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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재에서]설렘

등록 2020-04-05 06:56 수정 2020-05-02 19:29
만리재에서

만리재에서

1999년 10월 어느 토요일 아침 캐나다 몬트리올의 작은방. 일찍 일어나 가을 단풍에 하얀 눈이 떨어진 낯선 모습을 창가에서 지켜보다 노트북에 눈을 돌렸습니다. 전화 모뎀선으로 내려받은 PDF 파일이 열려 있습니다. 한 주 내내 영어 기사를 쓰며 씨름한 내게 주는 선물로 금요일이면 을 밤새 내려받습니다. 인터넷에 기사들이 올라 있지만 굳이 7시간이나 걸려야 손에 쥘 수 있는 PDF 파일을 고집합니다. 잡지 그대로의 모습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숨결이 조금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한장 한장 넘기며 주말 내내 즐겁게 읽었습니다. 특히 신윤동욱 기자의 ‘마이너리티’(소수자)는 손글씨로 받아쓰며 마음에 새겼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기자가 되겠다는 꿈을 품은 순간이.

2012년 4월 어느 월요일 아침 서울 마포구 공덕동 뉴스룸. 일찍 출근한 편집장이 쭈뼛쭈뼛 서 있는 내게 빈 책상을 가리키며 ‘정은주씨의 자리’라고 알려줍니다. 노트북을 꺼내고 신문을 읽는데 한 남자가 옆에 앉더니 인사합니다. “신윤동욱입니다.” ‘캬앗’ 비명이 터져나올까봐 어금니를 꽉 깨물었습니다. 그는 나를 전혀 모르지만, 나는 그를 너무 잘 압니다. 기자가 된 지 10년이 넘은 ‘주니어’ 기자지만 그의 기사는 변함없이 내 교재이니까요. 달아오르는 얼굴을 보일까봐 푹 숙이며 “안녕하세요, 선배”라고 말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기자가 되어 행복한 순간이.

2012년 6월18일 제915호 ‘힐링 투게더: 고문 피해자, 해고 노동자를 치유하다’부터 2016년 3월21일 제1103호 ‘지워지고 사라지고 은폐당한 세월호 10가지 진실, 101분의 기록’까지 를 꽤 만들었지만 표지이야기를 쓰는 일은 익숙해지지 않았습니다. 몇 주간 사람 사이와 현장을 종종거리고 취재하고도 마감 전날이면 기사와 힘겨루기를 해야만 했습니다. 새벽 2~3시께 글자로 가득해야 할 노트북에 홀로 껌뻑거리는 커서를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습니다. ‘내가 잘하는 일이 따로 있지 않을까.’ 그 고통스러운 마감이 지나가면 그러나, 또 새로운 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한장 한장 넘기며 주말 내내 즐겁게 읽었습니다. 내 기사를 쓰는 데 급급해서 마감날에는 편집장의 ‘만리재에서’부터 동료 기자들의 기사까지 꼼꼼히 보지 못했으니까요.

제1307호는 이 발간되기 전에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읽고 또 읽은 첫 번째 잡지입니다. 표지이야기 ‘이윤택 #미투 르포’, 특집 ‘4·15 총선’ 그리고 이슈 ‘엔(n)번방’을 데스킹했습니다. 21년 독자, 4년 기자였지만 편집장은 처음입니다. 기사와 편집 전체를 아우르는 편집장의 역할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윤곽이 잡히는 듯하자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그래도, 그래도 설렘이 다가옵니다. 경험과 지혜를, 무엇보다 마음을 다하겠습니다.

정은주 편집장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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