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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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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교 두 교복’ 국제중의 담장

영훈중 기존 학생들 신입생용 신관 건물 접근 차단…
국제중 전형 땐 수업 대신 자습 ‘찬밥’ 신세
등록 2009-02-05 06:00 수정 2020-05-02 19:25

1월29일 아침 8시 서울 강북구 미아5동 영훈중학교 앞. 개학까지는 나흘 남았는데 아이들이 하나둘 가방을 메고 교문으로 들어갔다. 6개의 농구 골대가 있는 학교 정문 초입에는 수십 대의 외제차와 대형 승용차가 들고 났다. 학부모가 아이들을 데려다주기 위해 타고 온 차들이다. 이날은 영훈중학교 국제특성화과정에 입학한 100여 명의 아이들이 ‘윈터캠프’를 시작하는 날이다. 윈터캠프에서는 영어 토론 등 영어·수학·과학 과목의 심화 수업이 이뤄진다. 1월29일부터 2월25일까지 주말과 졸업식이 있는 날을 빼고 17일 동안 아침 8시30분부터 오후 4시10분까지 수업이 진행된다. 17일 동안의 ‘특별 수업’을 위해 아이들이 내는 돈은 80만원이다. 여느 학원보다 훨씬 비싸다. 여기엔 급식비, 교재비 등이 제외돼 있어 실제로 들어가는 돈은 100만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훈중학교 국제특성화과정에 입학한 아이들이 1월29일 아침 일찍 ‘윈터캠프’에 참여하기 위해 학교로 들어가고 있다. 17일 동안의 캠프 비용은 80만원. 국제특성화과정 아이들은 일반과정 아이들은 들어가지 못하는 신관 건물에서 따로 수업을 들을 예정이다.

영훈중학교 국제특성화과정에 입학한 아이들이 1월29일 아침 일찍 ‘윈터캠프’에 참여하기 위해 학교로 들어가고 있다. 17일 동안의 캠프 비용은 80만원. 국제특성화과정 아이들은 일반과정 아이들은 들어가지 못하는 신관 건물에서 따로 수업을 들을 예정이다.

수업이 이뤄지는 건물 앞에는 A·B·C·D로 나눠진 반 배치표가 붙어 있었다. 아이들의 반을 확인해 교실로 들여보낸 엄마들이 반배치표 앞에서 술렁였다. “이게 성적순으로 배치된 건가? 지난번에 본 시험 성적표에 아이가 몇 명 중 몇 등이라고 나왔잖아.” “우리 애는 D반인데 여기가 제일 못하는 반인 건가….” 엄마들은 ‘우리 아이가 국제중 학생’이라는 자부심이 묻어나는 표정에 더해 ‘상위권 아이들만 모인 곳에서 우리 아이가 예전처럼 잘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을 안은 표정으로 한동안 서 있었다.

초등학교 건물 출입금지 이어 2번 상처

지난해 10월31일 서울시교육위원회에서 ‘특성화중학교 지정 동의안’이 통과됐다. 이에 따라 서울시에서 영훈중학교와 대원중학교 두 곳이 2009년부터 ‘국제중’으로 바뀌게 됐다. 기존에 영훈중·대원중에 다니던 1·2학년 학생들은 졸지에 영훈중·대원중 ‘일반과정’ 학생이 됐고, 2009년 국제중 선발 절차에 따라 선발된 아이들은 ‘국제특성화과정’ 아이들이 됐다. 영훈중 학생이 아니라 영훈중 일반과정 학생이 된 아이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학교를 다니고 있을까.

올해 영훈중 3학년이 되는 이지영(15·가명)양은 지난해 12월 어느 날 국제특성화과정 아이들을 위해 마련된 건물에 들어갔다가 선생님께 꾸지람을 들었다. “네가 여기 왜 들어오니? 다음부턴 절대 들어오지 마라.” 매점에 갔다가 쉬는 시간에 잠깐 들어가본 터였다. 이양은 “어차피 같은 학교 건물인데 들어오지 말라고 하니 황당하고 기분 나빴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미 영훈중 아이들에게 ‘출입금지’는 낯선 일이 아니다. 영훈중은 같은 재단이 설립한 영훈초등·영훈고등학교와 한 담장 안에 있다. 이 중에서 영훈초등학교는 한 학기 수업료만 340만원에 이르는 비싼 사립 초등학교다. 정문을 들어서면 중학교 건물과 고등학교 건물, 강당 역할을 하는 백운관이 ㄷ자 형태로 서 있다. 벽돌로 지어진 중학교와 고등학교 건물은 한눈에 보기에도 오래된 듯한 느낌이다. 여느 중·고등학교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운동장 옆으로 난 길을 따라 50여m만 올라가면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고등학교 뒤편에 있는 초등학교 건물은 화려하다. 흠집 하나 없는 은빛 엘리베이터가 외부에서도 보이는 짙은 통유리 창문의 이 건물은 학교라기보다 도심 한가운데 있는 오피스텔 빌딩 같다.

