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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재에서] 지나간 시대의 범죄

등록 2021-01-09 15:30 수정 2021-01-12 03:58
1346호 표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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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소환됐습니다. 몇 차례 명예훼손죄에 휘말렸지만 검찰 조사를 받은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무게중심을 잘못 옮기면 넘어질 것만 같은 철제 의자에 앉아, 9시간 동안 기사의 진실성과 공익성을 설명해야 했습니다.

고소인은 김종훈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이었습니다. 내부고발 사이트 위키리크스에 나온 미국 비밀 외교문서를 인용해 <한겨레> 2011년 9월15일치에 ‘김종훈 쌀개방 추가협상 미국에 약속했었다’라고 보도했다는 이유입니다. 그는 허위사실적시 명예훼손죄로 저를 검찰에 형사고소하고 손해배상금 3억원을 요구하는 민사소송을 냈습니다.

다행히 2012년 5월 법원은 민사소송에서 “보도 내용이 악의적이거나 경솔한 공격으로 볼 수 없다”며 제 손을 들어줬습니다. 그러나 김 본부장이 항소했습니다. 검찰은 결론을 내리지 않고 사건을 미뤘습니다. 2012년 11월 그가 민형사 소송을 느닷없이 취하할 때까지 저는 1년 넘게 민사소송의 피고로, 형사소송의 피의자로 살아야 했습니다.

제1346호 표지이야기는 저와 같이 명예훼손죄로 수사기관에서 조사받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직장 상사나 이웃, 전남편의 잘못을 이야기했다는 이유로 일부는 피의자가 돼 벌금형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허위사실적시 명예훼손죄로 고소·고발당했지만, 정작 이들이 넘지 못한 벽은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였습니다. ‘사실을 말한 죄’ 탓에 범죄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처럼 ‘사실을 말한 죄’를 범죄화하는 나라는 선진국 가운데 일본이 유일합니다. 영국은 2010년 명예훼손죄를 폐지했고, 독일은 명예훼손적 표현이 허위사실일 때만 처벌합니다.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위스에서도 사실이라는 걸 입증하면 처벌되지 않습니다. 일본마저 ‘진실한 사실을 표현하는 자체를 공익적 목적이 있다’고 판단해 우리나라보다 표현의 자유를 넓게 보장합니다. 유엔 인권기구들이 2011년부터 한국의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폐지하라고 지속해서 권고하는 이유입니다.

2018년 성폭력 고발 운동인 ‘미투’(Me Too)를 거치면서 ‘사실을 말한 죄’의 위험성은 더 분명해졌습니다. 성폭력 피해 사실을 폭로한 피해자를 가해자가 역고소해 수사 과정에서 ‘피해자’가 ‘피의자’로 신분이 바뀌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니까요. 또한 양육비를 주지 않는 부모의 신상정보를 공개한 ‘배드파더스’ 운영진도 같은 죄로 고소당했습니다. 1심 재판부가 공익성을 인정해 무죄를 선고했지만 항소심은 진행 중입니다.

변화의 기회가 다가옵니다. 헌법재판소의 위헌 심판대에 사실적시 명예훼손죄(형법 제307조 1항)가 올라와 있습니다. 2017년 동물병원에서 치료받은 반려견이 실명 위기를 겪었다고 생각해 동물병원의 잘못을 공개하려던 시민이, 형사처벌 가능성을 알고는 헌법상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헌법소원을 냈습니다. 2020년 9월 공개변론을 마치고 이제 선고만을 남겨둔 상태입니다.

이번에 헌재가 위헌 결정을 내리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않을 겁니다. ‘사실을 말한 죄’는 “오늘날처럼 ‘표현의 자유’가 권리가 아니었던 지나간 시대의 이해할 수 없는 범죄”(2010년 영국 법무부 장관의 명예훼손죄 폐지 선언 중에서)이기에 반드시 사라질 테니까요. 간통죄나 낙태죄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정은주 편집장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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