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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재에서] 도전

등록 2020-05-30 05:56 수정 2020-06-05 11:20
1315호 표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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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알렉스’(Aleks)라는 인공지능(AI) 기반 학습프로그램입니다. 첫 만남에서 선생님은 간략한 사용법을 보여주더니 내 지식 수준을 파악할 ‘연습문제’를 내더군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밝히는 게 덜 고생스럽다는 걸 몇 문제를 풀어보고 알았습니다. 찍어서 맞혔는데 다음 단계에서 실력이 들통나면 앞선 문제가 변형돼 또 나옵니다. 실력을 파악한 선생님은 ‘맞춤형’으로 가르칩니다. 배워야 할 주제를 짧게, 짧게 쪼개 이론을 설명하고 관련 문제를 냅니다. 연속으로 세 문제를 맞히면 다음 주제로 넘어갑니다. 틀리면 다시 비슷한 문제를 내고 계속 틀리면 ‘이제 그만’이라며 휴식을 권합니다. 앞선 문제에 내가 어떻게 답했느냐에 따라 다음이 결정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모든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나가면 최종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AI 선생님의 장점은 첫째, 공부시간을 내 맘대로 정할 수 있습니다. 둘째, 나에게 맞춘 난이도와 속도라서 지루하지 않습니다. 셋째, 다른 학생과 비교하거나 경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선생님 칭찬을 침이 마르게 하는데, 함께 공부하는, 아프리카에서 온 친구가 갸웃합니다. “노트북이 없는 나는 도서관 컴퓨터로 문제를 풀어야 하는데 시간에 늘 쫓겨. (코로나19로) 강의도 온라인으로 해서 (컴퓨터 좌석) 빈자리가 별로 없고 여기저기서 (수업 들으며) 떠드니까 정신도 없고. 문제를 계속 틀리니까 공부량만 늘어나고.”

코로나19가 세계 곳곳을 두루 휩쓴 AC(코로나 이후) 1년, 우리는 여전히 안갯속을 헤매고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3월12일 코로나19 대유행을 선언한 뒤에도 바이러스가 각국의 강력한 봉쇄를 뚫고 번식하는 탓입니다. 감염병의 위협으로 사회적 관습과 일상이 뒤흔들립니다. 새로운 기준도 만들어집니다. 바이러스와 공존하는 ‘코로나 뉴노멀’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온라인과 AI를 활용한 교육이 현장에 파고들었고, 몇 달간 장을 가지 않아도 될 만큼 ‘홈코노미’(home+economy·집과 경제를 합친 말)가 보편화됐습니다.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일하며 출퇴근 시간이 사라지자 아빠는 딸과 놀 시간을 얻었습니다. 일상에 균열이 생기자 생각도 바뀝니다. 공장식 축산업의 문제점을 짚다가 육식을 끊게 되고, 마스크를 쓰면서 화장을 벗어던졌습니다.

국가의 위상도 달라졌습니다. 위기에 힘을 얻은 국가는 통제권을 키웠습니다. “사회 구성원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강화하고, 시민의 ‘안전’과 ‘자유’를 균형 있게 보장하는 큰정부가 돼야 한다”(신진욱 중앙대 교수)고 하지만, 구체적인 방안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큰정부의 권한 오남용을 견제하기 위해 언론과 시민사회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질 것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또 다른 과제는 사회 격차가 확대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감염병은 평등하지 않습니다. 빈곤 계층과 소수자 계층에 더 가혹합니다. 기존의 차별과 불평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데다 소득이 낮을수록 발병률이 높습니다. 소득이 낮을수록 근무환경이, 삶의 터전이 열악하기 때문입니다. “콜센터 근무자들이 소득 최상위보다는 하위에 있고, 1인실을 쓰는 양로원보다 매우 밀집한 양로원에 있는 분들이 당연히 소득 하위군에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요.(김종헌 성균관대 의과대학 교수)

코로나19 확산에 따라 1분기 저소득층 근로소득이 감소했습니다. 임시·일용직을 비롯한 취약계층이 먼저 고용시장에서 밀려난 탓입니다. 정부의 일자리사업 확대로 지난해 4분기에 8분기 만에 저소득층 근로소득이 증가로 전환됐는데, 코로나19가 찬물을 끼얹은 것입니다. 계속되는 경제 상황 악화를 고려할 때 앞으로가 더 걱정입니다.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가 고군분투하겠지만 모아놓은 저축까지 다 쓰고 나면 미래가 더욱 불투명해질 것입니다.

학교가 문을 닫으며 무상급식이 없어진 저소득층 아이들은 굶주리게 됐고, 미래의 교육 격차는 더 커지게 됐습니다. 2003년 싱가포르에서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 때문에 2주간 휴교했는데 학생들의 학력 저하가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 온라인 교육이 시행되지만 부모의 소득이나 학력이 그 교육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 계층이동 기회를 박탈하는 ‘도구’로 악용될 수 있습니다. 고성능 컴퓨터가 집에 있고 더 좋은 학습프로그램을 활용할 수 있는 학생의 학습 성과가 뛰어날 확률이 높으니까요.

