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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재에서] 균열의 출발점

등록 2020-09-26 02:55 수정 2020-09-30 09:13
1332호 표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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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이름 없어요?”

국외에 처음 나가 아르바이트 일자리를 구할 때 내 이름을 말하자 매니저가 대뜸 물었습니다. 영어 이름은 없다고 답하며 내 이름을 또박또박 다시 발음하자 그가 짜증 난다는 듯 내뱉었습니다.

“줄리라고 부를게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를 만큼 모멸스러운데도 서툰 영어 탓에 제대로 항의도 못했습니다. 몇 년간의 국외 생활에서 비슷한 경험이 되풀이됐습니다. 시내버스에서 한국 친구와 이야기를 나눴더니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아이들이 한국어를 흉내 내는 듯 괴상한 소리를 내며 웃어댔습니다. 어떤 할머니는 다가와 이 나라에선 영어만 써야 한다고 ‘충고’하기도 했습니다.

20년 전 사회적 약자, 소수자의 경험은 인권과 평등에 대한 나의 생각을 넓히는 계기가 됐습니다. “차별로 인한 피해를 몸으로 직접 경험한 뒤에야 무엇이 차별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고, “나 또한 차별하며 살고 있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류승연 작가) 차별을 인지하면서 차별에 맞서고 차별을 멈추는 힘이 생겼습니다. 차별을 겪지 않았다면, 차별을 깨닫지 않았다면 오지 않았을 변화입니다.

우리 사회가 차별에 눈뜰 기회가 다시 왔습니다. 2020년 6월29일 21대 국회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안이 재발의돼, 9월21일 법제사법위원회에 상정됐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6월30일 14년 만에 ‘평등 및 차별금지에 관한 법률 시안’을 발표하고 조속한 입법을 권고했습니다. 앞서 2006년 국가인권위의 권고로 첫 차별금지법안(2007년)이 국회에 제출됐지만 그 문턱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 뒤 여섯 차례 더 입법이 제안됐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대형 교회의 빗발치는 항의에 발의된 지 두 달 만에 법안을 철회하는 일도 일어났습니다.

한가위 특대호(제1332호)는 ‘법으로 향한 여정’을 시작한 여덟 번째 차별금지법을 다각도로 다뤘습니다. 차별금지법안을 발의하고 항의 전화에 시달리며 뜨거운 여름을 보낸 정의당 장혜영 의원실에서 일기를 받았습니다. “전화를 끊기 무섭게 다시 벨이 울리는 수백 통의 전화를 받으면서 이제 수화기를 들기만 해도 어떤 말이 나올지 머릿속으로 자동 재생되는 수준”이 됐지만 이들은 멈추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수화기 너머 사람들의 세상에 작은 균열이라도 내고 싶었다. 세상의 변화는 이런 작은 균열에서 시작한다고 믿기 때문이다.”(장태린 비서)

차별금지법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만났습니다. 성소수자의 엄마, 농인(청각장애인)의 딸, 암 경험자, 난민의 친구, 발달장애인의 엄마, 트랜스젠더가 차별금지법과 함께 올 미래를 조심스레 그려봅니다. “죽을 뻔한 누구를 살리기도 해요.” “차별에 ‘그러지 마세요’ 말할 수 있어요.” “병력으로 인한 해고, 동료도 함께 싸워요.” “서로 궁금해하면 더 친해질 것 같아요.”

우리가 차별금지법을 잊은 그 14년 동안, 성큼성큼 앞서나간 인권 선진국들의 모습도 엿봤습니다. 34살 핀란드의 여성 총리 산나 마린은 엄마와 엄마의 동성 배우자로 구성된 ‘무지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정치인이 돼 평등과 차별 금지를 지원하는 법과 제도를 넓혔고, 핀란드 수도 헬싱키에서 성소수자 축제가 열릴 때면 총리 공관에 무지개 깃발을 내겁니다.

차별금지법이 생긴다고 우리가 하루아침에 핀란드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변화의, 균열의 출발점이 차별금지법 제정인 것은 분명합니다.

정은주 편집장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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