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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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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다 실제는 더 심했어요”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의 실제 주인공인 삼성반도체 노동자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
“당연히 산재가 맞으니까 반드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요”
등록 2014-02-20 07:25 수정 2020-05-02 19:27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 사진 탁기형 기자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 사진 탁기형 기자

지난번 인터뷰 뒤 나는 ‘여성성’을 화두로 받아든 수도자처럼 오래 생각했다. 자신의 인터뷰를 읽은 고은광순은 내게 여성성을 가치 있게 생각한다는 것이 이미 진화된 사람이라는 증거라고 나를 북돋아주었다.

그러던 차에 황상기씨를 만났다. 그는 고은광순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진화된 인간의 한 모델이었다. 그에 관한 자료들을 챙겨 읽고 만나 얘기를 나누면서 나는 인간의 선성(善性)이 사람을 어떻게 강하게 하고 일관되게 하는지 실감했다.

“앞으로도 쭉 가볼 생각이에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스물셋의 나이에 백혈병으로 숨진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 그는 딸의 죽음이 산업재해였음을 밝히기 위해, 또 다른 비극이 있어선 안 된다 생각에 삼성을 상대로 길고 힘든 싸움에 나섰고 2011년 ‘백혈병과 업무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는 승소 판결을 이끌어냈다. 그 6년의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상처와 고통과 슬픔과 분노가 있었을까. 영화 은 그런 아빠 황상기, 시민 황상기를 모델로 한 영화다.

지금까지 알려진 삼성전자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 수는 총 180여 명에 이르고 이 중 70여 명이 사망했다. 그중 산재가 인정된 건 함께 근무했던 황유미씨와 이숙영씨 단 두 명뿐이다. 그나마 근로복지공단의 항소로 최종 결과는 알 수 없는 상태다.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인 것이다.

30년 넘게 강원도 속초에서 개인택시를 운전하고 있다는 황상기씨는 영화 개봉 뒤 자주 서울에 온다고 했다. 계속되는 영동 지방의 폭설 때문에 약속 시간에 맞추기 위해 속초에서 전날 출발했다는 그를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의 사진이나 동영상을 볼 때마다 겪은 일에 비해서 유난할 정도로 표정이 편안하고 선하고 여유 있어 보여서 무척 궁금했는데 실제로 보니 그런 느낌이 더 뚜렷했다.

-생각보다 훨씬 편안해 보이세요. 그런 고통을 겪거나 험한 일을 헤쳐나온 사람인 줄 모르겠어요.

=유미가 죽은 7년 전에는, 너무 억울하고 슬퍼서 막 울분을 터뜨리고 그랬어요. 억울하다 그러는데 누가 들어주는 사람도 없고 그래서 좌절감도 있고 쫄아 있기도 했죠. 확 죽고 싶은 감정도 들었어요. 그러다 어느 땐가부터 생각을 좀 바꿨어요. 이러면 내가 지는 것이다. 그러지 말고 끝까지 싸우자, 그렇게요. 그러니까 마음이 좀 편안해졌어요.

-마음을 그렇게 먹는다고 편안해지는 건 아니잖아요.

=시간이 지나니까 나쁜 감정이 좀 희석된 것도 있고요.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같이 해주고 잘못했다고 규탄도 해주고 응원도 해주니까 마음이 많이 편해졌죠. 사람들과 웃고 떠들고 소주 한잔 하며 소통하는 맛도 있어서 앞으로도 쭉 가볼 생각이에요.

-그래도 참 대단하세요. 한결같이 그렇게 밝은 표정일 수 있다는 게.

=살기 위해서 그런 거예요, 살기 위해서. 내가 만약 계속 우울하고 억울해하고 그러면 벌써 죽었죠. 살아야 억울한 것도 밝히고 계속 싸우죠. 만약 내가 지쳐 떨어지거나 죽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잖아요.

칼춤 추다가 내 가슴에 정조준된 저격수의 레이저 표지를 발견했을 때처럼 가슴이 서늘한 느낌. 심리기획자, 이런 거 다 헛말이야.

-선생님이 통과한 시간들과 마음을 다룬 영화 이 개봉했습니다. 어떠세요.

