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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을 겁박하는 교육

등록 2014-01-11 06:26 수정 2020-05-02 19:27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얼마 전 학내에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를 붙인 고등학생이 ‘선동죄’ ‘불손죄’ 등의 명목으로 징계 위기에 몰려 화제가 됐다. 언론과 시민들의 관심이 쏟아져 징계는 철회됐지만, 끝내 ‘지도’가 불가피하다고 강변한 이 학교 부장의 발언이 참으로 요상하다. ‘대자보의 글씨체가 올바르지 않다.’ 정작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 대자보를 붙인 행위와 거기에 담긴 내용이었을 텐데(학교나 정권을 찬양하는 내용이었다면 이 지경까지 되었을까), 왜 글씨체까지 들먹였을까. ‘선동죄’나 ‘불손죄’는 행위의 불온성을 부각시킬 순 있으나, 그 불온성만큼 당사자에게 무게가 부여된다. 반대로 ‘글씨체가 엉망이다’라는 인신공격은 학생의 발언이 지닌 품격을 훼손하고 당사자도 위축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사회문제에 대해 아는 척하기 전에 글씨 연습부터 하고 오라는 조롱을 들어야 하는 처지라면, 그 치욕스러움만큼 위축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대자보 글씨체가 바르지 않다”는 징계 사유

지난해 수능이 끝난 뒤 학교의 종교예배 강요의 부당함을 고발하기 위해 1인시위에 나섰던 서울의 한 고3 학생은 ‘쟤가 1인시위 멈추고 교장한테 빌면 단축수업 다시 한다’는 교사의 어이없는 공갈(사실은 교육부의 정상수업 지침 때문이었다)로 동급생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아야 했다. 학교 쪽의 징계 위협보다 친구들의 비난이 당사자에겐 더 큰 심적 압박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쩨쩨한 조롱과 공갈만으로도 학생에게 결정적 위협을 행사할 수 있는 곳이 대한민국 학교다. 학교에 문제가 있더라도 나서서 문제를 제기하면 내 아이만 힘들다는 교훈이 학부모들 사이에 뿌리박힌 지도 오래다. 이런 마당에 교칙 제·개정을 비롯한 학교의 의사결정 과정에 학생이 자유롭게 의견을 내고, 그 의견이 반영되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얼마 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가 따끈할 권리를 보장하라는 캠페인에 나서 큰 호응을 얻은 적이 있다. 학생들은 이 추운 겨울에 고작 겉옷을 껴입을 자유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한다. ‘한 대 맞고 끝낼래? 운동장 열 바퀴 돌래?’라는 무참한 질문 앞에 ‘둘 다 싫은데요’라는 대답은 상상 밖의 일이다. 머리카락 모양과 색깔을 두고 등굣길부터 교사와 씨름해야 한다. 학생을 겁박하는 교육이 겁먹은 시민을 만들어내는 것은 자명하다.

동등한 성원권까진 아니더라도 학생을 인간답게 대접하는 기본선은 지키며 교육하자는 마음들이 모여 시작된 게 학생인권조례 운동이다. 제정에 성공한 네 지역 가운데 서울에서만 주민발의라는 시민입법을 통해 제정됐다. 상징성이 큰 만큼 포화도 집중됐고, 대법원 소송과 교육감 교체로 굴곡도 많았다. 임기 내내 조례 시행 책무를 내팽개쳐온 문용린 서울시교육감이 최근 조례 개정안을 들고나왔다.

참으로 쩨쩨한 문용린 교육감의 행보

내용을 살펴보니 낯 뜨겁기 그지없다. 학생 인권을 교칙 준수 의무 아래 두고, 생활지도 편의를 위주로 인권을 제한 가능토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학생인권조례가 학생 인권이 무참히 짓밟힌 수많은 사건과 증언이 일궈낸 역사적 결과물인 만큼, 개정안을 발의하려면 최소한 조례로 인해 실제 어떤 문제가 발생했는지 조사라도 했어야 마땅하다. 교칙 개정을 비롯해 조례에 따른 학교 현장의 변화가 뒤따른 적 없으니 조례 시행에 따른 문제점을 찾기도 어려웠던 것일까, 조항들을 손대면서 다음번 선거에서 얻을 표나 계산하고 있었던 것일까. 확인되지 않은 우려들이 조례 개정 사유로 버젓이 기재돼 있다. 교사의 생활지도가 정당하게 행사되도록 하려는 것이 조례의 취지인데, 어쨌든 생활지도권이 강화돼야 한단다. 차별금지 조항의 ‘성적 지향’ 문구도 빼버렸다. 이대로 개정에 성공하면, 확인되지 않은 우려를 기초로 불만만 제기하면 인권 기준을 후퇴시킬 수 있다는 또 하나의 전례가 만들어질 테다. 이제 보니 문 교육감의 행보야말로 참으로 쩨쩨하다.

배경내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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