그동안 영훈중 아이들은 이 초등학교 쪽으로는 발도 들여놓지 못했다. 초등학교 건물에는 곳곳에 “이곳으로는 출입을 금합니다”라는 문구가 쓰인 A4용지가 붙어 있었다. 올해 2학년이 되는 강효진(14·가명)양은 초등학교 뒷문 쪽 아파트에 산다. 이 뒷문을 이용하면 빨리 집에 갈 수 있지만, 초등학교를 지나쳐 가는 것은 ‘허락받지 못한 일’이다. 강양은 “초등학교 쪽으로 가면 선생님들이 혼낸다”며 “우리가 초등학생들 ‘삥’이라도 뜯고 괴롭힐까봐 그런다나 봐요”라고 내뱉듯 말했다. 강양은 영훈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영훈중학교에 다니는 친구를 따라 지난해 가을에 처음으로 영훈초등학교 건물 안에 ‘몰래’ 들어가봤다. 강양은 당시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똑같이 영훈중 학생인데 영훈초 졸업한 애들은 들어갈 수 있고 우리는 안 되는 게 말이 돼요? 암튼 들어갔더니 교실이 막 빛나요. 책상도 되게 좋고, 부러웠어요. 돈 많이 내면 이런 학교 다니나 보다 싶더라고요. ”

“전학시켜야 하나” 학부모도 자괴감

국제특성화과정 아이들이 수업을 듣는 곳은 일반과정 아이들이 쉽게 발걸음할 수 없는 영훈초등학교 건물 바로 옆에 새로 마련된 영훈중학교 신관 건물이다. 영훈중 아이들이 이용은커녕 들여다보기도 쉽지 않았던 인조잔디 운동장이 바로 바라다보인다. 강효진양은 “초등학생이랑은 또 다르죠. 이제는 같은 중학생인데 걔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생기니까 왠지 차별받는 기분이 들어요”라고 말했다. 강양은 “걔네도 우리 건물 들어오면 가만 안 둘 것”이라고 덧붙였다. 강양과 함께 만난 영훈중 정경호(15·가명)군도 “‘국제중 오는 애들을 괴롭히겠다’고 말하는 애들도 더러 있다”고 거들었다. ‘갈 수 없는 곳’을 자꾸 만드는 학교에 대한 적개심을 거꾸로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영훈학원이 설립한 영훈초등학교, 영훈중학교, 영훈고등학교는 모두 한 담장 안에 있다. 사립 초등학교인 영훈초등학교 건물은 영훈중 아이들에게는 ‘출입금지’ 구역이다. 올해부터 새로 입학하는 영훈중 국제특성화과정 아이들은 기존의 영훈중 아이들은 갈 수 없는 새 건물에서 수업을 듣는다.

영훈학원이 설립한 영훈초등학교, 영훈중학교, 영훈고등학교는 모두 한 담장 안에 있다. 사립 초등학교인 영훈초등학교 건물은 영훈중 아이들에게는 ‘출입금지’ 구역이다. 올해부터 새로 입학하는 영훈중 국제특성화과정 아이들은 기존의 영훈중 아이들은 갈 수 없는 새 건물에서 수업을 듣는다.

아이들이 이렇게 생각하게 된 데는 지난해 말 국제중 입학 전형 과정에서 학교가 아이들에게 준 상처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지난해 말 국제중 동의안이 통과되자 입시 일정이 촉박했고 영훈중 교사들도 졸지에 바빠지기 시작했다. 실제로 국제중 입시는 12월2~12일 원서 접수, 13~19일 1단계 서류 심사, 20일 1단계 합격자 발표, 22일 2단계 개별 면접, 24일 2단계 합격자 발표, 26일 3단계 공개 추첨, 27일 최종 합격자 발표, 30일 최종 합격자 소집까지 숨가쁘게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전형안을 마련하고 원서를 접수하고 합격자를 발표하고 문의를 받는 등 대부분의 일은 교사들 몫으로 돌아왔다. 영훈중의 한 교사는 “국제중 설립 동의안이 통과된 뒤 입학 전형 절차는 외부 용역을 줄 줄 알았는데 교사들을 ‘입시지원팀’ ‘교육과정 구성팀’ ‘홈페이지·시설관리팀’ 등에 나눠 배치했다”며 “입학 전형 준비를 수업과 병행하느라 교사들이 힘들었다”고 말했다.

