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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서든 알리고 싶다”

형제복지원 사건 다룬 연극 <해피투게더> 다음 달 무대 올라… 모바일 드라마, 다큐 제작도
등록 2013-10-30 05:19 수정 2020-05-02 19:27
지난 10월22일 ‘형제복지원 사건’을 배경으로 한 연극 ‘해피투게더’에 출연하는 배우들이 공연 연습에 몰두하고 있다. 한겨레 탁기형

지난 10월22일 ‘형제복지원 사건’을 배경으로 한 연극 ‘해피투게더’에 출연하는 배우들이 공연 연습에 몰두하고 있다. 한겨레 탁기형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해선, 저도 잘 몰랐습니다.”

장영승(50) 서촌갤러리 관장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1980년대를 편하지 않게 살았던 그가, 이 사건을 몰랐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82학번인 그는 1985년 5월23일 서울 소공동 소재 미국문화원에 들어갔다. 서울 지역 5개 대학생 73명은 이날 미문화원 2층 도서관을 점거하고 ‘광주 학살에 대한 미국의 공개 사과’를 촉구했다. 점거농성은 발생 72시간 만에 막을 내린다. 1987년 형제복지원의 인권유린 문제로 세상이 떠들썩할 무렵, 그는 감옥에 있었다. “아마 형제복지원 사건이 1987년에 반짝 문제가 됐다가 88년 올림픽이 열리는 통에 사그라진 것 같다.” 공연 제작 및 전시 기획사 ‘다리’ 대표이기도 한 그는 형제복지원 사건을 배경으로 한 연극을 제작했다. 제목은 . 오는 11월15일부터 한 달간 서울 대학로 아트센터K 동그라미극장에서 공연될 예정이다.

민주화운동 한 지인들도 모르더라

현실에서 일어났다고 믿기 힘든 역사를 접한 건, 올해 봄이었다. 피해자 한종선씨와 함께 책 를 쓴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의 수업을 통해서다. “당시 페이스북에 형제복지원 사건 이야기를 올렸는데, 나만 모르는 게 아니더라고요. (민주화운동을 한) 지인들도 이 사건을 모르는 걸로 봐서는, 정말 많은 사람이 모른다는 거죠.” 마음이 급해졌다. 어떻게든 형제복지원 사건을 빨리 세상에 드러내고 싶었다.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최대한 재밌게. 처음엔 영화 제작을 생각했지만 역시, 시간과 돈이 문제였다. “연극은 규모가 작으니까 내 힘으로도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몇 달 전 를 무대에 올린 이수인 연출가를 만나면서 작업은 급물살을 탔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은 뒤 올해 초부터 준비하던 연극 제작을 거의 포기할 무렵이었다. 며칠을 고민하던 이 연출가는, 형제복지원 사건을 배경으로 연극을 하겠다고 했다. 현재는 짜인 대본 없이 배우들과 함께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지난 10월22일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지하 연습실 밖으로 ‘쩌렁쩌렁’한 배우들의 목소리가 쉴 새 없이 새나왔다. 노래·춤·영상이 어우러진 새로운 형식의 연극이 될 것이라고 했다. 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 등 몇몇 배역의 이름은 실명으로 등장한다. “연극을 통해서라도 피해자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가해자의 생각과 마음을 상상해보고 싶었다”

란 제목에서, 형제복지원 사건을 연상하기란 쉽지 않다. “소재 자체가 어두우니까, 제목을 밝게 가자고 생각했다. 연출가는 언젠가 ‘해피투게더’란 이름의 연극을 하고 싶어 해 쿵작이 맞았다. 비극적인 사건을 잊지 않고, 앞으로도 같은 피해자가 없게끔 해야 우리 모두 함께 ‘행복’해질 수 있다는 의미를 담았다.”