=삼성과의 싸움이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된 느낌이랄까. 영화를 많이 보면 삼성도 정부도 예전보다 부담스러운 입장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처럼 삼성이 말하면 다 정답이고 삼성이 말하면 다 백점이라는 논리가 좀 깨졌으면 좋겠어요. 영화 제목은 제가 유미에게 한 약속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다큐에 가깝다고 할 만큼 사실에 바탕을 둔 영화라고 들었습니다. 실제와 영화에 차이가 좀 있나요.

=유미 남동생이 있는데, 영화에선 그 애가 많이 방황하기도 하고 삼성에 취업한 걸로 돼 있는데 실제론 아니에요. 이름도 영화하고는 다르고요. 집사람이 영화에서는 생선 손질하는 곳에 다니는 것으로 나왔는데 그게 아니고 식당에 일하러 다녔어요. 바닷가 포장마차에 앉아 ‘멍게가 동물일까요 식물일까요’ 하는 대화가 나오는데 사실은 그게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잖아요. 근데 사람들은 그게 궁금하니까 저게 말이 되네 안 되네 따질 거 아녜요. 그러다보면 진짜 바닷가에 가서 보자 그럴 거고요. 그 바닷가 동네 분들에게 장사에 좀 도움이 되라는 뜻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삼성은 잘못해도 처벌은커녕 상을 줘”

그의 설명이 얼마나 순하고 착한지 속으로 혼자 웃었다.

-회사 쪽을 너무 절대악으로 그렸다. 영화적인 흐름 때문에 과장된 거 아니냐. 일부에서는 그렇게 말하기도 하던데요.

=아니요. 영화는 약했습니다. 실제는 더 심하게 했어요. 유미가 입사 20개월 만에 백혈병 진단을 받았어요. 그 뒤 2년 동안 앓다가 제가 몰던 택시 뒷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그동안 삼성 쪽에서 찾아온 사람들은 한 번도 유미에 대해 묻지 않았어요. 유미나 우리 가족을 위로하는 말도 하지 않았고요. 합의를 요구하거나 입 막기 위한 얘기뿐이었습니다. 사표를 쓰기 전에는 개인적인 질병을 왜 회사 탓을 하느냐 했고, 사표를 쓴 다음에는 삼성 사람도 아닌데 왜 회사를 못살게 구느냐고 윽박질렀어요.

-사표는 언제 썼나요.

=발병하고 1년쯤 지나서요. 유미가 1년 동안 휴직 중일 때 회사에서 유미 통장으로 몇십만원도 넣어주고 백 몇십만원도 넣어주고 그랬어요. 무슨 돈인지는 몰랐지만 병원비가 급하니까 보탰죠. 그러다가 병원비와 골수이식비로 한 달에 수천만원씩 들어가서 회사에 얘기하니까 휴직 기간이 다 되어간다며 사표를 쓰라는 거예요. 그럼 유미가 계속 치료해야 하니 산재보험 처리를 해달라고 했죠. 그랬더니 회사 직원이 펄쩍 뛰는 거예요. 그러면서 물어요. “아버님은 이 큰 회사 삼성을 상대로 이길 수 있습니까?” 그래서 내가 “못 이긴다. 그 큰 회사를 내가 어떻게 이기냐” 그랬죠. 다른 걸 요구하라고 해서 병원비와 수술비를 달라고 했더니 사표를 쓰면 준다고 한 거죠. 바로 옆방에 누워 있는 유미를 불러서 하얀 종이를 요렇게 두 번 접어서 주민등록번호와 이름만 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유미가 그대로 썼죠.

-백지 사표로군요.

=그때가 10월이었는데 치료비를 주겠다는 그 과장님이 고마워서 송이를 잘 따는 제 친구에게 부탁해서 좋은 송이 두 개를 신문지에 돌돌 말아서 선물도 줬어요. 그 뒤 약속한 병원비를 주지 않아서 회사에 전화해 욕을 하고 그랬더니 사람들 여럿이 찾아와 나를 협박하고 공갈치고 그랬습니다. 당시 유미는 앉아 있을 힘도 없이 지치고 고통스러운 상태였습니다. 나는 마음까지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들어서 그 사람들이 소리 지르는데 제대로 대꾸도 못하고 많이 울었어요. 그러다가 집에 왔는데 억울해서 배길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정당, 방송사, 언론사, 노동단체 온 사방에 전화를 했는데 아무 데서도 내 얘기를 받아주지 않아요. 그때는 인터넷에 들어갈 줄도 몰랐는데 들어가고 나오는 걸 유미에게 배워서 언론사 전화번호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거기다 무작정 전화해서 억울함을 하소연했더니 기자 하나가 내려왔습니다. 큰 신문사는 애초에 생각을 안 했어요. 왜 그랬냐 하면 그런 데는 삼성에서 주는 광고로 먹고살기 때문에 삼성에 대한 거를 절대 안 써줄 것이다 그렇게 판단했죠.

