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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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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걸음 빠른 민달팽이

공감으로 희망을, 정치로 변화를 일궈낼 수 있다는 믿음…
‘세월호 이후 세대’ 민달팽이유니온 권지웅 대표에게 듣다
등록 2014-05-23 06:02 수정 2020-05-02 19:27
김명진

김명진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한 달이 넘었습니다. 슬픔과 분노는 여전히 가시질 않습니다. 그럼에도 뭔가 희망을 보고 싶었습니다. ‘세월호 이후 세대’라고 불릴지 모를 20대 청년을 만나 생각을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지난 3월28일 창립한 협동조합 ‘민달팽이유니온’은 청년 세대의 주거 문제를 해결하고자 모인 공동체입니다. 대표를 맡은 이는 26살 권지웅씨입니다. 민달팽이유니온은 세월호 참사가 있은 뒤 침묵시위, 기자회견 등의 활동도 꾸준히 벌이고 있습니다.

-세월호 문제에 대해 아마 처음으로 시위에 나섰던 것 같아요.

=300명의 아이들이 죽어가는 걸 국민이 실시간으로 6일에 걸쳐 지켜본 셈이죠. 너무 처참했고, 국가가 나섰다고 얘기하는데 저렇게밖에 못했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침묵시위를 하게 된 것은 단순히 어떤 슬픔을 느끼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함께 마음 아파하고 공감하고 있는 걸 사회적 경험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에요. 단순한 슬픔뿐 아니라 이런 행동도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야만 앞으로 우리가 이겨내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정치적 요구는 정치적으로 풀어야 -슬픔을 연대하는 속에서 힘을 얻는다는 것이죠.

=시스템 자체가 망가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시스템 안에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커다란 공감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 한다는 것, 그것을 확인하게 되면 딛고 일어설 수 있지 않을까요.

-한 달이 흘러간 지금은 어떤가요.

=처음엔 사건 중심이었다면, 지금은 그 사건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해석하게 되는 거 같아요. 제가 본 세월호 참사에는 국가권력의 문제가 있어요. 구성체의 구성원들이 저마다 역할을 잘하도록 조정해주는 게 국가권력인데, 이건 단순히 누가 얼마나 못된 사람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문제이며 국가권력에 대한 문제제기와 견제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걸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정치잖아요. 그런데도 오히려 현실에서 청년들 또는 한국 사회는 정치적이면 안 된다고 끊임없이 요구받는다는 모순을 느꼈어요. 사실 지금 바라는 것은 정치적 요구임에도 그것을 실현해나가는 공간은 비정치적이어야 한다는 모순된 이야기가 동시에 존재하는 거예요. 최근 유가족들의 발언에서도 그걸 느꼈는데, ‘우린 시위나 집회를 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라고 먼저 말하고 이야기를 하시거든요. 그 요구라는 게 사실은 국가권력에 대한 이야기이고 유가족 개인의 힘으로 될 수 없는 거잖아요. 그 힘을 만들려면 집단화되든지 정치화돼야 하죠. 하지만 그것을 발언하려면 비정치적이어야 한다며 저희 또한 신경 쓰는 걸 보게 돼요. 예를 들어 청년유니온 활동을 하는 친구들이 모여서 토론하다가 ‘그래, 침묵하지 말고 같이 애도하자’고 할 때도 단체 이름을 걸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되죠. 왠지 그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죠.

-그 이유가 뭘까요.

=신자유주의가 내면화된 세대가 가지고 있는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모든 문제를 개인화하면서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게 신자유주의의 핵심이 아닌가 싶고, 그 세계관을 내재화한 게 우리 세대가 아닌가 하는 거죠. 한국 사회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이후 경제구조뿐만 아니라 철저하게 교육 분야마저 그런 방향으로 개조됐고, 저희는 1등이 된 개인이 모든 걸 차지하는 것을 보며 커온 세대죠. 집단적 움직임에는 뭔가 거부감부터 들고, 그런 움직임을 보면 ‘왜 너희 이렇게 찌질하게 모여, 네가 잘하면 되는 거 아냐, 뭐가 더 쿨하고 멋진 거야’ 이런 식으로 포장해오면서 공동으로 풀어야 하는 문제와 사건 앞에서도 우리는 그 해결 주체를 개인에게 두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거죠.