장 대표는 사실, 정보기술(IT) 업계에 오랫동안 몸담고 있었다. 대학 졸업 뒤 ‘전공’을 살려 벤처 1세대가 됐다. 취직이 되지 않아 선택한 궁여지책이었다. 1990년 ‘나눔기술’을 창업했다. 지난해 6월까진 콘텐츠 제작 및 유통사인 캔들미디어 대표였다. 당시 그는 정치적 문제로 투자 난항을 겪고 있던 영화 제작에 관여하고 있었다. 하고 싶은 걸 하면서 회사 대표직을 유지하기란 어려웠다. 회사를 그만둔 뒤,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캠프에서 미디어특보를 했다.

“트라우마와 현재 모습까지 보여주고파”

연극 를 무대에 올리면서 그는 몇 가지 실험을 할 계획이다. 연극무대 장면을 따로 촬영해 모바일 드라마를 만들어볼 생각이다. 모바일 드라마는 내년 초쯤 완성될 예정이다. 연극과는 아예 다른 내용의 영화 제작팀도 꾸렸다. 사건을 알릴 수 있는 전시회도 기획 중이다. 연극임에도 홍보용 티저 영상을 만들어 동영상 공유 사이트 유튜브에 올리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 그 사건을 많이 알리고 싶다. 연극 공연만으로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원소스멀티유즈’(OSMU)를 하는 거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시설 중심 자활 정책의 철저한 실패 사례이기도 하다. 홈리스들의 자활을 돕는 잡지 에 연극 광고를 게재하는 건 그래서 의미 있는 일이다.

장 대표를 중심으로 한 연극 제작과는 별개로, 형제복지원 사건을 조망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촬영도 시작됐다. 작품은 내년 하반기쯤 완성될 예정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다큐멘터리 과정에 재학 중인 전상진(30) 감독이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를 제안한 사람은, 역시나 전규찬 교수였다. 책 출간뿐 아니라 ‘영상 기록’도 함께 진행해보자는 의미였다. 요즘 전 감독은 세상 밖으로 어렵게 나온 피해자들을 만나고 있다. “벌써 20년이 훌쩍 지난 사건인데도, 피해자들의 삶에선 그때 기억이 상당한 트라우마로 남아 있더라. 형제복지원이 1987년에 폐쇄됐을 때 3천여 명이 거리로 쏟아져나왔는데 아무도 그들을 기억해주지 않았다. 피해자들의 현재를 담고 싶다. 박인근 원장이 다시 복지사업을 할 수 있게끔 한 정치세력은 승승장구했는데, 이들의 현재 또한 보여주고 싶다.” 아직 진상 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사건이기 때문에 다큐멘터리 촬영 진행엔 어려운 점이 많다. 무엇보다 자료 확보가 쉽지 않다. 1987년 형제복지원에 대한 수사 기록은 현재 울산지방검찰청에 보존돼 있다. 지난 6월 피해자 한종선씨는 검찰에 사건기록 일체에 대해 정보공개를 청구했지만 비공개 결정을 통보받았다. 대검찰청 예규 ‘사건기록 열람·등사에 관한 업무처리 지침’ 등에 따라, 청구인 본인이 제출한 진술 서류만 열람·등사가 가능하다는 이유였다.

정리되지 않은 과거는 돌고 돌아

전 감독에게 형제복지원 사건은 조금 특별할 수밖에 없다. 사립학교·사회복지시설 등 국가가 민간에 공공서비스를 위탁한 뒤 벌어지는 문제에 관심이 많다. 하필 ‘사학 비리’로 유명했던 상문고와 세종대를 졸업했다. 2002년 대학 입학 뒤 2011년 졸업할 때까지 비리재단 이사장 퇴출운동을 벌여야 했다. 이러한 과정을 고스란히 담아 올해 초 독립 다큐멘터리 를 완성하기도 했다. 2004년 교육인적자원부(현 교육과학기술부) 감사에서 공금 횡령 등 비리가 드러나 학교를 떠난 주명건 옛 재단 이사장은, 지난 7월 대양학원 이사로 선임돼 9년 만에 세종대로 복귀했다. 법인명만 바뀐 채 지금까지 형제복지원이 존재하는 현실과 맞물리는 대목이다. 정리되지 않은 과거는, 이렇게 돌고 돌고 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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