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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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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교육감

등록 2014-06-10 08:11 수정 2020-05-02 19:27

일요일 아침 전화기가 요란하게 계속 울렸다. 이틀 전, 자녀가 당한 학교폭력 사건으로 상담전화를 걸어왔던 남자의 전화였다. ‘뭐야, 이 사람. 보내달라는 자료는 보내지도 않고 왜 일요일 아침 댓바람부터 전화야!’ 울컥 짜증이 솟아 전화기를 꺼버렸다. 1년 전에 일어난 사건인데다 서면 사과 조치에 불복해 가해 학생 부모가 소송까지 진행하고 있는 난감한 사건이라 전자우편으로 관련 자료를 먼저 보내달라고 했었다. 그런데 자료는 보내지도 않은 채 일요일 아침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불쑥 선을 넘어오니, 움찔 마음이 뒤로 물러섰다. 월요일이 되어 전화를 걸어보았더니 사실은 전자우편을 쓸 줄 모른다며 팩스번호를 물어왔다. 전자우편 주소를 건네받고 난처했을 그를 생각하니 내 옹졸했던 짜증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튿날 남자는 다시 사무실 근처에 와 있다며 전화를 걸어왔다. 다짜고짜 방문에 난처해하니 어떤 자료를 보내야 할지 몰라 직접 건네려고 오셨단다. 어지럽게 꽂혀 있는 서류 뭉치들 속에서 필요한 자료를 골라내 복사를 하고 돌아왔다. 기다리던 남자는 조용히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학교와의 싸움은 교양과의 싸움이 되고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며칠 사이 나는 그 남자에게 여러 번 부끄러운 실수를 저질렀다. 외고에서 일어난 사건이란 얘기를 들었을 때 중산층 이상의 가정이라 짐작했다. 전화기 너머에서 자녀가 당한 폭력 사건을 말하면서도 건조했던 목소리를 자존심 강한 가부장의 경직된 목소리로 들었다. 일요일 아침의 전화와 다짜고짜 방문을 자기 사정만 급한 줄 아는 성마른 이의 배려 없는 자세라 여겼다. 그런데 실제 만나본 남자는 ‘사회적 배려 전형’으로 아이를 외고에 보낸, 그렇게 기숙사학교에 보낸 딸이 왕따 괴롭힘을 당한 뒤 1년 가까이 방에서도 잘 나오지 않게 된, 억울한 사연을 들고 문을 두드린 곳마다 냉대를 받았음직한 움츠린 모습이었다. 약함을 드러낼수록 냉대가 돌아오곤 했을 이 세상에서 전자우편을 쓸 줄 모른다는 이야기를 꺼내기가 얼마나 어려웠을까. 절박함을 들킬수록 기만과 악용이 돌아오곤 했을 이 세상에서 마음을 다 털어놓고 도움을 호소하기가 얼마나 어려웠을까. 딸에게 폭력을 가한 학생들과 이를 조장한 학교와의 싸움은 시작되자마자 교양과 권위로 무장한 이들과의 싸움, 온갖 사회적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있는 집’과의 싸움, 세상 전체와의 싸움이었을지 모른다. 그 남자의 고단한 발걸음은 어디쯤에서 편히 쉴 수 있을까. 그의 딸은 세상을 향해 언제쯤 문을 열게 될까.

6·4 지방선거로 이른바 진보 교육감들이 대거 당선됐다. 세월호 참사 이후 ‘성난 엄마’(앵그리 맘, Angry Mom)들의 표심이 교육감 선거로 표출됐다는 분석이 쏟아진다. 글쎄다. 만약 그렇다 해도 세월호 참사와 진보 교육감 선택 사이에 징검다리를 놓은 관심들을 하나로 정리하기란 어렵다. 다만 안전한 학교에 대한 관심이 내 아이가 가는 여행길이나 내 아이가 받는 밥상, 시설의 안전에만 국한돼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안전한 학교를 만드는 일은 인간의 온도를 지닌 교육, 폭력과 차별을 거둬낸 교육을 일구는 일과 별개가 아니기에. 학업 부담과 갖은 통제로 숨통이 조이는 일상을 견뎌야 하는 학생들의 삶, 조건부로 ‘끼어 있음’을 허락받은 듯한 학교생활을 견뎌야 하는 움츠린 소수자 학생들의 삶, 학교에 내밀 명함 하나 없어 큰 사고가 터지고 나서야 불려가거나 달려가는 가난한 학부모들의 마음을 살피지 않고서 안전한 학교란 없으니까.

공약 전면에 나서지 못한 학생인권

진보 교육감 시대, 조용히 눈물을 삼키던 그 남자는 어찌될까. 표를 의식해 진보 교육감들의 공약 전면에도 나서지 못한 학생인권과 차별 없는 교육을 위한 정책은 실현될 수 있을까. ‘반짝 주권자’가 되어 최악을 피하기 위한 선택밖에 할 수 없는 씁쓸한 권리조차 없는 학생들의 처지는 달라질 수 있을까. 내가 움직이는 만큼 세상이 변한다는 진실을 다시금 떠올릴 뿐이다.

배경내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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