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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곳으로 임하는 법률가들 있으매…

소수자 위한 기획소송 등 진행해온 공익 변호사그룹 ‘공감’ 창립 5돌 후원회에 가지 않으실래요?

제761호
등록 : 2009-05-21 14:55 수정 : 2009-05-22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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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유일의 비영리 공익 변호사그룹이 있다. ‘공감’이다. 2004년 1월에 만들어졌다. 어느덧 5년을 넘겼다. 5월25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5주년 기념 후원의 밤 행사를 연다. 이 후원 행사에 참여해 ‘공감’에 기부해야 할 이유을 공감하게 만드는 데 이 기사의 초점이 있다. 노골적 홍보 기사를 써도 좋을 만한 가치를 그들이 품고 있다. 편집자

사법연수원생 염형국은 원래 ‘아웃사이더’였다. 대학 시절, 그는 공부도 안 했고 학생운동도 안 했다. 법대의 개인주의 풍토가 싫었지만, 그렇다고 전공을 바꾸는 도발을 일으킬 용기도 없었다. 용기를 내어 저지른 일이 딱 하나 있었다. 만난 지 석 달 된 동갑내기 여학생과 결혼해버렸다. 군 입대를 앞두고 있었는데, “지금 놓치면 끝장이다” 생각했다.

완전 무수임료로 공익 법률활동만 하는 공익 변호사그룹은 ‘공감’이 유일하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차혜령, 염형국, 정정훈, 장서연, 황필규, 소라미, 김영수 변호사.

사법연수원에서도 그는 ‘아웃사이더’였다. 좋은 성적을 내는 일에 다들 혈안이 돼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연수원 성적을 높여 판검사가 되겠다고 안달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버는 변호사가 될 것인지도 궁리하지 않았다. 용기를 내어 저지른 일이 딱 하나 있었다. 다짜고짜 박원순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를 찾아가 공익 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날이 참 무더워 반팔 와이셔츠에 땀이 잔뜩 배어나던 2003년 8월의 일이다. 이후로도 그는 결심하면 저지르는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다.

무수임료·영리활동 일체 금지 원칙


또 다른 사법연수원생 정정훈은 ‘문장’을 사랑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줄기차게 읽었다. 한 달에 15만원씩을 책값으로 썼다. 2003년 12월, 연수원 졸업을 앞두고 있던 그는 기막힌 ‘문장’ 하나를 발견했다. “낮은 곳에 임하는 용기로 소외된 희망을 되살리겠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로펌을 만들겠습니다.” 염형국이 ‘동지’를 찾고 있었다. 연수원 게시판에 올라온 이 글이 정정훈의 인생을 바꿨다. 그는 나중에 ‘공감’이라는 이름을 지어붙여 게시판의 명문에 화답했다. 훗날 그는 ‘책과 술’이라는 소모임을 만들어 예비 법조인·대학생들을 장차의 공익 변호사로 길러낼 터였다.

2004년 1월5일,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서 ‘공감’의 첫 번째 회의가 열렸다. 염형국·정정훈 변호사 외에도 사법연수원 동기인 소라미·김영수 변호사가 함께했다. 아름다운재단이 모아둔 ‘공익 변호사 기금’을 종잣돈 삼아 일을 벌였다. 김영수 변호사는 출근 첫날의 사무실을 기억한다. 아름다운재단 사무실 2층 베란다에 유리 지붕을 덮었다. 4개의 책상에 4대의 컴퓨터를 올렸다. 묵묵하고 꼼꼼한 그의 책상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사무실에서 가장 깔끔하다. 그래도 앉으면 다른 사람의 등이 맞닿았다. 1989년 대학에 들어간 김 변호사는 “그 시절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가졌던 사회적 정의감”으로 ‘공감’에 합류했다. 정의를 믿었던 그는 찬바람 들이치는 가건물의 사무실이 누추하다 여기지 않았다.

매일 5~6시간씩 두 달여 동안 회의를 거듭했다. ‘공감’의 얼개가 이 시절 마련됐다. 월급은 연봉 3천만원. 세금 떼기 전의 액수이므로, 실수령액은 월 200만원이 조금 넘는다. 개인적 수익활동 금지. ‘공감’ 차원의 영리활동도 금지. 외부 강연비 등 부대수입은 사무실 운영비로 쓴다. 뭇 변호사들은 이들의 누추함에 입이 벌어질 것이다.

