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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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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은 사초다”

1300호 기념으로 만난 독자 김채현 한예종 무용원 명예교수
등록 2020-02-15 15:55 수정 2020-05-02 19:29
김채현 한예종 무용원 명예교수가 1298권의 <한겨레21> 곁에 앉아 있다.

김채현 한예종 무용원 명예교수가 1298권의 <한겨레21> 곁에 앉아 있다.

그가 즐기는 건 ‘엉거주춤’이다. 중요한 무용 공연장에는 어김없이 카메라 두 대 옆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공연을 녹화 중인 그를 만날 수 있다. 최근에 그가 나타난 곳은 아르코예술극장의 젊은 무용가들의 공연(‘차세대열전 2019!’)이었다. 김채현 춤 비평가(사진)다. 지난해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을 정년퇴임한 뒤 최근에 서울 마포구 동교동에 ‘아카데미아인’이라는 춤인문학습원을 열었다. 2월11일 이곳을 찾았다.

낙서 금지, 줄은 주황색 형광펜으로

그는 개인이 꾸린 무용 아카이브로 이름이 높다. 시기별로 있는 육완순의 대표작 록오페라 , 김매자의 2012년 걸작 공연 등은 그의 리스트 아주 일부에 불과하다. 정확한 비평을 위해 1992년 소니 8㎜ 카메라로 시작해, 6㎜ 비디오카메라, 디지털 캠코더까지 찍은 영상이 1만 편가량 된다. 자신의 자료 양이 공공기관을 능가한다는 자부심도 대단하다. 예전에 국립극장 자문위원 시절 극장장을 하던 김명곤씨가 그에게 삼고초려를 하며 영상을 구애했지만 꿈쩍을 않다가 공연예술자료관이 생기는 것을 보고 ‘아 열심이구나’라고 평가해 기증을 결정하기도 했다. 최근 리스트를 검토한 저작권위원회에 250편을 기증했다. 이는 음악 등 인접 저작권 문제가 해결되면 공개될 예정이다(‘국민 보물찾기 운동’). 그는 아카데미아인과 대안연구공동체 등에서 이 자료를 활용해 ‘커뮤니티 댄스’ 등을 강의한다. ‘커뮤니티 댄스’란 자발성을 가진 일반인이 모여 결속력을 다지며 함께 추는 춤을 말한다. 강강수월래가 대표적이다. 그가 이 강의를 할 때 곁들이는 자료에는 의외의 것도 있다. 바로 이다.

그는 을 아카데미아인의 책장에 호수별로 정리해놓고 활용한다. 일행을 위해 쌓인 잡지를 꺼내놓는데 26년 전 잡지가 어제 인쇄돼 나온 것처럼 깨끗하다. 함께 기자를 만난 아카데미아인의 대표이자 김 명예교수의 아내인 이은희씨는 “(잡지를) 볼 때도 덜덜 떨면서 본다”고 말한다. 낙서도 금지다. 대신 읽다가 좋은 구절이나 중요한 구절에는 형광펜을 긋는다. 정해진 주황색 형광펜으로.

그가 모은 것은 뿐은 아니지만 첫호부터 최신호까지 갱신하며 모으는 것은 이 유일하다. 은 창간호부터 모았다가 중간에 삼성 광고 사태가 일어나면서 중단했고, 다른 주간지도 창간호부터 모았지만 지난해 중단했다.

김 명예교수는 수업을 위해, PDF로 제공되지 않는 초기 을 일일이 스캔했다. 잡지를 스캔했지만 PDF처럼 깨끗하게 파일이 만들어져 있다. 그는 파일이 저장된 화면을 넘겨가며 오토캠핑 소개 기사, 광고, 1호 커버스토리 ‘14살의 도전’을 보여준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를 보여주고, 그 맥락 속에 춤을 설명하면서 수업한다.”

을 모아놓은 캐비닛

가장 많이 모았던 것은 신문이었다. 1988년 5월15일부터 2001년 9월30일까지 모은 신문을 학교(한예종)에 기증했다. 학교에서 자료를 헤아려보니 10호 정도 빠져 있었다고 한다. 이때 신문을 기증한 것은 부인 이은희씨가 “더 이상 침범하지 말라”고 ‘황제적 컬렉터’에게 항의하면서였다.

부부는 서울시 마포구 연남동 같은 집에서 25년째 살고 있다. 신혼 때 얻은 집이 모은 자료로 좁아져서 150m 떨어진 집으로 이사한 뒤로 쭉이다. 35평은 되는 건물의 지하부터 2층까지 그가 모으는 자료로 가득하다. 지하는 자료 보관용으로 제쳐뒀고, 2층 생활하는 공간도 긴 벽이 테이프로 가득하다. 40년 된 집이라 겨울에는 난방이 잘 안 될 정도로 벽이 얇지만 다른 곳으로 이사할 수 없다.

새롭게 마련한 공간 아카데미아인에는 추려서 자료를 모았다. 무용원에 있던 교수실을 그대로 옮긴 방, 중요 자료를 위한 방, 그리고 강의실로 쓰는 방에는 을 담아놓은 캐비닛이 있다. 기자를 맞기 전 500호와 1000호 특별부록으로 제공된 표지 인덱스를 펼쳐놓았다. 표지를 일일이 기억하고 기자들의 글버릇을 알고 있다. “옛날에 오래 있던 그 기자(이름과 분야를 정확하게 댔다)는 ‘게다’를 많이 썼다. 진중권이 오히려를 외려로 쓰는 것과 비슷하게.”

이명박 집권 초기 파시즘에 비유한 표지 등은 속이 시원할 정도로 좋았다. 김윤옥 여사의 한식 세계화를 다룬 표지이야기는 여러 번 읽었다. 이 무용 기사를 다룬 적이 많지 않았지만 “문화예술에 대한 충실한 보도와 품격 있는 소화”를 의 장점으로 들었다. 그는 을 ‘사초’라고 말한다. “역사 속에 맥락, 배경을 정확하게 위치시키고 사회 이슈에서 이야기되는 지점을 놓치지 않고 풀어냈다.” 26년 역사에서 한동안 실망스러웠던 때도 있었다. 어느 시기는 어정쩡한 기사를 썼고 어느 시기는 폭풍 같았다. “은 대중 지향이다. 품격과 신뢰와 사회적 책임 여러 사이에서 노력을 많이 한다. 하나의 언론이 모든 걸 할 수 있을까. 결함이 다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선에서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질감과 실감 그리고 수면용

류이근 편집장이 후원자·구독자 모임을 연다고 해서, 마침 가까운 데이기도 해서 가려고 했는데 그날 촬영이 잡혀 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다른 아쉬운 점도 있다. “그런데 은 잔정이 없는 것 같다. 오랫동안 정기구독을 하면서 몇 프로 할인받는 것 외에 혜택이 없다. 주주(그는 당연하게도 한겨레 창간주주다)한테도 혜택이 없다.”

아직 배달이 안 되었을까봐 제1299호를 건네자, “오늘 올 텐데”라고 말하면서도 기쁘게 건네받는다. 이은희씨는 “나는 어제 인터넷으로 봤지”라고 말한다. 김 명예교수는 “인터넷으로 안 본다. 질감이, 실감이 다르다. 잠을 청할 때도 좋다. 꼭 보면서 잠든다.” 이은희씨의 지청구가 한 번 더 날아들었다. “꼭 불을 켜고 잔다니까요.”

글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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