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김석진] “대법원이 나의 복직을 막는다”

등록 2004-11-11 15:00 수정 2020-05-02 19:23

복직판결 받은 1·2심 뒤 2년9개월째 대법원 선고 기다리는 현대미포조선 해고 노동자 김석진씨

▣ 울산=글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1심과 2심 재판에서 잇따라 복직 판결을 받은 해고 노동자가 대법원의 선고 지연으로 2년9개월째 생업 현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현대미포조선(울산광역시 동구 방어동) 전 노동조합 대의원 김석진(43)씨는 지난 1997년 4월 해고를 당했다. 해고 사유는 상사 명령 불복종과 회사 명예훼손. 회사쪽의 일방적인 작업시간 통제에 항의하고, 성과금 지연 지급을 비난하는 유인물을 배포했다는 게 직장에서 쫓겨난 사유였다. 김씨는 해고 직후 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구제신청을 냈으나 잇달아 기각당하자 지난 2000년 울산지방법원에 해고무효소송을 내 승소 판결을 받아냈다. 김씨는 회사쪽의 항소 제기로 열린 2심에서도 승소했다. 부산고등법원 제4민사부는 지난 2002년 김씨에 대한 해고 처분이 무효임을 거듭 확인하고, 회사쪽에 해고 기간 동안의 월급인 9천여만원을 김씨에게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해고무효소송 20개월 거의 안 넘어"

그러나 회사쪽은 2심 판결에도 불복해 2002년 2월 대법원에 상고를 제기했고, 대법원은 어찌된 영문인지 2년9개월째 선고를 내리지 않고 있다. 지난 10월21일 대법원 국정감사에서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이 이 문제를 제기했으나, 대법원 관계자로부터 “개별 사건에 대해 답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담당 재판부에 질의 내용을 전달하겠다”는 애매한 답변만 들었다.

김씨는 “7년여 동안 계속된 ‘실업’ 상태로 생계에 큰 위협을 느끼고 있다”며 “대법원 선고가 빨리 내려지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하소연했다. 김씨의 변호인 최용석 변호사는 “민사소송법(199조)에 따르면 상고심은 기록을 받은 날로부터 5개월 이내에 선고하도록 돼 있다. 이것이 강제 사항이 아니더라도 그동안 해고무효소송은 20개월 이상 길어진 예가 없다”며 “김씨는 헌법에 보장된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도 침해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대법원 관계자는 “민사소송법 규정은 가급적 그렇게 하라는 것이지 강제적인 것은 아니다”라며 “올바른 결론을 내리기 위해 심리가 더 필요하다면 충분한 심리를 하는 게 맞다”고 밝혔다.

그러나 회사쪽이 제출한 상고이유서에는 1, 2심 때의 쟁점 말고는 새롭게 제기된 내용이 없어서, ‘충분한 심리’ 때문에 2년여 동안 재판이 지연되는 것으로 이해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회사쪽은 2002년 3월 제출한 상고이유서에서 “1, 2심 재판부가 사실을 오인하고 법리를 오해했다”고 주장했을 뿐 새로운 사실관계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대법원이 원심 판결이 법리를 제대로 적용했는지만 판단하면 재판이 길어질 이유가 없다는 게 김씨쪽 주장이다.