진짜 놀랄 만한 일은 이들이 받는 돈이 아니라 하는 일에 있다. ‘공감’의 모든 구성원은 평등하다. 변호사와 상근활동가 사이의 구분도 없다. 대표도 없고 지도자도 없다. 여느 로펌과 달리 비서직도 없다. 소송서류 준비부터 정리까지 각자 알아서 한다. 모든 구성원은 서로의 활동을 존중하고 도울 뿐이다. 일정 시기마다 시민단체를 바꿔가며 법률지원 사업을 벌인다. ‘공감’ 변호사가 각 단체에 파견근무를 하면서 공익소송을 벌인다. 수임료는 받지 않는다. 소송비용 등은 모두 후원금으로 충당한다. 각종 법률 제정과 캠페인 활동도 벌인다. 법정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고 기꺼이 ‘현장’에 간다. 1인시위도 하고 현지 조사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여 지난 5년간 ‘공감’이 이룬 성취의 큰 줄기는 이렇다. 62개 공익단체에 대해 법률지원 사업을 펼쳤다. 권력자들은 법을 무기로 약자를 탄압하는데, 이에 맞서는 시민단체들도 법을 방패로 삼을 일이 많다. ‘공감’은 그들의 방패가 됐다. 일련의 ‘기획 소송’도 전개했다. 보통의 변호사들은 돈이 안 되면 사건을 맡지 않는다. 반대로 돈이 되면 조직폭력배, 파렴치범, 부패 정치인도 변호한다. 법의 이름으로 주목받아 마땅한 일을 변호사들은 무심히 발길로 찬다. 차버리고 회피하는 일을 ‘공감’이 맡았다.

변호사·활동가 구분 없는 평등 조직

장애 어린이의 보험 가입을 거절하는 보험사에서 손해배상을 받아냈다(2006년 7월). 중소기업중앙회를 상대로 외국인 산업연수생의 퇴직금을 받아냈다(2007년 6월). 상관에게 스토킹을 당하고도 항명죄로 1심 군사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던 여군장교의 무죄를 입증했다(2008년 7월). 중국인 민주화 운동가의 난민 지위를 처음으로 인정받았다(2008년 11월).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양성 판정을 받았다는 이유로 강제 출국당할 뻔 한 외국인의 국내 체류 권리를 인정받았다(2009년 1월).

그러나 승리한 소송만을 톺아보는 것은 ‘공감’을 온전히 평가하는 방법이 아니다. 소라미 변호사는 안방마님으로 통한다. 동료 변호사들에게 ‘기합’을 넣으면서 분위기를 다잡는다. 그랬던 그도 지난달엔 잠시 뭉클해졌다. 세네갈 출신의 이주노동자가 아프리카풍의 목걸이를 선물했다. 한국 여성과 동거하면서 아이를 셋 낳아 살던 사람이었다. 불법 체류자로 단속돼 추방당할 위험에 처했다. 소 변호사는 그를 가두고 있는 출입국관리사무소, 그에게 재입국 비자를 내줘야 할 세네갈 주재 한국대사관, 그의 아이들을 맡아 입양 보내려는 한국의 고아원 등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서류를 내고 협조를 요청했다. 그는 한국에서 아내와 아이를 다시 만났다. 목걸이는 그가 고국에서 가져온 감사의 징표였다.

소외된 자의 벗이 되는 이런 일이 ‘공감’ 변호사들에게는 무수히 많다. 모든 소수자가 ‘공감’의 고객이다. 장애인, 여성, 노인, 어린이, 노숙인, 철거민, 성적 소수자, 이주노동자, 난민 등의 권리를 변호했다. 노인·아동 학대, 장애인·이주노동자 차별 등에 대한 법률 매뉴얼을 만들고 관련 법령 제·개정을 촉구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대학생·예비 법조인·사법연수원생·외국 변호사 등을 상대로 인권법 캠프를 열거나 실무교육을 진행했다.

7개 로펌·400여명 개인 후원으로 유지

이런 삶이 좋다고 제 발로 찾아온 사람들이 여럿 생겼다. 나이는 많지만 뒤늦게 사법고시에 합격한 황필규 변호사는 ‘공감’ 모델의 저작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는다. ‘공감’ 창립 때, 그는 아직 사법연수원생 신분이었다. 공익 법률활동을 하겠다고 일찌감치 마음먹고, 주변 사람들에게 개인 후원금을 모으고 있었다. 그런데 염 변호사 등이 선수를 쳤다. 연수원을 졸업하자마자 그는 ‘공감’에 들어왔다. 밤샘을 밥 먹듯 하고 저돌적으로 사업을 펼치면서 노련한 협상을 이끄는 늦깎이 변호사의 수완은 창립 멤버들을 완전히 홀렸다.

2007년 2월에 합류한 장서연 변호사는 검사 출신이다. 전남 순천지청에서 1년간 일했다. 도박 등 사행성 범죄를 전담했다. 특권 의식에 젖어들까 두려워졌다. 검사를 그만둔다는 이야기에 가족들이 모두 말렸다. 가족들은 지금 ‘공감’에 후원금을 낸다. 차혜령 변호사는 2008년 3월에 ‘공감’을 찾아왔다. 3년 동안 대형 로펌에서 일했다. 건설사들의 법률 자문을 맡았다. ‘공감’으로 옮기면서 그의 임금은 4분의 1로 줄었다. 그래도 지금의 보람을 옛날의 연봉과 맞바꿀 생각은 전혀 없다.

