 국가에선 약 74%가 중도좌파였다. 그리고 복지 수준은 당연히 중도좌파의 성격이 강한 비례대표제 국가가 월등히 높았다”고 말했다.

‘네덜란드병’을 고칠 수 있었던 이유

합의제 민주주의는 소득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높을수록 불평등함을 나타냄)에서도 다수제 민주주의와 차이를 보인다. 강명세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논문 ‘민주주의와 복지국가’에서 “비례대표제는 사회적 소수의 정치적 목소리를 허용한다는 점에서 다수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재분배의 요구를 수용하기 쉽다. 비례대표제에서는 세전 지니계수(백분율로 환산)가 44.7%였으나 세후 지니계수는 큰 차이로 하락한 31.9%이다. 한편, 양당제의 다수제 선거제도에서 세전 지니 및 세후 지니는 각각 41.4%, 39.6%로 불평등 완화 효과는 매우 적었다”고 분석했다. 합의제 선거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에서 세금을 걷은 이후, 즉 제도적으로 소득을 재분배한 이후의 소득 불평등 지수가 더 낮다는 것이다.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것은 합의제 민주주의가 노동과 자본 등 계층별 이해 당사자들 간에 협의와 소통을 중요시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를 만들고, 이를 통해 상대적으로 노동계층 혹은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의 목소리가 반영될 여지가 더 커지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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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합의제 민주주의를 통해 복지국가 건설에 성공한 대표적인 나라들을 살펴보자. 합의제 민주주의를 이루는 국가 가운데 전형적인 성공 사례로 꼽히는 곳은 네덜란드다. 일찍부터 복지국가를 건설해온 네덜란드는 1980년대 복지 과다로 인한 저성장을 겪으며 ‘네덜란드병’이라는 오명을 쓰기도 했지만, 1990년대 이후에는 정부가 ‘유연안정성’을 골자로 한 ‘노·사·정 대타협’을 지속적으로 이끌면서 다시 ‘네덜란드의 기적’을 이룬 나라로 인정받고 있다. 유연안정성이란 정규직 보호를 완화해 비정규직으로의 전환을 쉽게 하는 대신,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보호 장치를 획기적으로 강화하는 방식이다.

보랏빛 정부의 합리성과 효율성

네덜란드는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채택하는 대표적인 다당제 국가다. 유권자는 국회의원을 뽑을 때 인물이 아닌 정당을 선택하고 의석수는 정당이 얻은 득표율에 따라 배분된다. 네덜란드는 이 제도를 바탕으로 1980년대 이후 우파 정당(자유당), 중도 정당(기민당), 좌파 정당(노동당)들이 꾸준히 서로 파트너를 교체해가면서 연립정부를 구성해왔다. 그동안 네덜란드에서는 새로운 연립정부가 구성될 때 정당 전체가 싹 바뀌어버리는 ‘전면 교체’가 이뤄지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어떤 연립정부라도 한쪽의 파트너는 항상 이전 정부를 구성했던 정당이 포함됐다. 자연히 국정 운영의 안정성이 지속될 수 있었다. 우파 정당만으로 이뤄진 연립정부가 나타난 적도 없었다. 모든 연립정부에는 좌파 혹은 중도 정당이 참여했다. 네덜란드가 1990년대 ‘노동의 유연성’을 포함시킨 ‘경제성장’ 위주로 정책의 무게중심을 옮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노동의 안정성’을 강화할 수 있었던 이유다.

일반적인 다당제의 경우 중도 정당이 중심에 서서 좌파 정당이나 우파 정당과 연합하는 방식으로 연립정부가 이뤄지지만, 네덜란드는 1994년에서 2002년까지 중도 정당을 뺀 채 우파 정당과 좌파 정당이 대연정을 맺고 이른바 ‘보랏빛 정부’를 운영하기도 했다. 최태욱 교수는 논문 ‘경쟁력을 위한 사회합의주의 발전의 정치제도 조건’에서 이러한 네덜란드의 정치 역사를 소개하며 “좌우 합작물인 보랏빛 정부는 노동이나 자본 등 어느 특정 이익집단에게 편향적일 수가 없어 그 정부 아래에서 사회합의주의의 작동은 더욱더 안정적이었고, 따라서 그 시절에 네덜란드 사회합의주의의 제도화 수준이 크게 높아진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독일도 대표적인 합의제 민주주의 국가로 꼽힌다. 그러나 독일은 네덜란드처럼 단순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가 아닌 이른바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라고 부르는 혼합형 선거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독일의 선거제도는 소선거구제와 비례대표제를 혼합한 방식이다. 예를 들어 국회의원 정수가 100명이라고 한다면 지역구 의원 50명과 비례대표 의원 50명을 뽑는다. 유권자는 1인2표를 행사하는데 지역구 후보에 1표, 지지하는 정당에 1표를 준다. 언뜻 우리나라 선거제도와 비슷해 보이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역구 후보 선출이 우선시되는 반면, 독일은 정당 득표율이 우선이다. 예를 들어 독일의 경우 A 정당이 50개의 지역구 가운데 30명을 당선시켰고 정당 득표율은 40%를 얻었다고 치면, 이 정당은 득표율에 따라 40%의 의석수, 즉 40개의 의석수를 차지한다. 이 의석수는 지역구 당선자 30명에 비례대표 10명을 채우는 방식이 된다. B 정당의 경우 지역구에서 2명이 당선되고 정당 득표율이 30%라고 한다면, 지역구 의원 2명에 비례대표 28명을 얻어 30명의 의석수를 차지하게 된다. 우리나라처럼 지역구에서의 당선이 주요하게 작용하는 선거제도보다 비례성이 훨씬 더 많이 보장되는 방식이다.