코로나19는 전례 없는 시험대입니다.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의 갈림길에서 우리는 “누구도 뒤에 남겨두지 않”을 지속가능한 개발(2015년 9월 유엔총회 결정)을 위한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덧붙임. ‘코로나 뉴노멀’ 통권1호를 펴냅니다. 한 가지 주제로만 제작하는 특별한 잡지입니다. <한겨레21> 코로나19 기사를 묶은 별책부록 ‘AC 1년-2020년 코로나의 기록(한정판)’을 정기구독자에게 보냅니다. 통권호 아이디어는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을 보며 떠올렸습니다. 기존 TV 드라마는 월·화, 수·목 이런 식으로 8주간 방송하지만, <킹덤>은 6부작을 한꺼번에 풀어냅니다. 기다릴 필요가 없으니 수요자에게 편리해진 방식입니다. 그렇게 한 주제를 A부터 Z까지 다 담은 통권호를 독자가 읽으면 더 깊이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한겨레21>을 만드는 기자들은 힘들겠지만요.

첫 번째 도전이 ‘코로나 뉴노멀’ 통권1호입니다. 구둘래 기획편집팀장과 전종휘·조일준 기자가 한 달 이상 기획했습니다. 코로나 뉴노멀을 15개 열쇳말로 풀어내고 같은 재난에 다르게 맞서는 11개 나라에 사는 교민들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코로나19를 소재로 한 소설과 콩트 등도 있습니다. 특히 과학잡지 <에피>와의 협업을 시도합니다. 코로나19 방역 최전선에 있는 의료·방역 전문가들의 좌담과 마스크의 모든 것을 다룬 <에피> 글을 요약해 싣습니다. <한겨레21>은 다른 잡지와의 협업을 이어갈 것입니다. 도전은 계속됩니다.

정은주 편집장 ejung@hani.co.kr

※한겨레21 '코로나 뉴노멀' 통권1호를 e-북으로도 보실 수 있습니다.(클릭하시면 '알라딘' e-북 구매 링크로 연결됩니다)

한겨레21
1315-1316호 차례


002
004 만리재에서

1부 코로나 뉴노멀
010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표준

1장_온택트의 발견
012 코로나 이후, 삶의 자전축이 바뀌다
016 비대면 경제' 활성화… 집에서 모든 것을 해결한다
018 맞춤형 교육시대, AI "너라면 풀 수 있어, 왜 포기하니"
021 로컬가치의 재발견... 코로나 이후 도시 이동 추세 둔화
022 일과 삶의 경계 무너질 때 걱정해야 할 것들
026 노동 없는 복지국가 시대에 '일'이란 무엇인가

2장_큰 국가의 귀환
028 코로나 이후 '큰 국가'가 돌아왔다
032 국가가 이끄는 시장의 막대한 힘, 막막한 과제
036 자유 vs 안전 논쟁을 넘어 '코로놉티콘'을 막아라
040 K의료는 없다... 공공의료 복원 시작할 때
042 도시가 건강해지면 시민도 건강해진다

3장_기후위기와의 전쟁
044 기후위기와의 싸움이 전염병과의 싸움
048 코로나 이후 이산화탄소 배출도 V자 반등?
050 그린뉴딜, 사회적 면역력 키울 수 있는 변화
052 코로나, 음식의 패러다임을 바꾸다

4장_G제로 시대
054 코로나 이후 '대결별'하는 미국과 중국
058 20년 넘은 세계화 흔들...각국, 각자도생의 길로
060 중국 경제 규모가 미국 추월하는 시점 당겨진다
062 코로나 이후 EU 해체 가속화... '유럽의 시대'는 갔다

2부 세 개의 시선
064 같은 바이러스, 다른 대응

1장_11개 나라에서 온 편지
066 방글라 정부는 "돈 줬다"는데 국민은 "못봤다"
067 입시 연기에 불규칙한 수업...이란 고3도 피곤해
068 베들레햄 청년, 병문안도 가지 못한 까닭
070 이탈리아에서 우아한 드레스 입고 쓰레기를 버리다
071 스페인 봉쇄 풀려..."오, 찬란한 토요일"
072 스웨덴, 버스 기사 안전 위해 버스요금 안 받는다
073 핀란드, 학생 몰리지 않게 분산 등교·분산 휴식
074 멕시코 괴소문 "코로나19 일부러 퍼뜨린다"
076 〔칠레〕 통행증 없인 집 앞 가게도 ‘통행불가’
077 남아공 가려다 국경서 억류..."코로나" 조롱당하기도
078 나이지리아인 "바이러스로 죽으나 굶어 죽으나"

2장_외신기자가 본 K-방역
080 스페인 기자, 대구의료원에서 만난 모녀의 안부를 묻다
082 일본기자가 말하는 K방역 성공의 비밀
084 캐나다 기자, 전면 봉쇄없이 코로나 이겨내는 한국을 배우자

3장_과학자·의사 좌담
086 과학자·의사들은 코로나 어디까지 알게 되었나

3부 한눈에 보는 코로나19
092 바이러스와 인간, 그 기나긴 역사
094 〔인포그래픽〕 바이러스가 걸어온 길
098 [콩트] 나는 코로나, 우린 다시 꼭 만날 거예요
102 코로나 시대의 중요한 사물, 마스크의 모든 것
106 [감염병 역사] 인류는 '질병 공동체'
112 [코로나 소설] 얼굴 보고 말하기

포토스퀘어
120 [포토] 지구촌 이웃들이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가는 지혜

에필로그
126 재난, 그 놀라운 입구... 포스트 팬데믹 시대는 이미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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