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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재에서] 꽁꽁 숨긴 재판

등록 2020-07-04 04:51 수정 2020-07-05 01:21
1320호 표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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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과 국경을 맞댄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유럽의 정치적 수도인 이곳에는 유럽연합(EU) 입법기관인 유럽의회와 더불어 사법기관인 유럽인권재판소가 있습니다. 인권재판소는 세계인권선언의 영향을 받아 유럽회의가 체결한 유럽인권조약을 구현하기 위해 1959년 설립됐습니다. 매년 3만 건의 소송이 쏟아지는데, 판결문은 선고와 동시에 공개됩니다. 판결문이 작성되지 않으면 선고하지 않는다는 내부 원칙이 있답니다. 또한 인권재판소를 찾아오면 누구라도 재판기록을 열람할 수 있습니다. 2010년 인권재판소를 취재할 때 재판기록을 보는 인권법 연구자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미국 연방법원은 누리집에 소송기록을 올려놓습니다. 이용자가 법원 시스템에 접속해 신용카드번호를 입력한 뒤 장당 몇 센트씩 비용을 내면 소송기록을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 사건명도 당사자 이름이라 찾기 어렵지 않습니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이명박 당시 대통령 후보가 실소유주로 알려져 주목받았던 BBK 주가조작 사건을 취재할 때 활용했습니다. 이 사건의 핵심 인물인 김경준씨가 미국에서 여러 소송에 얽혀 있었는데, 미국 연방법원 누리집에서 재판기록을 훑으며 사실관계를 추적했습니다. 영화 <스포트라이트>(2016)에서도 미국 일간지 <보스턴 글로브> 기자들이 가톨릭 보스턴 교구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 사건을 추적하는데, 핵심 자료가 재판기록입니다. 성추행으로 재판에 넘겨졌던 것으로 추정되는 신부들이 있었고, 그 신부들과 관련한 재판기록을 기자가 뒤늦게 법원에서 찾아냅니다.

2000년 캐나다 지방법원에 처음 취재 갔던 날, 익숙지 않은 법정만큼이나 낯선 용어에 당황했습니다. 저널리즘 수업 과제였는데 영어가 서툰 외국인이 법정 공방을 한 번 보고는 기사를 쓴다는 게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난감해 우왕좌왕하는데 법원 직원이 사무실로 안내합니다. 재판 내용을 녹음한 음성파일을 파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신청하면 음성 재판기록을 며칠 내에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공개 재판 원칙은 법정 공방이 오가는 그 순간만이 아니라 사후 기록에도 적용되는구나 싶었습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수사, 채널A 기자와 검사장의 검·언 유착 의혹을 거치면서 검찰에 의존하는 한국 언론의 취재 관행이 비판받고 있습니다. 법원 공판 중심으로 취재와 기사 작성 방향이 바뀌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반가운 일입니다. 2003년부터 몇 년간 법원과 검찰을 취재하는 법조기자로 일하며, 검사의 입에 매달려 ‘유죄 추정’을 일삼는 사건 기사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검찰과 피고인이 맞서는 공판에서 다양한 쟁점을 기록하며 실체적 진실에 다가가길 원했습니다. 하지만 한국 법원은 캐나다, 미국, 유럽 법원과는 달리 닫혀 있었습니다. 공판은 공개지만 녹음은 불가능합니다. 재판기록 열람과 복사는 피고인만 가능합니다. 최근에야 재판부 허락을 받으면 피해자가 일부 볼 수 있게 됐습니다. 전국 법원의 판결문은 대법원에 있는 ‘법원도서관 판결정보 특별열람실’에서만 검색·열람할 수 있습니다. 이용일 기준 2주 전에 1시간30분 열람을 예약해야 하는데, 컴퓨터가 4대뿐이라 늘 붐빕니다.

취재 환경이 열악하다고 변화를 멈추진 않겠습니다. 법원에서 공식적으로 건네받지 못했지만 <한겨레21> 제1320호는 삼성 노조 와해 재판기록을 입수해 삼성 미래전략실이 백혈병 피해자와 노조원을 밀착 감시하고 경찰과 노동청을 로비 창구로 활용한 실태를 보도합니다. 법 위의 삼성 미전실 두 번째 이야기, ‘감시와 이간질’입니다. 더디더라도 나아가고 있습니다.

정은주 편집장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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