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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표절 사직’, 그냥저냥 ‘물의’?

스미스 예일대 교수 제보하자 정치학부 김용찬 교수 사의, 이후 학부생 저널 등이 11건 표절 추가 폭로… 박사 학위 논문 포함됐는데도, 서울대 “더 이상 교직원 아니라 문제없다”
등록 2013-04-14 10:44 수정 2020-05-02 19:27

“인용 표시 없는 과도한 인용이 있었다.”(문대성 의원)
“저는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가 아니다.”(허태열 청와대 비서실장)
대답은 ‘박사급’이었다. ‘태권도 스타’ 문대성씨는 지난해 4·11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 부산 사하갑 국회의원 후보 공천을 받았다. 그러나 이내 논문 표절 의혹이 불거져나왔다. 동아대 교수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인 그가 2007년 8월 국민대에서 받은 박사 학위 논문이 같은 해 2월 명지대 대학원에서 김백수씨가 제출한 논문 대부분을 베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국민대 연구윤리위원회는 “논문의 상당 부분이 표절된 것으로 판정했다”는 예비조사 결과를 발표했고, 그는 새누리당을 떠났다.

논문 표절이 드러나 지난 2월27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의 김용찬 전 교수가 사표를 제출했다. 서울대 개교 이래 논문 표절로 사직을 한 건 김 전 교수가 처음이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 서울대 관악캠퍼스 정문의 모습. 한겨레 김진수 기자

논문 표절이 드러나 지난 2월27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의 김용찬 전 교수가 사표를 제출했다. 서울대 개교 이래 논문 표절로 사직을 한 건 김 전 교수가 처음이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 서울대 관악캠퍼스 정문의 모습. 한겨레 김진수 기자

사직하며 “물의를 빚어 죄송합니다”

지난 2월 박근혜 정부의 첫 비서실장 내정자가 된 허태열 새누리당 의원은, 그가 1999년 건국대 행정대학원에서 받은 박사학위 논문이 문제가 됐다. 한 사립대 교수의 논문을 ‘복사’ 수준으로 표절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는 “논문 작성 과정에 시간적 제약 등으로 세밀한 준비가 부족했다”며 표절 사실을 인정했다. “논문 작성 당시 연구윤리 기준을 철저히 지키지 못한 점, 원저자와 국민께 사과드린다.” 그는 사과는 했을지언정 비서실장 자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논문 파동’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박근혜 정부 인사청문회가 시작되면서 논문 표절 의혹은 봇물 터지듯 쏟아지고 있다. 최문기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 윤성규 환경부 장관 후보자, 이동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후보자, 그리고 이성한 경찰청장 후보자의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저마다 학위 논문 표절 의혹이 불거져나왔다. 정치권 바깥도 마찬가지다. 스타강사 김미경씨, 방송인 김미화씨도 학위 논문 표절 여부를 두고 논란이 이어졌다. 배우 김혜수씨가 석사학위 논문 표절 사실을 곧바로 인정하고 학위를 반납하자, 그 용기에 박수까지 받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이 가운데 논문 파동의 정점을 찍은 건 서울대다. 2005년 이른바 ‘황우석 사태’를 겪은 서울대는 최근 강수경·강경선 수의과대 교수, 김상건 약학대 교수의 저널 논문이 조작된 것으로 밝혀져 ‘표절 대학’이라는 오명을 써야 했다. 최근 이런 분위기에 결정타를 날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개교 이래 처음으로 서울대 교수가 논문 표절로 스스로 사표를 내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 주인공은 서울대 사회과학대 정치외교학부 교수였던 김용찬(48)씨다. 그는 새학기가 시작되기 직전인 지난 2월27일 사표를 냈다. 서울대는 “김 교수가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며 사표를 제출해 수리했다”고 밝혔다. 표절 사실이 드러난 논문은 그가 2004년 한국국제정치학회 학회지인 에 발표한 ‘헤겔의 전쟁론 연구’다. 전말은 이렇다. 지난해 말 한국국제정치학회는 스티븐 스미스 미국 예일대 정치학과 교수로부터 제보를 받았다. “한국국제정치학회 학회지에 실린 한글 논문이 내가 1983년에 쓴 ‘헤겔의 전쟁론, 국가론, 국제관계론’을 베낀 것 같다.” 스미스 교수도 외부 제보를 통해 표절 사실을 파악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지난 1월 한국국제정치학회는 윤리소위원회를 열었다. 김 전 교수에게도 소명기회를 줬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한국국제정치학회는 표절 사실을 서울대와 한국연구재단에 통보했다. 그 뒤 곧바로 김 전 교수는 사직서를 냈다.

관련 학회들, 여론 떠밀려 ‘뒷북 검증’

정치외교학부의 논문 표절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곧바로 또 다른 표절 의혹이 터져나왔다. 김 전 교수의 논문을 검증한 건 학생들이었다. 대학생 국제시사저널 은 김 전 교수의 사직 소식이 알려진 뒤인 지난 3월8일, 그가 발표한 논문을 전수조사한 내용을 보도했다. 은 “그가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로 임용되기 전에 표절해 게재한 논문은 최소 9편이며, 임용 후에도 최소 2편의 논문을 표절해 게재했다”고 밝혔다. 이름을 밝히기 꺼린 관계자는 “김 전 교수의 영문초록본문을 구글 등에 넣어 내용이 거의 일치하는 원저자의 글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보도에서 드러난 논문들도 도마 위에 올랐다. 한국국제정치학회는 3월 중순 다시 윤리소위원회를 소집했다. 그 결과 2건의 표절 사례가 추가로 드러났다. 김 전 교수가 2000년 에 발표한 ‘헤겔과 프랑스혁명’은 1989년 스미스 교수가 쓴 책 의 글 일부를 번역해 썼다. 김 전 교수가 2003년 학회지에 발표한 논문 ‘헤겔의 자유주의 비판’도 스미스 교수의 1986년 발표 논문인 ‘헤겔의 자유주의 비판’을 사실상 그대로 베꼈다. 한국국제정치학회 관계자는 “지난 3월31일자로 발행한 학회지에도 논문 철회 사실을 공식적으로 밝혔다”고 말했다.