그의 상식적인 판단력에 놀랐다.

-그 언론사가 어디였나요.

=월간 이라는 잡지였습니다. 우리 이야기도 듣고 유미의 사진도 찍었습니다. 요즘 많이 접하는 유미 사진이 바로 그 사진이에요. 잡지가 4월 초에 나왔는데 유미는 3월6일에 죽었습니다. 집사람과 집에서 점심을 먹다가 잡지를 배달받았는데 둘이 잡지를 앞에 놓고 막 울었습니다.

-그 뒤에 1인시위도 하고 유인물도 돌리고 그런 거로군요.

=공장 앞에서 유인물을 만들어 나줘주면 경비들이 옆에 있다가 받은 사람한테 가서 다 빼앗아가요. 작은 지방 신문사에서 유미 얘길 써서 수원역 터미널 신문 가판대에 꽂아두면 삼성 경비들이 신문 발행하는 날을 딱 맞춰 와서 다 빼가요. 삼성 본관에 갔다가 경비원들에게 팔다리 들려서 내동댕이쳐진 적도 많고요. 삼성이 세서 그런 건지 심판이 심판 역할을 안 해서 그런 건지 잘 알 수 없지만 참 이상하긴 합니다. 삼성이 걸린 문제에서는 아무리 울부짖어도 들은 척을 안 하는 겁니다. 삼성은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처벌을 안 할 뿐 아니라 외려 상을 줍니다. 그러니까 삼성 사람들은 자기네가 정말 잘하는 줄 알고 더 날고 기는 거예요.

“앞으로도 피해자가 더 나올 거예요”

삼성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담백하고 직선적인 질타를 들어본 적이 없어서 가만히 귀기울였다.

-그런데도 왜 끝까지 포기 안 하셨어요.

=다들 하지 말라 그랬어요. 아무리 내 뜻이 옳고 내 말이 옳아도 삼성과는 싸우지 말라는 거죠. 어떻게 이기겠느냐고요. 삼성이 몇 푼 주면 그거 받고 절대로 하지 마라. 근데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어요. 피해가 너무 컸어요.

-어떤 피해요.

=삼성 공장에서 일하던 딸이 백혈병에 걸려 죽었어요. 우리 어머니는 손녀가 머리를 빡빡 깎고 살이 쪽 빠져 집에 오니까 충격을 받아서 돌아가셨어요. 유미 엄마는 우울증에 걸려서 일도 못하고 치료받으러 다녔어요. 낡은 구호주택을 고치려고 오랫동안 모아놓은 돈은 병원비로 다 썼고 나는 여기저기 쫓아다니느라 일도 못해서 가족이 거의 해체된 거나 한가지였죠. 그러니까 마음에 입은 상처까지 이야기하면 돈으로 치료가 안 되는 피해를 본 거예요.

-삼성에서 여러 번 거액을 주겠다고 했는데 거절했다면서요.

=삼성의 돈을 받아서 치유할 수 있는 단계는 벌써 넘어섰어요. 이 마음을 달래주기 전에는 절대로 치유가 안 돼요. 내가 택시 운전으로 먹고사니까 하루 나가서 몇 푼 벌면 또 하루 살고 또 하루 나가서 몇 푼 벌면 하루 살고 그럴 수 있어요. 삼성에서 보상해준다는 돈 받는다고 내 마음이 편해지거나 즐거워지거나 행복해지는 거 절대 아니잖아요. 그 보상이 유미를 대신할 수도 없는 거고요. 그 돈을 받았다고 내 인생이 바뀌는 거 절대 아니고 내 삶은 그냥 내 삶일 뿐이죠. 만약 제가 돈을 받는다면 다른 사람들은 또 어떡할 거예요. 처음에는 유미 혼자인 줄 알았고 그다음에는 다섯이 다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생전 보도 듣도 못한 이름의 백혈병이나 암 환자들이 엄청 나오는 겁니다. 지나봐야 알겠지만 앞으로도 피해자가 더 나올 거예요. 그런 걸 놔두면 개망나니 기업이 되는 거죠. 너무 잘못된 세상이고 불행한 사회인 거죠. 그래서 나라도 나서서 그런 일을 끊는 데 보탬이 되어야겠다 그거죠.