뒤늦게 참고자료 제출하는 회사

1, 2심의 쟁점은 크게 한 가지였다. 김씨는 1997년 2월 설날 연휴 때 휴일근무를 하게 됐는데, 담당 과장이 “근무시간이 편중될 우려가 있다”며 김씨의 휴일근무를 다른 직원으로 바꿨다. 김씨는 이를 항의하는 과정에서 과장 등 상사들과 마찰을 빚었다. 회사쪽은 김씨가 직장 상사의 정당한 처분에 불복하며 하극상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회사쪽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회사는 김씨의 근무시간이 편중될 우려가 있다고 했지만, 실제로 김씨가 속한 작업조의 97년 2월 근무시간표를 보면, 김씨는 363.5시간으로 소속 직원 중 가장 적다. 그뿐 아니다. 김씨는 노조 활동에 열의를 보이던 96년 11월부터 해고 전까지 한달 근무시간이 다른 직원의 60∼80%에 불과했다. 김씨는 “담당 과장은 근무시간 통제를 풀려면 조합 활동에 대한 반성문이나 각서를 쓰라고 요구하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김씨쪽은 회사가 상고심이 지연되도록 유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회사쪽이 ‘해고 이후의 사정도 해고 무효의 판단에 참작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례를 악용해 해고의 직접적 사유와 관계없는 해고 이후의 상황을 참고자료로 제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회사쪽은 상고이유서를 낸 뒤 1년5개월쯤 지난 2003년 9월에 상고이유 ‘보충서’를 내고 김씨가 해고를 당한 이후 회사 정문 앞에서 집회를 여는 등 ‘비위’를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회사 관계자는 “김씨가 해고 이후에 저지른 행위를 중심으로 대법원에 자료를 제출하고 있다”고 밝혔다. 최 변호사는 “회사쪽이 재판을 무한정 끌어놓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자료만 계속 모으고 있다”며 “재판부가 이를 계속 허용한다면 결국 그 피해는 해고 노동자에게만 돌아간다”고 지적했다.

회사쪽은 지난 8월 노조 대의원 72명 중 66명의 서명을 받은 탄원서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대의원들이 직접 작성한 것처럼 보이는 탄원서의 내용은 8년 동안 이어온 무분규가 깨질 우려가 있으니 김씨의 복직에 반대한다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 탄원서는 회사가 작성해서 대의원들의 서명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회사 관계자는 이에 대해 “(탄원서를) 누가 작성했는지는 상관없다. 서명을 누가 했는지가 중요하다”며 “민주노동당 등에서 김씨의 복직을 촉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한 것에 맞서서 낸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이 과정에서 대의원들에 대한 회사쪽의 회유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노조 집행부도 김씨의 주장을 거들고 나섰다. 길이하 위원장은 “탄원서에 서명한 몇몇 대의원들을 만나 확인해보니, 직속 상사가 탄원서를 들고 와서 ‘다른 대의원들도 다 했으니, 빨리 서명하라’고 재촉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했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회사쪽은 펄쩍 뛰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탄원서 내용에 동의한 사람만 서명을 받았다. 김씨의 복직이 무분규 전통에 나쁜 영향을 줄 것이라는 게 대의원 다수의 생각”이라고 맞섰다.

김씨의 상고심이 지연되는 것에 대해 법조계의 고질적 관행인 ‘전관예우’를 거론하는 시각도 있다. 대법관 출신의 한 변호사가 지난 8월 회사쪽 변호인으로 추가 선임됐는데, 이것이 재판 지연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노회찬 의원은 대법원 국감에서 이 문제를 지적했으나, 대법원 관계자는 “누가 변호인으로 선임됐는지가 재판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라고 반박했다.

회사측 변호인에 대한 전관예우인가

대법원 선고가 지연되는 바람에 김씨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다. 7년여 동안 복직을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녀야 했기 때문에 생계는 온전히 부인의 몫으로 남았다. 하지만 화장품 외판원으로 일하면서 받는 부인의 월급은, 뇌출혈로 쓰러진 어머니와 형까지 돌보기에는 아무래도 무리다. 그러나 김씨에게는 더욱 참기 힘든 고통이 있다. 그것은 회사와의 장기간 소송에서 ‘전리품’으로 남은 정신적 고통이다. 김씨는 “회사가 소송에서 이기기 위해 나와 관련된 모든 일을 샅샅이 파헤치고 있는데, 누구든 그들의 주장만 들으면 파렴치범으로 오해하기 쉽다”며 “회사의 주장에 일일이 대응하다 보니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