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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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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는 처음이지만

등록 2020-03-17 16:16 수정 2020-05-07 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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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선거법 개정으로 만 18살에게 선거권을 준 뒤 언론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표현은 ‘교복 입은 유권자’입니다. 올해 총선에서 첫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53만 명 가운데 고등학교에 다니는 약 14만 명의 유권자를 주목하는 표현이죠. 이는 ‘교실의 정치화’ ‘학교가 정치판이 된다’ 등 부정적인 시각으로 연결됩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저도 편견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개구리 올챙이 시절 생각 못하고 말이죠.ㅠ)

제1303호 ‘18살이 온다’를 취재하고 기사를 쓰면서 이런 편견이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사회가 18살을 ‘단일한 존재’(공부에 충실해야 하는 학생)로만 본다는 거죠. 취재 과정에서 접한 청소년들은 당연하게도 지역과 계층, 성별에 따라 다채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학교에 다니는 청소년과 학교 밖 청소년, 학생인권조례가 있는 지자체와 없는 지자체에 사는 청소년, 일찍부터 아르바이트나 현장실습생 등으로 노동현장에 뛰어든 청소년, “여자는 시집 잘 가서 편하게 사는 게 좋다”는 이야기를 선생님이나 어른에게 여전히 듣는 청소년…. 각자 서 있는 곳에 따라 청소년들의 이해관계도, 욕구도 각각 다릅니다.

사회적으로 봐도 청소년은 어리고 미숙한 ‘학교 안의 존재’가 아닙니다.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는 만 15살 이상부터 집계합니다. 여성가족부의 ‘2018 청소년 매체이용 및 유해환경 실태조사’(2018년 7~9월, 초·중·고 재학 청소년 1만5657명 조사)를 보면 청소년 아르바이트생(조사 대상의 9.0%)의 34.9%가 최저임금을 받지 못했고,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청소년은 61.6%로 나타납니다. 부당한 처우를 받은 청소년 70.9%는 “참고 계속 일했다”고 답했네요. 성인 노동자가 겪는 문제를 ‘더 세게’ 겪고 있습니다.

학생인권, 노동의 권리, 성차별… 청소년들이 겪는 문제와 이를 개선할 해법은 모두 정치와 닿아 있습니다. 정치를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쓰이는 학문적 정의는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 배분”(미국 정치학자 데이비드 이스턴)입니다. <한겨레21>이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와 공동으로 진행한 온라인 설문조사에서 청소년 선거권에 대해 “정치인이 청소년의 의견을 더 많이 반영할 것이다”란 응답이 43.8%로 가장 많이 나왔습니다. 이는 사회적 가치를 배분하라는 유권자의 ‘평범한 요구’와 연결됩니다.

처음이라 선거 과정에서 잡음이나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길게 보면 18살 선거권은 새로운 유권자의 목소리가 선거를 통해 표현되고 정치가 이를 해결하는 ‘당연한 과정’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이미 많은 나라가 ‘별일 없이’ 그러고 있고요.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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