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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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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람 미란다

등록 2009-12-23 06:54 수정 2020-05-02 19:25

형사사법 절차와 관련해 역사상 가장 중요한 판결 가운데 하나가 미국 연방대법원의 ‘미란다 대 애리조나 사건’(1966) 판결이다. 그 유명한 ‘미란다 원칙’을 확립한 판결이다. 이후 미국은 물론 전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피의자는 묵비권과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권리 등을 누리게 됐다. 이 재판의 피고인이었던 에르네스토 미란다는 이후 어떻게 됐을까?
미란다 원칙을 고지받지 않은 상태에서 자백한 진술은 재판에 사용할 수 없다는 연방대법원 판결로 그는 일단 풀려났지만, 검찰은 그 자백 이외의 증거를 가지고 다시 기소했다. 그리고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두 번째 재판에서 결정적 증거는 미란다가 감옥에 찾아온 여자친구에게 한 말이었다. 자신의 성폭행 범행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던 것이다.

징역을 살고 나와서도 그는 새사람이 되지는 않았다. 가정용품점에서 배달일을 하던 미란다는 1976년 어느 날 애리조나주 피닉스의 한 지저분한 바에서 멕시코 출신 이주민들과 포커판을 벌이다 주먹다툼에 휘말린다. 그 와중에 흉기에 찔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도착하자마자 숨지고 만다. 경찰은 싸움에 가담한 멕시코 이주민 중 한 명을 체포한다. 그리고 그에게 ‘미란다 원칙’을 읽어준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아이러니하다. 미란다는 자신을 죽인 범인에게 묵비권과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권리 등을 선물로 안기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인권과 절차적 정의를 진전시키는 중요한 판결은 반드시 ‘선한’ 피고인이 연루된 재판에서 나오는 건 아니다. 미란다처럼 진범임이 확실한데다 품행도 나쁜 사람이 역사적인 판결의 주인공이 되고, 이후 수많은 억울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결과적 선행’을 베풀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자신을 죽인 범인처럼 정말 나쁜 사람도 그 선행의 수혜 대상에서 예외는 아니다.

이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선정한 ‘올해의 판결’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례가 눈에 띈다. 김태환 제주도지사는 200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공무원을 동원한 선거운동을 기획한 혐의로 기소돼 1·2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대법원이 압수수색 집행의 엄격한 기준을 새롭게 제시하면서, 1·2심에서 결정적인 증거로 사용된 자료들이 위법한 압수수색의 열매로서 증거능력을 잃어버리게 됐다. ‘올해의 판결’ 심사위원인 금태섭 변호사가 “한국의 미란다 판결”이라고 극찬한 이번 대법원 판결은 형사사법 절차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지만, 그로 인해 김 지사는 처벌을 피한 셈이 됐다. 이 판결은 앞으로도 수많은 억울한 사람들과 또한 수많은 진범들에게 마구잡이 압수수색을 받지 않을 권리를 선물로 안길 것이다.

일부 심사위원들도 지적했지만, 헌법재판소가 집시법의 야간집회 금지 규정은 헌법에 합치하지 않는다고 결정을 내린 마당에 야간집회 참가자에게 무죄를 선고한 판결이나 미네르바 박대성씨를 무죄로 풀어준 판결 등은 ‘올해의 판결’로 선정되기엔 너무나 당연한 판결일 수 있다(물론 요즘처럼 상식이 위협받는 사회 분위기에서 그런 판결도 법관의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건 안타까운 진실이다).

그래서 미란다 판결이나 김태환 지사 사건 판결을 더 곱씹게 된다. 인권과 절차적 정의의 원칙은 그 적용 대상자가 누구든, 그가 선한 자이든 악한 자이든, 그 적용으로 인해 악한 자가 이득을 취하는 일이 있더라도, 늘 한결같이 적용돼야 한다는 진리를 되새기게 하기 때문이다. 정치·사회·경제 각 분야에서 온갖 아전인수와 편법으로 각종 원칙을 왜곡해 자기에게 유리하게만 적용하려는 풍토가 판치는 요즘이기에 더욱 그렇다.
산타 할아버지는 착한 아이와 나쁜 아이를 구별해 착한 아이에게만 선물을 준다고 자녀들에게 말하는 부모도 결국 말썽쟁이를 포함한 모든 자녀에게 선물을 준다. 원칙은 크리스마스 선물과 같은 것이다.

한겨레21 편집장 박용현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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