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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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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을 산촌의 숲에 취하다-⑩ 함양 상림(경남 함양)

천 년이 넘는 역사, 신라시대 최치원이 조성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숲 ‘상림’을 걷다… 탁족하며 막걸리나 들이켜면 참 좋겠네
등록 2011-09-21 08:29 수정 2020-05-02 19:26
국내 최초의 인공림인 상림에는 120종 2만여 그루의 나무가 자란다. 지난 1100년 동안 상림은 함양 사람들의 휴식처였다. 한겨레21 김경호

국내 최초의 인공림인 상림에는 120종 2만여 그루의 나무가 자란다. 지난 1100년 동안 상림은 함양 사람들의 휴식처였다. 한겨레21 김경호

심오한 뜻이 담긴 이름은 아니었다. ‘위에 있는 숲’이라서 상림(上林)이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숲, 경남 함양 상림을 찾은 것은 추석을 일주일 앞둔 9월5일이었다. 평일 오후라서였을까. 관광 온 외지인들만 어쩌다 눈에 띌 뿐 한적한 숲은 새소리와 물소리만 가득했다.

함양 사람들의 애착으로 키운 숲

윗숲이 있는데, 아랫숲은 없었을까. 동행한 숲해설사 배정경(34)씨한테 물었더니, 있었단다. 원래는 하나의 숲이었는데, 중간에 마을이 파고들어 위아래로 나뉜 뒤 상림·하림으로 불렸다. 하림은 한국전쟁 당시 정찰기 비행장이 생기면서 사라졌고, 지금은 군부대와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신라 진성여왕 말기 지방관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했다고 하니, 숲의 역사는 1100년이 넘는다. 분지의 중앙을 가로지르던 위천이 자주 범람하자, 제방을 쌓아 물길을 돌린 뒤 둑을 보호하려고 나무를 심은 것이 숲의 기원이다. 전남 담양의 관방제림과 용도가 같다. 흥미로운 것은 1천 년이 넘는 세월을 견뎌온 숲치고는 눈에 띄는 거대목이 드물다는 점이다. 상림에서 가장 큰 느티나무가 지난 8월 강풍으로 쓰러졌는데, 나이테로 수령을 측정해보니 ‘고작’ 102년이었다고 한다. 배정경씨에게 연유를 묻자, 자연 상태의 숲에선 극심한 경쟁 때문에 나무들이 100년 이상 살기 어렵다는 설명이 돌아온다. “팔팔한 놈들이 자기도 살겠다며 눈 부라리고 파고드는데 늙은 것들이 우짜겠어요? 스트레스 받으면 나무도 오래 몬 산다 아입니꺼?” 가혹한 경쟁이 야기하는 고통은 나무나 사람이나 매한가지란 얘기다.

상림에는 120종 2만여 그루의 나무가 살고 있다. 때죽나무, 사람주나무, 쪽동백, 당단풍, 나도밤나무 같은 소교목과 느티나무, 서어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같은 대교목들이 섞여 자란다. 최치원이 숲을 조성할 때 지리·덕유·가야산의 나무들을 옮겨 심었다는 얘기가 전해오지만, 도로가 변변찮고 운송 수단도 마땅찮던 시절에 과연 그랬을까, 의심이 가는 건 별 도리가 없다.

숲의 조성자가 최치원이다 보니, 상림이란 이름 대신 최치원 공원으로 개칭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경주 최씨 문중이 주도해 함양 군민들을 상대로 여론조사까지 벌였지만, 다수가 상림을 선호했다고 한다. 이익의 정치가 장소의 역사성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상림에 대한 함양 사람들의 애착이 그만큼 강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상림 초입에서 만난 강상진(46)씨는 “하루라도 안 나오면 ‘큰일’ 보고 뒤 안 닦은 것처럼 개운치가 않다”고 했다.