-20대 청년으로서 현재의 기성세대, 즉 40∼50대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요.

=열심히 하셨다고 하지만 밉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너희 왜 이렇게 투표 안 해?’ 이런 이야기를 할 때라든지. (웃음) 우리 세대는 정치적이었는데 너희는 왜 그러지 않느냐는 식으로 말할 때요.

이거 면접관이 알 수 있는 정보야? -실제 20대가 정치적으로 무관심하다는 지적이 꽤 있잖아요.

=20대가 그런 문제를 가졌다면 그것은 40∼50대가 지금의 20대를 그렇게 키워낸 거죠. 20대에게 한 번이라도 정치적이어야 한다고 교육한 적 있나요. 사교육이나 시스템에 대해 문제가 있다, 이렇게 말하지만 대안을 만들어 공교육을 바로잡기보다는 자기 자식만 외국으로 보내버리고, 이렇게 해오셨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에 요구하거나 제대로 교육하지 않았으면서 결과론적으로 그렇지 못한 20대를 보고 ‘우리 때는 다 들고일어섰는데 너희는 패기도 없고 왜 그러느냐’ 이런 식으로 이야기할 때 속상하죠.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제가 할 말이 없네요.

=게다가 상황도 많이 바뀌었죠. 기성세대는 운동을 하다가 졸업을 하든 안 하든 쉽게 취직했지만, 지금은 죽자고 노력해도 회사에 못 들어가는 판이에요. 각 세대가 겪은 경험이 그다음 세대에게 전해지는 거죠.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괜히 나서서 죽지 마라’, 이게 할머니들 세대의 경험에서 얻은 교훈이라면, 부모 세대는 지금의 20대에게 어떤 경험을 물려줬을까요. 민주화 이후 제대로 된 국가권력으로 여러 사회세력을 견제하고 통제하지 못한 경험 속에서 부정적인 것이 구조화돼 만연해졌죠. 누구나 알고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바꾸어내지 못한 경험이 축적돼 자식 세대에게 전달된 것 같아요.

-지금의 20대를 위협하는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요.

=무엇보다 ‘경제’가 가장 커요. 지금 20대들은 안정적인 직장을 얻기 위해 미친 듯이 경쟁해야 하고, 결혼비용·양육비용 이런 것들이 너무 높고 양극화돼서 내가 과연 직장에 들어가 안정적으로 결혼이나 할 수 있을까, 이런 불안에 사로잡혀 있어요. 노동 문제, 생활비를 비롯한 최소한의 생존비용, 생애주기별 비용 등에서 불안 요소를 완화하거나 아니면 정상화해주는 해법이 시급해요.

-경제적 불안정이 정치적 발언에 소극적이거나 자기 검열의 출발점이 된다고 보는 거죠.

=제가 보기엔 정치적 행동을 주저하게 하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어떤 집회에 참석하거나 단체에 가입하라고 하면 이런 질문을 한다고 들었어요. ‘이게 혹시 내가 면접 볼 때 면접관이 알 수 있는 정보야?’라고요.

-‘가입한다고 도움이 되겠어?’라는 무관심일 줄 알았는데 두려움이라는 건가요.

=자기 검열이라는 거죠. 실제 기업에서 노조에 대한 질문이나 사회 이슈를 갖고 지원자의 성향을 계속 파악하려는 일들이 있어요. 면접장에서 그런 질문을 한다는 걸 들어서 알고 있고 일부 경험도 하니까요. 그런 경험을 하다보니 어쨌든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처지에서 어떻게 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어요. 예를 들어 내가 민달팽이유니온에 가입한 것, ‘혹시 이거 공개되는 거 아냐?’라는 두려움이죠.

떡볶이도 못 사 먹는 전 재산 1600원 -주거 문제에 관해서는 아버지 세대와 확실하게 다른 것 같아요.

