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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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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풍차 날개에 온몸 내 던진 ‘바보’


이 땅의 보수는 승자독식과 조리돌림 서슴지 않는 권력 숭배의 적통
등록 2009-06-02 04:50 수정 2020-05-02 19:25

피에로 가면과 복장을 한 배우들이 우르르 나와 서로 마구잡이로 치고 박는 코미디를 선사한다. 물론 치고 박다가 죽은 척 쓰러지기도 하지만 곧 다시 살아나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한층 더 거세게 날뛰며 관객은 더욱 배꼽을 잡고 웃는다. 한바탕 북새통이 지나가고 피에로들은 퇴장한다. 그런데 한 사람이 그대로 무대에 널브러져 있다. 그는 정말로 죽어 있다. 온몸의 뼈가 바스라지고 내장은 파열돼 있다. 이 모든 것이 한바탕 ‘쇼’인 줄 알고 좌석에 기대앉아 웃고 욕하고 야유하던 관객은 형언할 수 없는 경악과 충격에 빠진다. 그리고 피에로들의 웃음판 속에서 숨을 헐떡였던 맨얼굴의 진실한 인간의 모습 앞에 깊은 죄의식에 빠진다.
대한민국 정치사의 격동의 반세기는 실로 파란만장했지만, 우리는 역대 직업 정치인들 가운데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외에 자신이 소중하게 신봉하던 가치들이 자신의 정치적 허물과 함께 훼손되는 것을 막으려고 글자 그대로 몸을 날려 희생한 이를 알지 못한다. 그가 서거하기 전 뇌물 시비에 휘말리게 됐을 때 스스로 누리집을 폐쇄하며 남겼던 말이 가슴을 두드린다. “저를 버리십시오. 저는 이제 여러분의 소중한 가치를 상징하는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이 거인의 주검 위를 날아다니며 명예롭지 못한 자살이네 운운하면서 왱왱거리는 파리떼들은 단돈 ‘29만원’으로 벌써 십 몇 년째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자신들의 ‘영웅’을 찾아 연희동으로든 어디로든 꺼지라 하라. 그의 부족함과 허물이 무엇이었건, 노 전 대통령은 기득권과 위계서열로 사람들이 주눅들지 않고 서로 미워하지 않는 ‘사람 사는 세상’을 진실로 간절하게 희구했던 ‘인간’이었고, 그 꿈을 위해 어느 드라마 작가도 감히 꾸며내기 힘든 파란만장의 여정을 힘겹게 걸어온 인물이었다. 이제 생사일여를 깨달은 그는 그 꿈을 영원히 사람들 마음속에 온전히 남기고 부엉이바위에서 죽음의 허공을 향해 한 발을 내디뎠다.
조선 후기의 지배계급은 ‘파당 정치’라는 못된 질병을 이 땅에 심어놓았다. 민의도 아닌 자신들의 당리당략 놀음 끝에 일단 권력만 잡으면 반대쪽 노인·아이까지 삼족을 멸해버리는 잔인한 승자독식의 행태를 어느 얼빠진 역사가가 ‘근대 정당정치의 원형’이라고 미화하는가. 한국의 보수 세력은 지난 1년6개월의 집권 기간에 자신들이 몇백 년째 이 땅에 눌어붙어 사람들의 정신과 활력을 빨아먹는 이 안하무인식 권력 숭배의 적통임을 증명해왔다. 마치 식민지를 점령한 외국 군대처럼 민주화 이후 20년간 피어난 민주적인 법과 질서를 검찰과 경찰과 대법관까지 동원해 짓누르고 무시해버렸다. 그리고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전임 대통령을 측근과 가족 따지지 않고 잡아들이며 반년에 걸쳐 목을 조여들면서 또 매체를 이용한 조리돌림을 서슴지 않았다.
‘권력만 잡으면 끝’이라는 이 야비한 원리는 또 ‘줄만 잘 서면 끝’이라는 바닥 모를 시꺼먼 허무주의를 온 사회에 창궐시키며, 나라와 개인의 영혼과 양심과 자율성의 가치를 좀먹는다. 사람들은 모두 높게 뻗쳐 올라간 권력 위계의 사다리에 올라타서 자기 발밑의 사람을 짓밟고 또 위 사다리로 기어 올라가려는 무한의 아귀다툼을 벌이면서 사회는 아수라장이 된다. 바로 이 오만한 권력의 사닥다리야말로 노무현이라는 ‘바보’가 돌격했던 풍차다. 비록 사회·경제적 문제들에 대한 몰이해와 실책이 있었을망정, 탈권위주의를 몸소 실천하고 영호남 대립에 도전하고, 비록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교육계와 언론계를 위시해 사회 구석구석에 뿌리박은 크고 작은 기득권의 사다리를 허물려 안간힘을 썼던 그의 진심을 의심하는 이는 없다.
그의 도전은 한국 사회를 크게 바꿔놓았다. 이제 그 누구도 그저 나이가 많다고 해서, 남자라고 해서, 그 밖의 무엇이라고 해서 합리적인 이유 없이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기가 쉽지 않게 됐다. 이제 우리의 어린아이들도 불합리한 것이 있으면 인터넷에서 광장에서 생각대로 말하고 촛불을 들고 행진을 조직할 줄 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우리들은 삶에 쪼들리고 힘에 눌려 못할망정, 몰라서 못하고 주눅들어 못하는 비굴한 얼간이는 아니다. 광장에 나와 함께 불의에 항의할 줄 알고, 또 함께 웃고 끌어안고 어울릴 줄 아는 사람들로 나날이 변해가고 있다.
‘바보’ 기사가 올라탄 늙은 노새는 이 거대한 풍차와의 싸움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이 부쳤고, 기사는 풍차 날개에 부딪혀 허공으로 날아가 온몸이 조각났다. 그의 주검 옆에 허탈하게 퍼져 앉은 나는 흐느끼며 깨닫는다. 내가 쌍욕을 해대며 그를 비판하던 순간에도 변함없이 그는 용감하고 의연한 ‘노짱’이었으며 나는 그를 마음 깊이 좋아하고 따르던 하인 산초 판사였음을.
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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