연암 박지원이 처음 설치해 함양의 상징이 된 물레방아. 한겨레21 김경호

연암 박지원이 처음 설치해 함양의 상징이 된 물레방아. 한겨레21 김경호

주차장을 출발해 5분쯤 걸으니 누각과 공연 무대 등이 있는 넓은 공터가 나온다. 누각의 이름은 함화루(咸化樓). 옛 함양읍성 남문의 문루를 옮겨놓은 것이다. 누대에 서면 지리산 천왕봉이 보인다고 해서 원래 이름은 망악루(望岳樓)였단다. 숲 속 공터는 한국전쟁 당시 군부대가 주둔하며 생긴 것이라고 하는데, 3년의 전쟁 기간을 통틀어 이곳이 정규군끼리 맞붙은 주전선이었던 적은 없으니, 군이 주둔했다면 십중팔구 지리산과 덕유산을 무대로 활동하던 빨치산을 소탕하려고 편성된 토벌대였을 것이다.

함양에서 빨치산 활동이 활발했던 데는 지리적 환경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서쪽으로 백두대간이 통과하는 경남 서부의 산악분지인 함양은 지리산과 덕유산을 잇는 중간지점에 위치한데다, 행정구역 안에 1천m를 넘는 고봉이 17개나 되다 보니 산자락에 은거하며 유격전을 펼치기엔 최적이었다. 전설적인 빨치산 지휘관 남도부(본명 하준수·1922~55)가 함양 출신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함양 부호의 아들인 그는 일제 말 학병 징집을 피해 함양 괘관산에 은거하며 비슷한 처지의 학병 기피자를 규합해 보광당이란 무장단체를 만들어 활동했다. 1948년 5·10 총선을 앞두고는 함양군 야산대를 조직해 지리산 천왕봉에서 토벌대와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남한 빨치산의 발상지가 함양인 셈이다. 남도부는 이병주 소설 에 등장하는 주인공 박태영의 실존 모델로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 군사독재의 역사 고스란히 품어

공터를 지나 숲의 중심부로 들어가니 콘크리트 기단 위에 목조 누각을 얹은 키치풍의 누정이 눈에 들어온다. 화수정(花樹亭)이다. 1972년 함양의 파평윤씨 종중에서 세웠다고 하는데, 상림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고 11년이 지난 뒤다. 사유지도 아닌 국가지정 기념물 안에 종중의 이름을 단 건축물을 세우는 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군 관계자에게 물으니, “정자를 건립하던 당시 파평윤씨가 함양경찰서장으로 있어 가능했던 일”이라고 귀띔한다. 궁금증이 도져 인터넷을 뒤져본다. 정자 건립 시기가 윤아무개 총경의 서장 재임 기간(1971~74년)과 겹친다. 전후 사정이 대충 그려진다.

그런데 1973년 5월 윤 총경의 이름으로 검색되는 진주발 기사가 시선을 잡아끈다. 그해 4월 윤 총경을 태운 함양경찰서 지프차가 산청의 도로에서 취객을 친 뒤 달아났다는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게 됐는데, 산청 경찰이 상황을 뒤집으려고 신고자인 유조차 운전자를 고문해 가해자로 둔갑시켰다는 내용이다. 이 사건은 박원순 변호사가 쓴 에서 박정희 시대의 대표적 고문조작 사례로 기록돼 있다. 진범이 누가 됐든 윤 서장이 평범한 경찰간부가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개운찮은 기분을 씻어내려 걸음을 재촉하니 또 다른 누정인 사운정(思雲亭)이 나온다. 1906년 경남 유림들이 최치원을 추모하려고 세운 것이다. 요즘도 지역 시우회원들의 시조창을 비롯해 각종 문예행사가 자주 열린다. 지난 8월 강풍 때 고목이 쓰러지며 지붕을 덮쳤으나, 다행히 기와 몇 장만 깨지고 큰 피해는 없었다고 한다. 사운정 옆으로는 작은 물길이 지난다. 상림을 관통하는 인공수로다. 숲을 만들 당시 원활한 배수와 수분 공급을 위해 조성한 것인데, 흐르는 물소리가 맑고도 정겹다. 탁족하며 막걸리라도 들이켜면 제격이겠다.