=어른들은 지금의 청년들에게 눈높이를 낮춰야 한다고 하는데, 그게 불가능한 이유는 초기 입사 연봉이 미래의 자기 생존을 결정하기 때문이에요. 당장 연봉 1천만원을 받는 게 쪽팔리거나 그 일이 싫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시작한 사람들의 삶이 결혼을 못하거나 결혼해도 아이를 낳으면 더더욱 희망이 없다는, 그런 길이 뻔히 보이니까 선택을 못하는거거든요. 그다음 경로라는 게 자기 생애의 많은 것을 스스로 거세해야 하는 모습이기 때문에 안 되고, 그중에서 특히 주거 문제는 좋은 삶을 만드는 기본 조건인데 보장이 안 되는 거죠.

-청년 주거 운동은 어떻게 하게 됐나요.

=부산에서 자랐고 대학에 입학하면서 서울로 왔어요. 1학년 때는 기숙사 생활도 하고 부모님에게 용돈을 받아서 지내다가 2학년이 되면서 독립을 선언했어요. 과외 2개와 생활협동조합에서 시간제 아르바이트까지 했는데도 수중에 돈이 없더라고요. 주거비, 식비, 통신비, 교통비만 내도 80만원 가까이 되니까요. 후배에게 밥 한번 사주려고 해도 돈이 없어요. 어느 날인가는 돈이 없어서 뒤풀이를 안 하고 집에 오는데 너무 배가 고파서 동전을 다 털어보니 1600원이 있더라고요. 그때 떡볶이가 2천원 했나? (웃음) 약간 서러웠던 기억이 나요. 그때 청년들이 경제적으로 독립한다는 게 쉽지 않은 문제임을 깨달았어요. 그러다가 우연찮은 기회에 전국의 미분양된 집을 다니며 이라는 다큐를 제작하게 되었는데, 그걸 만들면서 주거 문제가 한국 사회에서 정말 큰 모순이다, 착취의 한 축이 노동이라면 다른 한 축은 지대의 문제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돈 가진 자가 땅이라는 걸 매개로 사람들의 삶을 좌우한다는 결론에 이르면서 ‘아, 한 명 정도는 졸업해도 이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게 되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로 가지 않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심인데요.

=저는 세상이 정의로워서 누군가 어떤 의견을 내면 그 의견이 모여서 서로 조정되는 줄로만 알았어요. 세상의 문제가 의견들의 문제인 줄 알았죠. 그런데 공대 학생회장 때 공대 등록금이 왜 인문대보다 더 많은지 이해되지 않는 거예요. 학교 쪽에 설명을 구했더니 제대로 답변도 못하고요. 그 문제로 학장과 총장을 만나서 의견을 냈고 당연히 조정될 줄 알았는데 여전히 그대로인 걸 깨달았어요. 그 일을 겪으면서 ‘아, 세상은 의견의 조정이 아니라 힘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고 일방적인 옳고 그름은 존재하지 않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 힘을 구성하는 하나의 조각으로 누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죠.

문제가 있으면, 생각하고 움직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시대의 소명을 알고 조금 앞서갑니다. ‘그래, 맞아’ 하면서 따라가는 사람들이 생기고 눈치 보면서 끝까지 있다가 ‘아, 이게 대세인가봐’ 하는 사람들이 그 뒤를 따릅니다. 눈 맑은 권지웅 대표의 얼굴에서 반보 앞서가는 사람의 모습을 봅니다.

제1호 입주, 작지만 새로운 주거 모델 -민달팽이유니온은 조합원이 몇 명인가요.

=이제 200명 좀 넘었어요. 5월18일에 제1호 입주를 하는데 보증금과 출자금이 조금 모자라서 모으고 있어요.

-어떤 사업을 계획하는 건가요.

=협동조합이 건물을 빌려요. 건물주와는 통상적인 수준보다 조금 싸게 계약하는데, 건물주 처지에서는 안정적인 임대료의 지급이나 관리가 가능하기 때문에 가격 협상을 할 여지가 있어요. 그렇게 확보한 방에 청년들을 위한 안전하고도 저렴한 주거를 제공하는 거죠. 그 외에 주거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정책연구나 활동을 병행합니다.