이런 선거제도를 갖춘 독일은, 잘 알려졌다시피, 정당 간 대연정을 통해 정부를 운영하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자신의 집권 기반인 기민-기사당 연합(중도우파)을 통해서만 국정을 운영하지 않고, 자민당(우파) 혹은 사민당(중도좌파)과의 연정을 통해 여러 가지 정책을 실현해왔다. 메르켈 정부는 이런 대연정 체제를 통해 유로존의 경기침체 상황에서도 독일 경제를 안정적으로 이끌고 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지난해 총선에서도 메르켈 총리가 속한 기민-기사당 연합이 41.5%의 득표율을 얻어 메르켈 총리가 치른 세 차례의 총선 가운데 최고의 성적을 냈지만, 역시나 단독정부 구성을 위한 과반 의석을 차지하지 못해 25.7%를 얻은 사민당과의 연정이 불가피하게 됐다. 메르켈 정부는 이 연정 속에서 지난 7월 ‘최저임금제 전면 시행’이라는 굵직한 정책을 국회에서의 압도적 찬성으로 처리하는 등 타협의 결과물들을 내놓고 있다.

제도 개혁하면 사회합의주의로 전환될까?

선학태 전남대 교수는 “독일 다당제는 비례제 선거제도로 인해 어떤 정당도 과반 의석 이상을 얻는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념 블록을 뛰어넘어 ‘정당 간 교차 파트너십’ 사이클이 반복된다. 이러한 사이클은 정당 간에 이념적·정치적 갈등과 투쟁의 강도를 낮추고 소통·타협·합의의 정치 문화를 정착시키는 기제로 작동한다”고 설명했다.

이 밖에도 오스트리아,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 벨기에 등 합의제 민주주의를 통해 복지국가를 이룬 나라가 여럿 있다. 물론 이런 나라들은 각각의 정치체제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고유의 역사와 문화가 작용했고 현재도 그 틀 안에서 운영되고 있다. 우리나라가 무작정 이들의 선거제도를 수용한다고 해서 저절로 이들과 똑같이 사회합의주의가 바탕이 되는 정치가 이뤄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낙관론이라는 얘기다. 고원 서울대 교수는 ‘연합 정치의 유형과 복지국가의 진로’라는 글에서 “연합 정치는 일률적으로 정의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연합 정치는 그 사회의 역사적 맥락과 제도적 조건, 사회정치적 상황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태욱 교수도 “비례대표제가 다당제와 연정형 권력 구조를 추동하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언제나 구조화된 다당제의 발전과 그것을 전제로 하는 포괄형 연립정부의 제도화까지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구조화된 다당제는 비례대표제를 활용해 스스로를 유력한 대중정당으로 키워낼 수 있는 이념과 가치 지향성이 분명한 좌-우-중도파 정치세력들이 존재할 때에야 비로소 확립된다. …정치제도의 순기능은 정치세력들이 그것을 제대로 활용할 때에만 작동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많은 전문가들은 우리나라가 양당제의 폐해를 극복하고 복지국가로 나아가려면 제도 개혁을 통해 합의제 민주주의로 변화하는 것이 우선시돼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선거제도 개혁이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라는 의미에서다.

혁신 논의는 기피하는 정당들

고 교수는 “(한국에서의) 정당 재편 논의가 조직적 통합에만 매몰돼 내부의 진통을 유발할 혁신의 조건들에 대한 논의는 기피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제도적 관점에서 복지국가 친화적인 정당 체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현행 단순 다수 소선거구제를 개선해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대거 확대해야 하는데, 이를 연합 정치의 조건으로 삼기 위한 노력은 간과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최 교수도 “최종 목적은 노동친화적인 포괄형 연립정부가 상시적으로 나타나는 합의제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출발은 당연히 비례대표제 개혁에서부터다. 선거제도의 비례성이 충분히 높아져야 이념과 정책 중심의 유력 정당들이 부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나라에 적합한 합의제 민주주의는 어떤 방식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다. 이러한 합의제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한 선거제도 개혁의 움직임이 어디까지 왔는지, 실현 가능한 것인지도 진단해봐야 한다. 기획 연재 3회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다룬다.

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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