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왜 백설공주는 자꾸 문을 열어줄까?

등록 2009-04-28 11:24 수정 2020-05-03 04:25

왜 백설공주는 실수를 통해서 배우지 못할까? 그는 심술궂은 왕비가 변장한 방물장수 할머니를 집 안으로 끌어들여 빨간색 허리띠를 구경하다가 허리띠에 숨통이 조여 기절하는 변고를 당한 지 며칠 되지 않아 또 다른 장사꾼을 집 안으로 끌어들인다. 이번에는 보석이 박힌 예쁜 빗이다. 결국 빗으로 머리를 빗겨준다는 변장한 왕비의 잔꾀에 넘어가 다시 죽을 뻔한다. 두 번이나 그의 목숨을 구한 난쟁이들이 “절대로, 절대로” 아무도 집 안에 들이지 말라는 충고를 하지만, 결국 또 한 번 낯선 방문자를 집으로 들여놓는다. 결과는? 누구나 안다. 백설공주는 독이 든 사과를 먹고 죽을 고비를 맞는다.

친구와 교류없이 지내는 외로움

왜 백설공주는 자꾸 문을 열어줄까? /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왜 백설공주는 자꾸 문을 열어줄까? /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위기가 백설공주를 왕자에게로 인도하기에 실수투성이 공주의 어리석음은 독자들의 기억에서 묻혀버리지만, 나는 궁금했다. 왜 백설공주는 그토록 당하고도 다시 낯선 이를 집으로 끌어들이는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것일까?

훨씬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야 나는 백설공주의 어리석음을 조금은 이해하기 시작했다. 난쟁이들과 함께 살게 된 백설공주의 하루는 어땠을까? 그는 난쟁이들이 일터로 나간 사이에 집안일을 한다, 혼자서. 저녁에 돌아온 난쟁이들은 하루의 힘든 육체 노동을 마치고 일찍 잠자리에 들 것이고…. 그리고 백설공주는 또다시 혼자서 밤 시간을 보냈겠지. 난쟁이들이 백설공주에게 얼마나 잘해주었나와 관계없이 백설공주는 외로웠을 것이다. 친구 없이, 친밀한 경험을 공유한, 비슷한 코드를 지닌 사람과의 교류 없이 지내는 백설공주의 일상을 생각해보라. 그러니 아무리 위험이 입을 벌리고 있다 해도 백설공주는 열 번, 스무 번 문을 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관계가 결핍된 자리는 소비로 채워진다. 어느 시인의 표현에 따르자면 우리가 하는 소비의 8할은 외로움이다. 쇼핑중독자들은 대개 사들인 물건보다는 물건을 구매하는 순간에 왕처럼 대접받는 느낌에 중독된다고 한다.

육아를 전담하며 가정을 지키는 많은 여성들이 엄청난 가격의 어린이 교재를 세트로 구입한다. 판매사원들은 댁의 아이가 앞서가려면 이 정도는 장만해주어야 한다고 유혹한다. 거기에 쉽게 넘어가는 것은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가장 약한 고리(‘내가 아이를 잘 키우고 있는 것일까?’ ‘나는 좋은 엄마일까?’)를 효과적으로 공략하는 판매사원의 상술(“당신의 무관심이나 무지 때문에 아이에게서 성장의 기회를 박탈할 것인가?”) 덕분일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엄마들이 외롭기 때문이다. 백설공주가 죽음의 위험 앞에서도 문을 열어주듯, 아이와 함께 집 안에 유폐된 엄마들은 관계의 결핍을, 정신적 허기를 어떻게든 채우기 위해 지갑을 연다.

부모에 의해 시간을 관리당하며 자라난 아이들은 친구를 사귀는 데 서툴다. 초등학생들은 모여서 각자의 게임기로 논다. 제대로 된 놀이를 하기에는 시간도 없고, 관계를 맺는 능력도 부족하다. 고등학생들에게 경제 수행평가로 ‘돈 없이 살아보기’ 체험을 해보게 했더니 가장 큰 어려움이 돈을 쓸 수 없어 친구를 만날 수 없었던 것이라고 털어놓는다. 돈이 없으면 친구도 못 만나는 게 어른들의 얘기만은 아닌 것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삶을 복제하며 자라난다.

관계의 결핍 채우려 지갑 열어

예전에는 관계가 해결해주었던 많은 일들을 돈으로 해결한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축구를 가르쳐주던 시절은 끝났다. 아이들은 돈을 내고 축구교실에 등록한다. 아버지는 바쁘고, 아이들은 더 ‘전문적인’ 교육을 받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 이면에는 아이를 축구교실에 보낼 돈을 벌려면 부모가 더 바빠져야 하고, 바쁘다 보니 관계는 더 많이 결핍되는 악순환이 도사리고 있다.

얼마 전 주말 오후 안양천변을 산책하다 족구를 하는 한 무리의 아줌마들을 보았다. 예사롭지 않은 족구 실력도 부러웠지만 족구팀을 결성할 수 있는 그들의 관계 능력은 더 부러웠다. 그 봄날 아름다운 것이 어디 벗꽃뿐이었으랴. 지갑보다는 마음을 연, 백설공주보다도 아름다운 족구 아줌마들, 홧팅!

박현희 서울 구일고 사회교사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