4명의 변호사와 1명의 상근활동가로 시작했던 살림살이는 이제 7명의 변호사와 2명의 상근활동가로 늘었다. 가건물을 벗어나 38평짜리 사무실도 마련했다. 7곳 정도의 대형 로펌과 개인 기부자 400여 명이 ‘공감’을 후원하고 있다. 그래도 더 많은 낮은 곳으로 다가가 더 많은 소외된 자를 도우려는 이들의 욕심은 아직 채워지지 않았다.

취재 내내 열심히 캐묻고 다닌 게 있다. 서로 싸운 적이 있는지, 조직이 위기에 빠진 적이 있는지, 묻고 또 물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심각하게 생각하다 한결같이 답했다. “그런 적 없는데…. 지향이 같으니까…. <한겨레21> 기자들은 서로 싸우나요?” 법 없이도 살아가는 법률가 공동체는 희귀하고도 신통하다. 그들이 배우고 익힌 법이라면 능히 약자의 공동체를 지켜줄 것이다. 그런 법률가들을 돕는 방법은 홈페이지(www.kpil.org)에 소개돼 있다.

공익법 활동 역사와 외국 사례

미국선 변협·대형로펌이 선도적 구실

“변호할 가치가 있는 사람은 돈이 없고, 돈이 있는 사람은 변호할 가치가 없다.” 경제학자로 알려진 칼 폴라니(1886~1964)는 원래 변호사였다. 자신의 직업에 절망한 그는 결국 변호사를 때려치웠다. 대신 학자의 길을 걸었다.

1970~80년대의 한국에서 ‘좋은 변호사’는 인권 변호사였다. 군사독재에 맞섰다. 1988년 창립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그 연장선에 있다. 주로 정치적 권리의 문제를 다퉜다. 2000년대 들어 ‘좋은 변호사’들은 영역별로 세분화됐다. 환경운동연합 부설 환경법률센터(2000년), 민주노총 법률원(2002년) 등이 만들어졌다. 참여연대 등 일부 시민단체에서 상근하는 변호사들도 생겨났다.

‘공감’은 이런 흐름을 대표한다. 비영리 공익 변호사들이 집결한 국내 최초의 단체다. 미국의 공익법 활동에서 영감을 얻은 바 크다.

미국 최초의 공익 법률기관은 1876년에 생겼다. 뉴욕의 독일계 변호사들이 독일 출신 이민자들에게 무료 법률 상담을 해줬다. 그 대상이 점차 넓어져 1880년에는 ‘뉴욕 법률 지원 소사이어티’로, 1911년에는 ‘전미 법률지원 소사이어티 연합’(NALAS)으로 확대 개편됐다. 1964년 ‘빈민구제법’(Economic Opportunity Act) 제정 이후엔 연방정부가 빈곤층에 대한 무료 법률 상담을 지원했다.

그러나 1980년대 레이건 집권기를 거치면서 공익법 활동에 대한 정부 지원이 크게 줄었다.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은 미국변호사협회(ABA)였다. 1983년, 변호사 직무 규칙에 연간 40시간 이상의 공익 법률활동을 펼쳐야 한다는 항목을 새로 만들었다. 1993년에는 대형 로펌이 올리는 수익의 3~5%를 공익법 활동 지원에 쓸 것을 결의하기도 했다. 변호사협회의 주도로 2007년 현재 196곳의 미국 로스쿨 중 169곳에서 공익법 활동을 주요 커리큘럼으로 도입했다. 이 가운데 35개 로스쿨은 졸업을 위해 반드시 공익법 활동을 펼쳐야 하고, 24개 로스쿨에서는 학생들 스스로 조직한 공익법 기관을 갖고 있다.

외형적으로 보자면 한국도 그리 낙후된 국가는 아니다. 1987년 법률구조공단이 만들어져 국가가 직접 빈곤층에 대한 법률지원 서비스를 하고 있다. 한국의 변호사들도 연간 20시간 이상을 공익법 활동에 할애해야 한다. 그러나 ‘공감’의 황필규 변호사는 그 실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공익 법무관과 상근 변호사 등 200여 명이 일하는 법률구조공단의 현재 규모로는 서민층에게 충분한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승소 가능성이 낮은 사건은 회피하거나 국가·지자체 등을 상대로 하는 소송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한다.

대한변호사협회 차원의 공익법 활동은 아예 베일에 가려져 있다. 개별 변호사들이 어떤 공익 법률활동을 펼치는지 파악할 길이 없고, 관련 기금이 변협 차원에서 얼마나 조성돼 어떻게 쓰이는지 역시 불투명하다는 것이다. 황 변호사는 “최근 변협 선거 때, 변호사들의 공익활동 강화를 공약으로 내세운 후보는 하나도 없었다”며 “공익 법률지원 사업에 대한 한국 법조계의 인식을 잘 드러내는 사례”라고 말했다. 공익 법률활동에 모든 것을 바치는 더 많은 ‘공감’ 변호사들이 필요한 이유다.

글 안수찬 기자 ahn@hani.co.kr·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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