논문 스캔들은 다른 학회로도 번졌다. 정치학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한국정치학회에서도 현재 그의 논문 7건에 대한 표절 여부를 논의하고 있다. 한국정치학회는 “공식적인 제보는 없었지만 언론 보도 등에서 제기된 내용을 바탕으로 이번주부터 조사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조사 대상은 김 전 교수가 2001년부터 2010년까지 한국정치학회가 발행하는 에 발표한 논문 7편이다. 한국정치학회 관계자는 “우선 편집위원회 회의를 통해 해외 논문에 대한 표절부터 확인하려 한다”며 “최근 5년 사이 ‘자기 논문 복제’로 문제가 된 회원은 있었지만, 한 저자가 여러 건의 논문 표절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왜 학생도 찾는 논문 표절을 못 찾았나

한국정치학회의 논문에서 표절 원문으로 언급되는 학자는 여럿이다. 스미스 교수가 1989년 발표한 논문 ‘헤겔의 법철학에서 권리란 무엇인가?’뿐만 아니라 마크 워런, 버나드 레진스터 같은 정치학자의 논문이 거론되고 있다. 단행본도 있다. 버나드 야크 미국 브랜다이스대학 교수의 책 (Problems of a Political Animal·1993) 등 3권의 책에서 본문을 단순히 번역하거나 재구성했다는 것이다. 김 전 교수는 이들 학자의 원문 출처를 참고 문헌에 싣지 않았다.

김 전 교수가 몸담았던 서울대는 논문 표절 사건에서 한발 물러서 있다. 서울대는 사건이 알려진 뒤 보도자료를 내 “문제가 된 논문이 전임교원 임용 이전에 발표된 것이고 신규 채용시 심사 대상 논문이 아니었다”고 밝혔다. 서울대 정치학과에서 학·석사를 마친 김 전 교수는 1998년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UCLA)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뒤 김 전 교수는 서울대에서 강사로 오래 활동하다가 서울대 정치학과 BK연구교수를 거쳐 2008년 조교수로 임용됐다. 서울대 연구윤리팀의 조진호 전문위원은 “김 전 교수는 더 이상 학교 구성원이 아니기 때문에 논문표절 여부에 대해 연구진실성 조사를 한다 하더라도 결과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김 전 교수의 논문을 검증한 이들은 그의 박사 학위 논문에도 큰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1998년 UCLA에 제출한 ‘헤겔과 니체의 형이상학 비판 연구’의 초록이 헤겔 연구가인 스티븐 훌게이트 미국 워릭대 교수의 책 (1986)의 내용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논문이 표절인 것으로 드러난다면 서울대도 임용 과정에서 검증을 소홀히 한 책임을 피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현재 서울대 연구진실성위원회는 표절 의혹을 받고 있는 김 전 교수의 논문 9건에 대한 조사 접수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UCLA도 해당 논문의 표절 의혹에 대한 문의를 접수받은 상태다.

그렇다면 서울대는 왜 학생들도 찾을 수 있는 논문 표절 사실을 밝혀내지 못했던 것일까. 학내에서는 김 전 교수가 전공한 정치사상 분야의 특수성을 언급한다. 이름을 밝히기 꺼린 서울대의 한 교수는 “정치사상은 국내에 전공자도 적고 김 전 교수가 그 분야의 독보적인 전문가로 알려져 있었다”며 “특히 정치사상은 그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면 진위를 가려내기가 쉽지 않을 만큼 난해한 분야라 논문을 검증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임용 과정의 허술함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정치외교학부 안에서는 김 전 교수의 사건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설사 글을 쓰는 힘겨운 과정에서 출구를 찾다가 넘지 말아야 할선을 넘었다고 하더라도, 표절을 막을 수 있는 장치조차 없었다는 사실이 더 큰 충격이라는 얘기다. 정치외교학부 안에서는 “빨리 사직을 해 학기 시작 전에 충격을 덜 주고 떠난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은 여러 차례 김 전 교수와 접촉하기 위해 전화를 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여전히 문대성 박사, 허태열 박사

논문 표절 유형은 김 전 교수와 같은 단순번역만 있는 게 아니다. 순수과학 분야에서 나타나는 실험 데이터 조작, 그리고 특수대학원이나 예체능 학문에서 나타나는 논문 베끼기 문화 등 그 유형도 다양하고 대상도 광범위하다. 정부는 지난해 중앙행정기관이나 전문기관이 연구 부정행위를 알게 될 때는 해당 연구기관에 그 내용을 이관해 조사하도록 하는 내용을 의무화한 ‘연구윤리 확보 및 부정행위 방지에 관한 규칙’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논문 표절이 드러난 뒤에는 여전히 ‘사과할 일’ 또는 ‘사표 낼 일’ 정도로 마무리되고 있다. 모두가 심각한 범죄행위라고 열을 올리고 있지만, 정작 우리 머릿속에는 스캔들 수준에 머물고 있다. 문대성 의원이 여전히 박사 학위 소지자고, 허태열 청와대 비서실장도 아직 행정학 박사인 것을 보니 말이다.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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