감사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으로 인해 세상이 반보쯤 앞으로 나아가겠군요. 속으로 두 손 모아 합장했다.

-유미와 했다는 ‘또 하나의 약속’도 그런 거겠군요.

=자기 딸이 일하다가 병에 걸렸는데 왜 병에 걸렸는지 그 원인을 찾으려고 대들어야지 안 대드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안 대든다면 그건 부모 자격이 없는 사람이죠. 저는 부모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라도 유미가 병에 걸린 이유를 꼭 찾을 거예요.

-해고노동자들이나 강정·밀양 마을 주민들은 해당 사건으로 큰 고통을 받지만 동시에 그로 인해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새로운 세상에 눈뜨게 됐다고 말합니다. 선생님의 시간도 혹시 유미의 발병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나요.

=그런 것 같습니다. 유미의 발병 이전에는 우리 집 식구 편안하게 잘 먹고 사는 데만 집중했죠. 어떤 사회적 문제가 있으면 내 생각은 있지만 나서지는 않았습니다. 시간 나면 친구들과 놀러다니고 술도 한잔 하고 어디 가서 고스톱도 한번 치고 그러면서 살았죠. 그런데 유미에게 그런 일이 있고 나서는 삼성을 비롯해 여러 사회문제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죠.

-삼성 제품은 안 쓰시나요.

=네. 집에 멀쩡하게 쓰던 삼성 텔레비전이 있었는데 유미가 병 걸리고 싸우기 시작하면서 보기가 싫어져버렸어요. 저는 삼성 제품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회사 핸드폰을 써도 그 안에 삼성 제품이 들어 있을 거라더군요. 지금도 삼성 간판만 보면 속이 다 울렁거려요. 유미 문제도 그렇지만 삼성에서 하는 짓을 보면 아주 못된 짓은 다 하고 있거든요.

-이건희씨는 공식 석상에 유난히 딸들의 손을 잡고 등장하는 경우가 많더군요.

=너무 더럽고 철면피해서 텔레비전에 침을 뱉어버려요. 지 새끼가 예쁘면 남의 새끼도 예쁜 거예요. 지 새끼는 예쁘다 하면서 남의 집 귀한 아들딸들을 죽여놓고도 아무런 죄책감 없이 떳떳하게 얼굴 들고 다니면 안 되는 거잖아요.

“2년6개월째 2심에 계류 중인데요”

인터뷰 중 유일하게 그가 흥분했던 대목. 이건희씨와 측근들에게 유미 아빠 황상기의 분통과 슬픔이 전해질 리도, 또 그에 동의할 리도 만무하지만 나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 그의 말을 어미닭이 알을 품듯 정성스럽게 들었다.

-재판은 어떻게 되고 있나요.

=1심에서 승소했는데 근로복지공단에서 항소해 2년6개월째 2심에 계류 중입니다.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어요. 판사님들이 판결하는 데 부담을 갖거나 삼성에서 엄청난 압력을 넣고 있거나 지연 작전을 쓰거나 셋 중 하나일 거라고 추측만 하고 있습니다.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반드시 이겨야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산재가 맞는 건데요. 산재는 당연한 건데요.

당연한 건데요, 라는 말이 귀에 꽂히듯 들어왔다. 그가 내내 하는 얘기가 바로 그거였지 싶다. 인터뷰를 끝내고 그와 따끈한 찌개 한 그릇을 나눈 뒤 식당 앞에서 깊게 포옹하며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끝까지 응원하겠습니다. 그가 선한 마음처럼 웃었다. 아마 이런 얘기를 담은 웃음이었을 것이다.

“무엇엔가 찔려본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달도 때로 빛이 꺾인다는 것을/ 한 달도 반 꺾이면 보름이듯이/ 꺾어지는 것은 무릎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천양희, ‘마음의 달’

누군가의 마음이 꺾이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외면하는 조직은 단언컨대, 무너진다.

이명수 심리기획자, 녹취 김자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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