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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재에서] 끝장 프로젝트 ‘너머n’

등록 2020-06-13 06:39 수정 2020-06-17 00:55

“저, 전학 가면 안 돼요?”

아침 8시쯤 식사하다가 던진 질문에 아빠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습니다. “미쳤구나.” 수습하려는 듯 엄마가 “무슨 일 있니?”라고 뒤늦게 물었지만 제 마음은 이미 닫혔습니다. “아니요, 그냥.” 불안하게 흔들리던 부모의 눈동자가 평안을 되찾았습니다. “전학이 장난이냐? 친구랑 싸웠으면 화해해야지, 도망가려면 돼?”

초등학교 6학년, 11살 때 일입니다. 가족 누구도 기억 못하는 평범한 날을, 30년이 지난 지금도 떠올리는 이유는 당시 ‘고통의 시간’을 견뎌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당황케 한 ‘전학 요구’는 몇 달에 걸친 왕따 피해의 산물이었습니다.

학기 초, 친한 친구와 티격태격 말다툼한 게 발단이었습니다. 친구가 절교를 선언하더니, 한 무리가 저를 따돌려 순식간에 외톨박이가 됐습니다. 비웃음과 수군거림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웠습니다. 화장실에서 봉변당할까 물 한 컵도 맘껏 마시지 못할 정도로 겁에 질려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런데도 어른에게 도움을 청하지 못한 건 법보다 주먹이 가깝듯, 그때는 어른보다 친구가 더 중요했습니다. 어떻게든 헝클어진 관계를 풀어 친구를 되찾고 싶었습니다. 사과도 하고 알랑대기도 했지만 우쭐해진 친구는 더 싸늘해졌습니다.

참다못해 그날, 어른에게 처음 손을 내밀었지만 용기 낸 마음은 단칼에 베였습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가면을 쓰고 홀로 살았던 그 몇 달은 ‘블랙아웃’이 된 듯 가물가물합니다. 중학교에 입학해 새 친구를 사귀며 지독한 외로움에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11살 때 처음 디지털성착취 피해를 겪은 강지오(16·가명). 그는 낯선 남자에게 협박과 폭행, 신상털기를 당하고도 어른에게 알릴 생각을 못했습니다. 과거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할 때 내밀었던 손을 걷어차버린 어른들을 믿지 못한 탓입니다. 무조건, 혼자 해결해야 한다며 끝날 것 같지 않은 고통을 견뎌냈을 11살의 하루하루가 가슴을 후벼팝니다. 더 슬픈 건 지오의 예상이 적중했다는 사실입니다. 디지털성범죄 피해를 확인하고도 부모는, 경찰은 ‘어떤 피해를 당했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마치 없었던 일처럼 침묵하거나 ‘소년원에 보내겠다’고 어르며 사건을 덮기에 급급했습니다. 용돈벌이를 하려고 트위터 계정을 열었던 자신을 탓하며 피해자는 움츠러들었습니다. 그 결과, 가해자 가운데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아동 성착취를 엄벌하는 다른 나라 기준에선 상상할 수 없는 부조리입니다.

최근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이 연일 보도되면서 가해자의 범죄행위에 소스라치게 놀라지만 디지털성착취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불법촬영물이 넘쳐나던 소라넷이 폐쇄된 뒤 트위터·텔레그램·디스코드로 그 플랫폼만 바뀌었을 뿐, 그들은 우리 곁에 항상 맴돌고 있습니다. n번방 피해자와 똑같은 성착취를 지오가 2015년 가을부터 겪었던 게 그 증거입니다. 디지털성범죄의 출발점은 주로 ‘그루밍’입니다. 가해자는 성착취 목적으로 아동에게 접근해 신뢰를 쌓은 뒤, 피해자를 통제하며 성관계를 맺습니다. 온라인에서 시작된 그루밍은 오프라인 성폭행으로 끝납니다. 우리나라 성범죄의 기본 구성 요건인 폭행이나 협박, 속임수를 가해자가 활용할 필요가 없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디지털성범죄의 실체가 드러난 뒤 피해자에게 남은 상흔은 “삶에 장기적이고 치명적인 상처”로 아로새겨집니다.(권현정 탁틴내일 아동청소년성폭력상담소 부소장)

이런 디지털성착취의 특성을 이해한다면 ‘(성관계를 맺을 때) 네 나이가 몇 살이었니?’라는 질문 하나만으로 아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법안이 필요한 이유가 분명해집니다.(임수희 판사) 지난 4월 아동·청소년과 성관계하면 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처벌하는 연령을 13살 미만에서 16살 미만으로 높이고, 아동을 성매매 범죄의 행위자로 바라보는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의 규정을 없앤 게 그나마 다행입니다. 하지만 갈 길이 멉니다. <한겨레21>은 디지털성범죄를 추적 보도하는 ‘너머n’ 프로젝트로 그 근원과 실태를 끝까지 파헤치겠습니다.

정은주 편집장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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