이 중 입시지원팀에 속한 교사들은 새벽까지 근무하는 일이 반복됐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불만이 가중됐다. 국제중 입시 때문에 선생님들의 수업 불성실이 심했다는 것이다. 정경호군은 “기말고사 직전인데도 선생님이 수업에 안 들어오는 거예요. 들어와서는 ‘자습’이라고 말하고 나가기를 몇 번이에요. ‘잠깐만 갔다가 올게’ 하고는 종 치고 나서 책만 가져가거나 종 치기 직전에 와서 책을 가져간 적도 몇 번 있었어요”라고 말했다. 정군과 같은 반인 김지연(15·가명)양도 “기말고사 때면 늘 짚어주던 요점정리 같은 것도 전혀 없었고 급하게 진도 빼느라 정신없는 과목들이 두세 개 있었다”며 “우리 시간을 빼서 국제중 애들 챙긴 것 아니냐”고 말했다.

교복까지 달라 학생들 간 반목 자극

김양의 옆반인 최지은(15·가명)양은 “평소 수업시간에 ‘집중해라’ ‘자지 마라’ ‘자세 바로 하라’고 얘기하던 선생님들이 다른 이유도 아니고 국제중 입학 전형 준비한다고 수업에 빠지니까 ‘찬밥’ 신세가 된 것 같았다”고 말했다. 정경호군은 “선생님이 한두 번 안 들어오면 애들도 좋아하죠. 그런데 반복되니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라고 말했다. 정군은 “선생님이 종례도 까먹고 회의하느라 1시간씩 기다리게 한 적도 있다”고 덧붙였다. 아이들은 그렇게 선생님이 최소한의 생활지도와 가장 중요한 수업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에 화를 냈다. 이에 대한 학교 쪽 견해를 듣기 위해 계속 접촉을 시도했지만 영훈중 교감·교장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를 전해들은 김지연양의 아버지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속이 끓어서 아이를 전학시킬지 진지하게 고민했다”며 “아이에게 남은 1년은 중학교에서 보내는 마지막 1년인데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을지, 기분 나빠 공부는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괜히 마음에 상처가 생기지는 않을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정경호군은 국제중 입시설명회 날 농구 코트를 가득 메운 외제차에 떠밀려 농구는 고사하고 체육 수업도 운동장 구석에서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이런 기억들, 학교 안의 보이지 않는 출입금지 구역, 선생님들의 소홀한 대우 등을 두루 겪어온 아이들이 예감하는 2009년 봄학기는 우울하기만 하다. “국제중은 교복도 별나대요. 트렌치코트 같은 것도 있고, 교복 코트도 따로 있고요. 우리는 그런 것 없는데…. 걔들은 또 ‘귀족’이라 불리겠죠. 그럼 우린 뭐예요? 정말이지 전학 가고 싶어요.” 같은 학교 학생들이 다른 교복을 입고 같은 시간에 등교해 다른 건물로 들어가게 될 3월을 떠올리며 최지은양이 말했다. 국제특성화과정으로 전환되는 첫해를 맞은 영훈중학교는 과도기에 있다. 2년 뒤면 영훈중 일반과정 아이들은 모두 졸업하고 국제중만 남게 된다. 그때까지 ‘찬밥’ 신세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아이들을 보듬기 위해 학교와 교사의 세심한 배려가 필요한 시기다.

국제중 설립을 지속적으로 반대하면서 서울 강북구에서 교육운동을 해온 김옥성 목사는 “영훈중학교가 드러내는 문제는 졸속으로 급하게 추진된 국제중학교가 아이들에게 어떤 상처를 주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며 “앞으로 계속해서 이런 방식으로 국제중이 생기고 기존 고등학교가 자율형 사립고로 바뀐다면 상처받을 아이들, 비교당하면서 박탈감을 느낄 아이들이 늘 것”이라고 말했다. 영훈중이 있는 미아5동 아이들의 현실이 일반 고등학교보다 3배 이상 학비가 들어가는 자율형 사립고 100개가 들어설 한국 교육의 미래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과언일까.

글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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