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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재에서] 공수처의 미래

등록 2020-12-14 10:26 수정 2020-12-17 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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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는 검찰 개혁 과제로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노무현 정부는 부정부패 추방을 위한 개혁 방안으로 공수처(당시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를 설계했지만, 이를 검찰 권한의 분산·견제라는 측면으로는 보지 않았습니다. 반면 검찰은 일찌감치 공수처가 자신의 힘을 제한할 것을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의 인수위원회 시절부터 일관되게 공수처 설치에 반대했습니다. 특히 2004년 11월 국회에 공수처 설치 법률안이 제출되자 검찰 출신 국회의원들이 총대를 메고 ‘방패막이’로 나섰습니다. 검찰의 반대가 결국 국회를 움직였고, 공수처 법안은 자동 폐기됐습니다.

공수처법이 국회 문턱을 넘은 것은 15년이 지난 2019년 12월입니다. ‘윤석열 검찰’이 역시 독소조항 운운하며 반대했지만, 검찰이 독점한 수사·기소권을 일부 나눌 공수처가 검찰 개혁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공수처법이 제정됐습니다. 수사 대상은 △대통령 △국회의원 △판검사 등 고위 공직자가 저지른 범죄입니다. 무엇보다 검찰의 칼날이 무뎌졌던 ‘검찰 식구’가 공수처 수사 대상 1호가 되리라는 예측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공수처는 법률이 규정한 시한(2020년 7월15일)을 다섯 달 가까이 넘기고도 출범하지 못했습니다. ‘공수처장 후보 추천위원회’의 의결정족수를 ‘7명 가운데 6명’으로 규정했더니 국민의힘 추천위원(2명)이 끝없이 반대해 후보 추천에 거듭 실패한 탓입니다. 공수처장 후보에 여야가 타협하지 못해 결국 시행한 지 1년도 안 된 법이 다시 바뀌고 말았습니다. 비토권(거부권)을 없앤 공수처법 개정안이 12월10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것입니다. 여당은 의결정족수를 ‘3분의 2 이상’으로 완화해 공수처장 추천이 한결 수월하도록 했습니다.

공수처 출범이 눈앞으로 다가온 것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검찰의 부실·늦장 수사로 공소시효가 지나 성접대 혐의에 대해 면소 판결을 받은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같은 사례가 더는 생기지 않을 길이 열리니까요. 최근 김봉현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에게 술접대를 받은 현직 검사 3명 중 2명을 술값이 100만원이 넘지 않았다고 검찰이 기소하지 않았는데 공수처가 있었다면 수사에 나섰을 것입니다.

공수처 구성에 정부·여당의 영향력이 막강해진 것은 걱정스러운 일입니다. 애초에 비토권을 넣었던 이유는 공수처의 중립성과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야가 합의할 수 있을 만큼 균형감을 갖춘 인사를 공수처장에 임명해 과거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대검 중수부)처럼 공수처가 정치권의 요구를 수용하는 창구로 활용되지 않도록 말이지요.

공수처가 첫발을 내딛게 하기 위해 이 안전장치를 없애버렸으니 이제는 정부·여당의 선의에만 기대야 합니다. 문재인 정부가 편향성 시비 없는 인사를 공수처장에 앉히더라도 정권이 바뀌면 그 미래를 보장할 수 없습니다. 공수처가 제2의 대검 중수부가 되지 않도록 대책 마련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정은주 편집장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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