-전망은 어떤가요.

=이 사업을 하기 전에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에서 많은 토론과 교육·조사를 함께했고 외국의 협동조합 사례도 연구했어요. 건물을 빌리는 돈이 적지 않기에 사실상 국고 지원 없이는 안 되는 분야지만, 일단은 민간이 이런 모델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줘서 국고의 빗장을 여는 역할을 해볼까 합니다. 임대주거 운영이 안정되고 확장성을 갖는다는 것을 실제 보여주는 게 중요하고요. 작지만 새로운 주거 형태의 모델이랄까, 그곳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정말 즐겁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다시 세월호 이야기로 돌아가보고 싶어요. 이 사건이 우리 사회를 이전과 이후로 갈라놓는다는 예측과 함께 낙관적 전망과 비관적 전망이 있어요.

=저는 한국 사회가 여기서 더 좌절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참담함이나 비극을 딛고 일어설 거예요. 지금까지 각자에게 주어진 기능을 제대로 못하게 만들었던 게 무엇인가, 다시금 짚어보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조금씩 모아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낙관적이네요. 근거가 있나요.

=딱히 뭐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지난 5월10일 경기도 안산에서 열린 집회에 갔어요. 그곳에서 유가족들의 발언이나 모인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하게 됐어요. 피해자 중에 유가족, 실종자, 생존자 가족들이 계시죠. 그런데 이분들이 서로를 계속 돌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아직 찾지 못한 사람들을 먼저 돌봐야 한다, 그리고 생존자들도 생존해서 미안하다 이렇게 말씀하시면 유가족들이 살아줘서 고맙다 하시고, 생존자 부모님들은 아이들을 잘 키워서 꼭 데리고 가겠다, 못다 한 삶을 다하겠다, 이렇게 얘기하세요. 유가족 중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서울 강남에서 태어나지 않아도 마음껏 여행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돕겠다, 과외를 받지 않아도 꿈을 이룰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돕겠다, 이 이야기를 듣는데 전부 다 울었어요. 만일 서로에게 ‘너는 살았잖아’ 이렇게 탓했다면, 국민이 이걸 보고 ‘잊자, 우리는 답이 없다’고 했을 수도 있겠는데, 그 큰 슬픔을 참고 사회를 바꾸겠다고 말씀하시는 걸 보면서 이제까지의 분노나 무력감이 떨쳐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그 아픔에도 불구하고 사회를 돌본다고 나서고 사람들이 그것에 공감하고 함께할 때 우리 사회가 지금껏 못 풀었던, 재벌이나 핵심 세력의 국가 사유화 고리를 끊어내지 않을까 했어요.

아픔을 끌어안고 일어서는 사람들과 함께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는 말에 제가 용기를 얻어요.

=더 나아질 거예요. 그렇게 해야죠. 국가권력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견제하는 구조를 짜는 게 바로 정치의 문제이고 집단의 문제인데, 지금까지 저희 세대는 ‘왜 그런 이야기를 해? 차라리 주거 이야기, 아니 노동 이야기를 하면 되잖아’ 이랬거든요. 그런데 세월호 참사가 우리에게 이런 기회를 주었어요.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국가권력을 어떻게 견제해야 하지?’, 이런 논의를 할 수 있는 기회를요.

-결국 공론의 장으로서 정치를 제대로 복원시키는 거죠.

=꼭 현실정치만이 아니라 국가권력을 견제하고 통제하는 모든 활동이 정치활동인 거죠. 민달팽이유니온이 아니더라도 작은 의제를 갖고 공동의 경험을 하는 곳에서 정치화를 한다고 생각해요. 갑자기 세상을 뒤집을 만한 것은 아니지만, 저희의 경우 그냥 원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반찬을 같이 만들어보자, 장이라도 같이 보자, 세입자 네트워크를 꾸리고 있거든요. 조금이라도 작은 경험이 모이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리고 구조적으로 설명하고 원인을 찾아가는 활동을 꾸준히 해야죠.

변호사 정연순, 녹취 전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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