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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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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재에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등록 2020-07-11 05:02 수정 2020-07-11 05:30
1321호 표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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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뉴스룸에서 기자들이 다 같이 방송사 뉴스를 집중해서 봤습니다. 소리를 크게 키우고 채널을 돌려가며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숨죽이며 들었습니다.

7월9일 목요일 오후 5시30분께 박원순 서울시장이 ‘유언 같은 말’을 하고 외출한 뒤 연락이 끊겼다는 신고가 경찰에 접수됐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 뉴스룸은 분주해졌습니다. 마감날이라 기사 작성과 편집을 위해 뉴스룸에 모여 있던 기자 10여 명은 일제히 박 시장의 근황을 알 만한 취재원들에게 연락했습니다. 대부분 급히 전화를 끊거나 통화 중이었습니다. 어렵게 연락이 닿은 이들의 말을 퍼즐 맞추듯 종합해보니 상황이 정리됐습니다.

“오늘(7월9일) 오후 5시17분께 박원순 서울시장의 딸이 112신고센터로 ‘아버지가 이상한 말을 하고 나갔는데 전화기가 꺼져 있다’고 신고했다. 딸은 ‘마지막으로 대화할 때 아버지가 유언 같은 말씀을 하셨다. 이후 연락이 안 된다’고 했다.”

“박 시장은 출근하지 않았다. 오전 10시40분께 부득이한 사정이 있다며 공식 일정을 취소했다고 기자들에게 알렸다. 오후 4시40분 예정된 김사열 대통령 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장과의 면담도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취소했다.”

“박 시장은 오전 10시44분께 종로구 가회동 시장 공관을 나섰다. 외출 당시 검은 모자를 쓰고 어두운색 점퍼와 검은색 바지, 회색 신발을 신고 검은 배낭을 메고 있었다. 와룡공원에 오전 10시53분께 도착했다. 그것이 폐회로텔레비전(CCTV)에 찍힌 모습이다.”

“박 시장의 휴대전화 전원이 꺼진 곳은 서울 성북동 주한 핀란드대사관 주변이다. 서울과학고 인근부터 와룡공원 일대까지 1㎞ 구간을 경찰이 수색 중이다.”

그리고 박 시장과 관련한 성추행 의혹이 경찰에 접수됐고, 일부 방송사가 보도를 준비한다는 이야기가 들렸습니다. 박 시장의 갑작스러운 실종만큼이나 놀랍고 당혹스러웠습니다. 저녁 8시 SBS, MBC 뉴스가 쏟아졌습니다. “2017년부터 박 시장 비서로 일하던 A씨가 (7월8일) 서울지방경찰청을 찾아 지속적인 성추행을 당했다고 고소장을 냈다. 박 시장이 신체 접촉 외에 여러 차례 메신저를 통해 개인적인 사진 등을 보냈다. A씨는 본인 외에 더 많은 피해자가 있다고 했다.”

깊은 한숨이 뉴스룸을 가득 채웁니다. 박 시장은 2011년 보궐선거로 당선돼 3180일간 서울시를 이끌며 대선 주자급 정치인이 되기 전 인권변호사, 시민활동가였습니다.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에 깊은 발자국을 남긴 그가 ‘성추행 가해자’로 지목되다니 낯설고 또 섬뜩합니다. A씨와 박 시장의 이야기를 들어봐야겠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한겨레21> 제1321호를 마감하는 날,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수색 소식에 귀 기울이는데 밤 12시37분께 YTN 속보가 나왔습니다. ‘박원순 시장, 숨진 채 발견’. “박 시장의 마지막 모습이 포착된 북악산 일대를 수색하던 소방 구조견이 자정께 숙정문 인근에서 시신을 발견했다.” 실종 신고된 지 7시간 만입니다.

최익수 서울지방경찰청 형사과장이 7월10일 새벽 2시께 와룡공원에서 브리핑을 했습니다. “북악산 성곽길 인근 산속에서 박 시장의 주검을 발견해 현장에서 감식 중이다. 가방, 휴대전화, 명함 등 소지품이 발견됐다. 현재로서는 타살 흔적이 없고 경찰이 유서 존재를 확인한 바 없다.”

속절없는 밤, 주간지라 깊은 뉴스를 전할 수 있으나, 주간지라 빠른 뉴스를 전할 수 없어 안타깝습니다. 제1321호는 한발 늦었지만, 제1322호는 한발 깊어지겠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정은주 편집장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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