상림에서 이어지는 필봉산 산책로. 한겨레21 김경호

상림에서 이어지는 필봉산 산책로. 한겨레21 김경호

“지금은 줄 쳐서 막아놨지만, 옛날엔 여기 전부가 노는 디였어. 어찌나 장구 치고 노래를 불러대는지, 마음이 심란해서 일을 몬했어.” 상림 옆 죽장마을에 60년째 살고 있는 박분순(76) 할머니의 회상이다. 흰 고무신에 몸뻬 차림으로 숲길을 걷던 할머니는 “풀 뽑는 일 하러 공원사무소 가는 길”이라고 했다. “놀면 뭐하노? 걸을 수 있을 때 부지런히 나가 용돈 벌어야지.”

물소리, 새소리에 취해 걸음을 옮긴다. 죽장마을로 이어지는 소로변에 물레방아가 돌고 있다. 물레방아는 함양군의 상징물이다. 연암 박지원이 1792년 현감으로 부임하면서 지금의 안의면 안심마을에 물레방아를 설치한 데서 연유했단다. 그래서 군의 축제 이름이 물레방아축제다. 물레방아는 거창·산청·함양 등 서부 경남에서 전승되는 민요 에도 등장한다. “함양·산청의 물레방아는 물을 안고 돌고, 우리 집 서방님은 나를 안고 돈다.” 쉴 틈 없이 아내를 안고 돌았을 함양 남자들의 노고에 존경심마저 든다.

상림과 이어진 필봉산 산책로로 접어든다. 지난해 함양군은 상림 숲길과 필봉산 오솔길을 묶어 ‘최치원 산책로’라 이름 붙였다. 산책로 길이가 짧은 상림의 단점을 보완하려고 아이디어를 짜낸 것인데, 걸어본 이들의 반응이 좋단다. 평지의 숲길과 구릉의 오솔길을 이어놓으니 지루함도 덜하다. 상림의 북쪽 끝과 맞닿은 대병저수지를 끼고 돌아 필봉산 자락으로 들어서니, 순해진 초가을 햇살이 죽죽 뻗은 솔가지 사이로 기분 좋게 부서져내린다. 능선에 오르자 남쪽의 삼봉산(1186m) 능선 너머로 지리산 천왕봉(1915m)이 시야에 잡힌다. 북쪽으로는 백암산(621m)과 괘관산(1252m) 너머 남덕유산(1507m)의 완만한 능선이 펼쳐진다. 덕유산과 지리산을 동시에 조망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평지와 구릉 조화로운 ‘최치원 산책로’도 추천

장쾌한 산세에 넋 놓고 있는 사이 운동복 차림의 날렵한 여성 1명이 쏜살같이 지나간다. 말을 붙였더니 수줍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인접한 전북 남원 아영(阿英, 이름 정말 예쁘다!)에서 30년 전 함양으로 시집을 왔다는 박종임(53)씨다. 1년 전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은 뒤 운동 삼아 상림과 필봉산을 걷기 시작했는데, 상서로운 숲 기운 덕인지 요즘은 아픈 곳이 없단다.
구릉을 오르내리며 1시간쯤 걸었더니, 다시 상림의 남쪽 끝이다. 산촌의 초가을, 참 좋다.
*취재 일정과 현지 사정으로 인해 애초 예정됐던 선청 남명길 대신 함양 상림으로 연재를 대체합니다.

함양=글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걷고 싶은 길

걷고 싶은 길

■ 교통편
승용차로는 대전~통영 고속도로에서 함양IC로 빠져 함양읍내에서 상림을 찾으면 된다.
고속버스는 동서울터미널에서 함양까지 하루 11회 왕복 운행한다. 편도요금 1만7200원. 예상 소요시간 3시간
함양고속버스터미널에서 상림 주차장까지는 택시로 10분 안팎, 걸어서는 20분 정도 걸린다.



■ 여행 정보
상림공원관리사무소 055-960-5756
함양군청 문화관광과 055-960-5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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