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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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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의 보도, 보도의 빈곤

등록 2009-09-30 01:43 수정 2020-05-02 19:25

2주 전부터 연재를 시작한 ‘노동 OTL’ 기사에 독자 여러분의 수많은 관심과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노동 OTL은 아무리 고되게 일해도 최저임금의 사슬에 묶여 빈곤을 벗어나기 힘든 이른바 ‘근로빈곤’(working poor)의 현실을 기자가 직접 땀 흘려 들여다보는 기획이다. 찬사의 개략은 이렇다.
“출근하면서 기사를 읽었습니다. 갑자기 눈물이 나서 순간 저 자신도 놀랐습니다. 정말 함께하는 세상은 언제나 올는지…. 앞으로도 좋은 기사 부탁드립니다.”
“좋은 기사에 감사합니다. 이런 기사들이 많이 나와야 할 텐데 말이죠.”
“라는 신문사에 대한 인식에서도 이 시대에 제대로 된 언론인들이 진심으로 대한민국을 걱정하는 제대로 일하는 곳이구나, 마음속의 친한 친구가 새로 생겨난 듯 든든한 마음을 가져담고 갑니다.”
“의견 쓰려고 회원 가입까지 했습니다. …사람들이 왜 , 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단순히 이쪽 현실은 이렇다라는 데서 그치지 말고 더 나아가 좀더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언론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보기 드문 기자 정신을 가진 분이라는 생각에 경의를 표합니다~. 얄팍한 지식과 영악한 혓바닥으로 글을 쓰시는 분들이 워낙 많아서요~. 정기구독해야겠습니다~. 그래야 저의 현실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워준 님의 실험정신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이라고 감히 생각해봅니다~.”
이런 댓글들을 읽으며 ‘과분한 상찬’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그다음 뇌리를 치는 건 ‘많은 독자들이 이런 기사에 목말라했구나’ ‘적어도 이런 기사가 새삼 충격으로 다가왔구나’ 하는 깨달음이었다. 비정규직, 고된 노동, 가난한 이웃 등에 대한 기사는 적지 않다(물론 보수 언론에선 찾아보기 쉽지 않지만 아직 건강한 언론이 많으므로). 하지만 대부분 추상의 정도가 커서 생생한 이야기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또 구체적인 이야기를 쓰더라도 (이는 주로 보수 언론에서 많이 등장하는 기사인데) 지나치게 특정 개인사에 매몰돼 구조의 문제를 놓치게 하곤 한다. 그래서 이런 댓글도 나오는 것일 테다.
“체험 기사치곤 꽤 오밀조밀 잘 쓰셨는데, 그들의 절박한 사정에 대해 썼더라면 오히려 급의 드라마틱한 눈물 짜는 기사로 사람들의 심금이나 울려줄 수 있었을 텐데요.”
외국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은가 보다. 미국의 한 대안매체 기사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그들(언론)은 집단으로서의 빈곤층을 얘기하지 않아요. 그보단 개인사를 들춰내죠. 신문을 팔려고요.” “비극적인 일이 발생하면 그들(언론)은 카메라를 들고 달려오죠. 하지만 그날만 지나면 그들은 사라져요.”(에 실린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보이게 하기: 자신의 미디어를 만들려는 빈곤운동가들’ 기사 중에서)
빈곤의 보도이되, 보도의 빈곤이라고 해야 할까. ‘보이지 않는’, 실은 ‘우리가 보려고 하지 않았던’ 사람과 장소와 시간들이 우리 주위엔 아직도 많다는 것을 아프게 되새긴다. 시대와 삶을 ‘기록하는 자’인 기자로서의 의무감도 더 무거워진다.
아울러 바라는 바는, 근로빈곤을 떨쳐내기 위한 집단적 모색, 그러니까 빈곤운동 혹은 근로빈곤운동이 도도한 사회운동으로 형성돼나갔으면 하는 것이다. 당장 내년 1인당 세금이 19만원꼴로 늘어나는데 세금을 근로자는 더 걷고 기업은 줄인다는 기사를 접하면서, 대한민국이란 공동체에서 어떤 움직임이 일어나야 할까 상상해본다. 미국의 예에서 보듯, 근로빈곤층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미디어를 만드는 시도도 생각해볼 수 있다. 기존 시민사회단체들도 이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아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번 한가위에 만날 가족·친지 가운데 노동 OTL의 고단한 생에서 잠시 휴가를 얻어 풀려난 이를 우리 모두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명절 연휴임에도 일터를 떠나지 못해 얼굴을 마주할 수 없는 이가 분명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편집장 박용현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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